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결정적 장면들]
6회초-만년 꼴찌, 한을 풀다

밀물 같은 기쁨 썰물 같은 슬픔 오갔던 20세기

▲1985년 삼미 18연패…청보 등장
개막전 승리 후 내리 18연패 수렁
프로야구 최다 연패 기록 불명예
선수단 한데 모여 기도회 열기까지
연패 탈출하던 날, 구단 매각 확정

▲1994년 통한의 한국시리즈
인천 연고팀 사상 첫 KS 진출 열광
1차전 김홍집 호투 속 연장전 접전
11회말 1사 상황, 끝내기홈런 허용
그대로 판세 기울며 4전 전패 눈물

▲1998년 인천 연고팀 첫 우승
정규리그 81승…당시 역대 최다승
투타 완벽한 조화 한국시리즈 직행
KS 6차전 마지막 아웃카운트 순간
도원구장 관중석, 환호·눈물 뒤섞여

20세기 인천 프로야구는 영욕의 시간들을 보냈다. 드물었던 기쁨 뒤에는 어김없이 슬픔이 찾아왔다. 연패에서 탈출하자마자 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환호한 순간 끝내기 패배를 마주했다. 인천 야구의 한을 푼 한국시리즈 우승 끝에는 또 다른 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 1983년 8월 삼미 슈퍼스타즈 경기 장면. 1985년 프로야구 역사상 최다 기록인 18연패에 빠졌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연패 탈출 직후 청보 핀토스로 팀이 바뀌며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83년 8월 삼미 슈퍼스타즈 경기 장면. 1985년 프로야구 역사상 최다 기록인 18연패에 빠졌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연패 탈출 직후 청보 핀토스로 팀이 바뀌며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1985년 18연패와 청보 등장

장명부의 초인적 활약에 힘입어 1983년 우승 후보로 떠올랐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듬해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도깨비팀'이라는 별명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였다.

도깨비팀은 1985년 시즌 개막과 동시에 진면목을 보였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년도 우승팀 롯데 자이언츠에 5대 1로 승리를 거뒀다. 당대 최고 투수였던 최동원을 상대로 6회까지 10안타를 치며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한 달간 삼미 슈퍼스타즈는 한 번도 승수를 추가하지 못했다. 프로야구 40년을 통틀어 최다 기록으로 남은 18연패였다.

백약이 무효였다. 초반부터 난타당하거나, 그나마 팽팽하게 끌고가던 경기에서도 막판에 무너졌다.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였던 김재현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까 실의에 빠졌다. 오죽하면 원정 숙소에서 선수단이 모여 기도회를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 1985년 11월 실내연습장에서 체조로 몸을 풀고 있는 청보 핀토스 선수단./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85년 11월 실내연습장에서 체조로 몸을 풀고 있는 청보 핀토스 선수단./인천일보 필름 자료

급기야 4월16일 인천에선 OB 베어스에 0대 16으로 최다 점수차 완봉패 수모를 겪었다. 야구장은 분노로 들끓었다. 경기가 끝난 뒤 관중들이 구단 버스를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삼미 슈퍼스타즈 외야수 양승관은 “버스 유리창이 한 장 남고 전부 깨져서 경찰이 와서 해산시킨 적도 있다. 돌멩이가 날아드니까 장비 가방으로 창문을 막고, 선반에 숨고 난리가 났다”며 “유니폼을 입고 운동장에 나가는 게 창피했다”고 말했다.

치욕적인 연패의 끝은 야구단 몰락이었다. 18연패에서 탈출한 4월30일 삼미 슈퍼스타즈 매각이 확정됐다. 경영난에 빠졌던 삼미 그룹은 야구단을 청보식품에 넘겼다. 그해 후기리그부터 모습을 드러낸 청보 핀토스는 '탈꼴찌'가 유일한 관심사인 팀이었다. 청보 핀토스는 2년 반 동안 271경기에서 97승만을 거둔 채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1985년 입단해 청보 핀토스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던 양후승은 “구단주는 열정적이었지만 전력이 너무 약했다”고 말했다.

 

▲ 1994년 10월1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태평양 돌핀스 팬들이 원정 응원을 벌이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4년 10월1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태평양 돌핀스 팬들이 원정 응원을 벌이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1994년 통한의 한국시리즈

1994년 10월1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태평양 돌핀스와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1차전. 8회말 수비를 마치고 더그아웃에 돌아온 포수 김동기는 정동진 감독에게 다가가 “공에 힘이 빠졌다”고 속삭였다. 그해 승률왕 타이틀을 거머쥔 선발투수 김홍집의 호투가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홈플레이트 끝을 타고 들어오는 제구는 “기가 막힐 정도”였지만 종속이 떨어지고, 슬라이더의 각은 밋밋해지고 있었다.

