▲1985년 삼미 18연패…청보 등장
개막전 승리 후 내리 18연패 수렁
프로야구 최다 연패 기록 불명예
선수단 한데 모여 기도회 열기까지
연패 탈출하던 날, 구단 매각 확정
▲1994년 통한의 한국시리즈
인천 연고팀 사상 첫 KS 진출 열광
1차전 김홍집 호투 속 연장전 접전
11회말 1사 상황, 끝내기홈런 허용
그대로 판세 기울며 4전 전패 눈물
▲1998년 인천 연고팀 첫 우승
정규리그 81승…당시 역대 최다승
투타 완벽한 조화 한국시리즈 직행
KS 6차전 마지막 아웃카운트 순간
도원구장 관중석, 환호·눈물 뒤섞여
20세기 인천 프로야구는 영욕의 시간들을 보냈다. 드물었던 기쁨 뒤에는 어김없이 슬픔이 찾아왔다. 연패에서 탈출하자마자 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환호한 순간 끝내기 패배를 마주했다. 인천 야구의 한을 푼 한국시리즈 우승 끝에는 또 다른 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5년 18연패와 청보 등장
장명부의 초인적 활약에 힘입어 1983년 우승 후보로 떠올랐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듬해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도깨비팀'이라는 별명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였다.
도깨비팀은 1985년 시즌 개막과 동시에 진면목을 보였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년도 우승팀 롯데 자이언츠에 5대 1로 승리를 거뒀다. 당대 최고 투수였던 최동원을 상대로 6회까지 10안타를 치며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한 달간 삼미 슈퍼스타즈는 한 번도 승수를 추가하지 못했다. 프로야구 40년을 통틀어 최다 기록으로 남은 18연패였다.
백약이 무효였다. 초반부터 난타당하거나, 그나마 팽팽하게 끌고가던 경기에서도 막판에 무너졌다.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였던 김재현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까 실의에 빠졌다. 오죽하면 원정 숙소에서 선수단이 모여 기도회를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급기야 4월16일 인천에선 OB 베어스에 0대 16으로 최다 점수차 완봉패 수모를 겪었다. 야구장은 분노로 들끓었다. 경기가 끝난 뒤 관중들이 구단 버스를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삼미 슈퍼스타즈 외야수 양승관은 “버스 유리창이 한 장 남고 전부 깨져서 경찰이 와서 해산시킨 적도 있다. 돌멩이가 날아드니까 장비 가방으로 창문을 막고, 선반에 숨고 난리가 났다”며 “유니폼을 입고 운동장에 나가는 게 창피했다”고 말했다.
치욕적인 연패의 끝은 야구단 몰락이었다. 18연패에서 탈출한 4월30일 삼미 슈퍼스타즈 매각이 확정됐다. 경영난에 빠졌던 삼미 그룹은 야구단을 청보식품에 넘겼다. 그해 후기리그부터 모습을 드러낸 청보 핀토스는 '탈꼴찌'가 유일한 관심사인 팀이었다. 청보 핀토스는 2년 반 동안 271경기에서 97승만을 거둔 채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1985년 입단해 청보 핀토스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던 양후승은 “구단주는 열정적이었지만 전력이 너무 약했다”고 말했다.
1994년 통한의 한국시리즈
1994년 10월1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태평양 돌핀스와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1차전. 8회말 수비를 마치고 더그아웃에 돌아온 포수 김동기는 정동진 감독에게 다가가 “공에 힘이 빠졌다”고 속삭였다. 그해 승률왕 타이틀을 거머쥔 선발투수 김홍집의 호투가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홈플레이트 끝을 타고 들어오는 제구는 “기가 막힐 정도”였지만 종속이 떨어지고, 슬라이더의 각은 밋밋해지고 있었다.
투수코치 김시진도 같은 생각이었다. 김시진은 김홍집에게 다가가 “이제 그만하자”고 말했다. 단판 승부가 아닌 한국시리즈를 길게는 7차전까지 내다봐야 했다. 김홍집과 좌완 동기생 맞대결을 벌였던 LG 트윈스 이상훈은 이미 마운드를 내려갔다. 김홍집은 “끝장을 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7차전까지 총력전으로 투수를 모두 투입할 것”이라고 출사표를 던졌던 정동진 감독은 교체 지시를 내리지 않고 돌아섰다.
1대 1로 팽팽했던 경기는 연장전으로 접어들었다. 인천 연고팀이 처음으로 진출한 한국시리즈였다. 1만5000여명이 원정 응원전을 벌인 3루 관중석에는 '13년을 기다렸다, 태평양의 우승을'이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마운드에는 여전히 김홍집이 올랐다. 11회말 1사에서 LG 트윈스 김선진이 초구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김홍집이 던진 141번째 공은 가운데 몰린 슬라이더였다. 포수 김동기는 “공이 방망이에 맞기도 전에 악 소리가 나왔다”고 했다. 끝내기 홈런 한 방으로 한국시리즈 판세는 기울었다.