▲ 1994년 10월19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태평양 돌핀스 정동진 감독과 선수들이 작전을 짜고 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4년 10월19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태평양 돌핀스 정동진 감독과 선수들이 작전을 짜고 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투수코치 김시진도 같은 생각이었다. 김시진은 김홍집에게 다가가 “이제 그만하자”고 말했다. 단판 승부가 아닌 한국시리즈를 길게는 7차전까지 내다봐야 했다. 김홍집과 좌완 동기생 맞대결을 벌였던 LG 트윈스 이상훈은 이미 마운드를 내려갔다. 김홍집은 “끝장을 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7차전까지 총력전으로 투수를 모두 투입할 것”이라고 출사표를 던졌던 정동진 감독은 교체 지시를 내리지 않고 돌아섰다.

1대 1로 팽팽했던 경기는 연장전으로 접어들었다. 인천 연고팀이 처음으로 진출한 한국시리즈였다. 1만5000여명이 원정 응원전을 벌인 3루 관중석에는 '13년을 기다렸다, 태평양의 우승을'이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마운드에는 여전히 김홍집이 올랐다. 11회말 1사에서 LG 트윈스 김선진이 초구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김홍집이 던진 141번째 공은 가운데 몰린 슬라이더였다. 포수 김동기는 “공이 방망이에 맞기도 전에 악 소리가 나왔다”고 했다. 끝내기 홈런 한 방으로 한국시리즈 판세는 기울었다.

▲ 태평양 돌핀스가 돌풍을 일으킨 1994년 10월9일 플레이오프 1차전을 앞두고 인천구장 매표소가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태평양 돌핀스가 돌풍을 일으킨 1994년 10월9일 플레이오프 1차전을 앞두고 인천구장 매표소가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그해 인천구장은 야구 열기로 뒤덮였다. 태평양 돌핀스가 정규리그에서 2위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켰고, 1만명만 입장해도 발디딜 틈이 없던 야구장에는 시즌 47만6277명의 관중이 몰렸다. 최다 관중 기록은 SK 와이번스가 우승한 2007년(65만6426명)까지 깨지지 않았다.

플레이오프에서 3연승하며 한국시리즈에 오른 태평양 돌핀스는 결국 네 경기를 모두 지며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다. 5회까지 4대 0으로 앞서다가 실책성 플레이가 겹쳐 역전패한 3차전도 뼈아팠다. 태평양 돌핀스 4번타자였던 김경기는 “1차전만 이겼어도 시리즈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3차전도 이기는 시합이었는데 분위기가 뒤집어지고 말았다”고 떠올렸다.

 

▲ 1998년 10월30일 인천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이 깃발을 흔들며 경기장을 돌고 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8년 10월30일 인천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이 깃발을 흔들며 경기장을 돌고 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1998년 인천 연고팀 첫 우승

설욕의 기회는 4년 만에 찾아왔다. 1998년 선두를 독주하며 81승으로 역대 최다승 타이 기록을 세운 현대 유니콘스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상대는 LG 트윈스였다.

모기업 지원을 등에 업고 인천 연고팀 현대 유니콘스 전력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정민태(17승)·정명원(14승)·위재영(13승)·김수경(12승)·최원호(10승) 등 선발진은 모두 두 자릿수 승리를 거뒀다. 그야말로 '투수왕국'이었다. 투수코치였던 김시진은 “정명원·정민태를 비롯한 주축 투수들이 야구에 대한 열정이 엄청났다. 최원호·김수경 등 젊은 선수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왔고 투수진이 응집된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현대 유니콘스는 투수만 왕국이 아니었다. 박재홍은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하며 맹활약을 펼쳤고, 간판타자 김경기는 짝수 해를 맞아 부활했다. 전준호는 타율 2위, 35도루로 톱타자 고민을 해결했다. 마지막 퍼즐로 영입한 포수 박경완은 19홈런을 치며 타격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했다.

▲ 1998년 10월30일 인천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이 '인간 피라미드'를 쌓으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8년 10월30일 인천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이 '인간 피라미드'를 쌓으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그해 10월30일 인천에서 한국시리즈 6차전이 열렸다. 입장권은 20분 만에 매진됐다. 현대 유니콘스는 우승까지 1승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1·4차전 선발로 나와 승리를 거둔 정민태는 9회초 마운드에 올라 경기를 마무리했다. 프로야구 17번째 시즌 만에 인천 연고팀이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한 순간, 관중석은 환호와 눈물로 뒤섞였다. '미스터 인천' 김경기는 “눈물을 흘리는 관중이 많아서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삼미 슈퍼스타즈 간판타자였고, 현대 유니콘스 코치로 우승을 일군 양승관은 “트레이드로 선수를 보강했을 뿐 아니라 구단에서 물심양면으로 뒷받침을 해줬다. 신나게 야구를 했던 때였다”고 떠올렸다.