그해 인천구장은 야구 열기로 뒤덮였다. 태평양 돌핀스가 정규리그에서 2위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켰고, 1만명만 입장해도 발디딜 틈이 없던 야구장에는 시즌 47만6277명의 관중이 몰렸다. 최다 관중 기록은 SK 와이번스가 우승한 2007년(65만6426명)까지 깨지지 않았다.
플레이오프에서 3연승하며 한국시리즈에 오른 태평양 돌핀스는 결국 네 경기를 모두 지며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다. 5회까지 4대 0으로 앞서다가 실책성 플레이가 겹쳐 역전패한 3차전도 뼈아팠다. 태평양 돌핀스 4번타자였던 김경기는 “1차전만 이겼어도 시리즈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3차전도 이기는 시합이었는데 분위기가 뒤집어지고 말았다”고 떠올렸다.
1998년 인천 연고팀 첫 우승
설욕의 기회는 4년 만에 찾아왔다. 1998년 선두를 독주하며 81승으로 역대 최다승 타이 기록을 세운 현대 유니콘스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상대는 LG 트윈스였다.
모기업 지원을 등에 업고 인천 연고팀 현대 유니콘스 전력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정민태(17승)·정명원(14승)·위재영(13승)·김수경(12승)·최원호(10승) 등 선발진은 모두 두 자릿수 승리를 거뒀다. 그야말로 '투수왕국'이었다. 투수코치였던 김시진은 “정명원·정민태를 비롯한 주축 투수들이 야구에 대한 열정이 엄청났다. 최원호·김수경 등 젊은 선수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왔고 투수진이 응집된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현대 유니콘스는 투수만 왕국이 아니었다. 박재홍은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하며 맹활약을 펼쳤고, 간판타자 김경기는 짝수 해를 맞아 부활했다. 전준호는 타율 2위, 35도루로 톱타자 고민을 해결했다. 마지막 퍼즐로 영입한 포수 박경완은 19홈런을 치며 타격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해 10월30일 인천에서 한국시리즈 6차전이 열렸다. 입장권은 20분 만에 매진됐다. 현대 유니콘스는 우승까지 1승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1·4차전 선발로 나와 승리를 거둔 정민태는 9회초 마운드에 올라 경기를 마무리했다. 프로야구 17번째 시즌 만에 인천 연고팀이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한 순간, 관중석은 환호와 눈물로 뒤섞였다. '미스터 인천' 김경기는 “눈물을 흘리는 관중이 많아서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삼미 슈퍼스타즈 간판타자였고, 현대 유니콘스 코치로 우승을 일군 양승관은 “트레이드로 선수를 보강했을 뿐 아니라 구단에서 물심양면으로 뒷받침을 해줬다. 신나게 야구를 했던 때였다”고 떠올렸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아픔으로 끝났지만…어떻게든 이기고 싶었다”
[1994년 KS '투혼의 141구' 김홍집]
“오랜 세월 흘렀는데 날 알아봐 주더라”
“다시 돌아간다면 11회 마운드 안 올라”
“연고지 이전 후 수원 경기, 홈 같지 않아”
해마다 가을이 되면 김홍집(51) 부평구리틀야구단 감독은 그날을 떠올린다. “찬바람 불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인데도, 주변에서 먼저 연락이 온다. 아픔으로 끝났지만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던 경기”였다. 지난 5월18일 리틀야구단 훈련장에서 만난 김홍집에게 그날에 대해 물었다. 미소가 돌아왔다.
▲1994년 한국시리즈 1차전 얘길 안 할 수가 없다.
-야구도, 텔레비전도 잘 안 보는데 가을이면 명승부라면서 예전 영상을 보여주니까 그 경기 얘기가 나온다. 은퇴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어르신들도 알아봐 주신다. 어떡하겠나. 진 건 어쩔 수 없으니 웃으면서 넘겨야지.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11회 마운드에 오를지.
-절대 안 오른다.(웃음) 당시에는 승부욕 때문에 동점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려가기 싫었다. 젊었을 때니까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다. 그래도 이름 석 자가 그 경기 때문에 기억되는 것도 사실이다.
▲오랜 기간 부상에 시달렸는데.
-1995년부터 전지훈련 가서 던지다 보면 통증 때문에 귀국하고, 재활해서 던지면 또 아팠다. 직업병처럼 어깨 부상을 안고 살았다.
▲인천 출신으로 현대 유니콘스에서 뛰었는데, 연고지 이전 당시 어땠는지.
-수원까지 원래 연고지였지만 거기서 경기하면 홈구장 느낌이 나지 않았다. 선수들이 가지 말자고 해서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아쉽지만 우리가 답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2003년 시즌을 끝으로 한화 이글스에서 은퇴했다.
-어깨는 괜찮아졌는데 나이가 문제였다. 2004년 초 SK 와이번스에서 연락이 왔다. 구단 홈페이지 게시판에 '김홍집에게 재기의 기회를 줘야 한다'는 글이 많이 올라왔다고 했다. 입단 테스트를 준비했는데, 반년 가까이 쉬었더니 스피드가 안 나와서 결국 은퇴했다. 예전에 어떤 선배가 '유니폼 입을 때가 봄날이다, 유니폼 벗으면 겨울이야'라고 했는데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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