▲ 1998년 10월23일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현대 유니콘스 팬들이 관중석을 가득 메우고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8년 10월23일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현대 유니콘스 팬들이 관중석을 가득 메우고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아픔으로 끝났지만…어떻게든 이기고 싶었다”

[1994년 KS '투혼의 141구' 김홍집]

“오랜 세월 흘렀는데 날 알아봐 주더라”
“다시 돌아간다면 11회 마운드 안 올라”
“연고지 이전 후 수원 경기, 홈 같지 않아”

▲ 김홍집(윗줄 맨 오른쪽) 부평리틀야구단 감독이 제자들과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 김홍집(윗줄 맨 오른쪽) 부평리틀야구단 감독이 제자들과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김홍집(51) 부평구리틀야구단 감독은 그날을 떠올린다. “찬바람 불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인데도, 주변에서 먼저 연락이 온다. 아픔으로 끝났지만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던 경기”였다. 지난 5월18일 리틀야구단 훈련장에서 만난 김홍집에게 그날에 대해 물었다. 미소가 돌아왔다.

 

▲1994년 한국시리즈 1차전 얘길 안 할 수가 없다.

-야구도, 텔레비전도 잘 안 보는데 가을이면 명승부라면서 예전 영상을 보여주니까 그 경기 얘기가 나온다. 은퇴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어르신들도 알아봐 주신다. 어떡하겠나. 진 건 어쩔 수 없으니 웃으면서 넘겨야지.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11회 마운드에 오를지.

-절대 안 오른다.(웃음) 당시에는 승부욕 때문에 동점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려가기 싫었다. 젊었을 때니까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다. 그래도 이름 석 자가 그 경기 때문에 기억되는 것도 사실이다.

 

▲오랜 기간 부상에 시달렸는데.

-1995년부터 전지훈련 가서 던지다 보면 통증 때문에 귀국하고, 재활해서 던지면 또 아팠다. 직업병처럼 어깨 부상을 안고 살았다.

 

▲인천 출신으로 현대 유니콘스에서 뛰었는데, 연고지 이전 당시 어땠는지.

-수원까지 원래 연고지였지만 거기서 경기하면 홈구장 느낌이 나지 않았다. 선수들이 가지 말자고 해서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아쉽지만 우리가 답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2003년 시즌을 끝으로 한화 이글스에서 은퇴했다.

-어깨는 괜찮아졌는데 나이가 문제였다. 2004년 초 SK 와이번스에서 연락이 왔다. 구단 홈페이지 게시판에 '김홍집에게 재기의 기회를 줘야 한다'는 글이 많이 올라왔다고 했다. 입단 테스트를 준비했는데, 반년 가까이 쉬었더니 스피드가 안 나와서 결국 은퇴했다. 예전에 어떤 선배가 '유니폼 입을 때가 봄날이다, 유니폼 벗으면 겨울이야'라고 했는데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글·사진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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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망이'는 인천 야구의 고민거리였다.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김경기(54)와 최정(35)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입단했다. 인천 야구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루수-'미스터 인천' 김경기1994년 인천 야구팬 눈길은 김경기가 쓴 헬멧으로 향했다. 팀타율 꼴찌 타선에서 그가 홈런을 칠 때마다 헬멧에는 하트 모양 스티커가 하나씩 늘었다. 그해 9월15일 플레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구원투수-조웅천' '포수-박경완' 태평양 돌핀스 돌풍과 현대 유니콘스 우승의 원동력은 '투수왕국'이었다. SK 와이번스는 '벌떼 마운드'로 왕조 시대를 열었다. 투수왕국과 벌떼 마운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20년간 '인천의 허리'로 마운드를 지탱한 조웅천(51)과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공수겸장' 박경완(50)이다. 구원투수-'인천의 허리' 조웅천1994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태평양 돌핀스는 이듬해 7위로 고꾸라졌다. 선발진이 무너질 때마다 중간계투로 나선 사이드암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우완선발-정민태' '좌완선발-김광현' 프로야구 40년은 별들의 역사였다. '슈퍼스타즈'가 쏘아 올린 공은 인천에도 수많은 별들의 발자취를 남겼다.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통틀어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를 뽑았다. 이른바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다. 12명의 올스타를 선정한 설문조사는 세대별로 추린 인천 야구인 40명을 대상으로 했다. 인천일보는 '구도 인천' 2회부터 4회까지 매주 4명씩 인천 그라운드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냈던 전설들을 소환한다. 인천 야구팬이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법한 '드림팀'이다. 그리고 & [구도 인천] 슈퍼스타 등장부터 랜더스까지…눈물·환희 뒤섞인 '굴곡의 세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2년 7월17일, 인천공설운동장(숭의종합운동장·도원구장)에서 프로야구 첫 경기가 열렸다. 그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야구장 보수 공사로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기리그 홈 경기를 춘천에서 치렀다. 인천시민 앞에 첫선을 보인 경기 상대는 서울 연고 MBC 청룡.결과는 4대 10으로 대패였다. 삼미 슈퍼스타즈 후기리그 성적은 0승6패가 됐다. '구도'라는 자부심을 가진 관중들에게 낯선 야구였다. 그때부터 인천 프로야구단에는 반복되는 꼴찌와 구단 매각이라는 비운이 계속됐다. 40년 세월은 야속 [구도 인천] 100년 전 웃터골의 열기, 100년 후 연안부두 함성으로 1982년 프로야구가 첫발을 내디뎠다. '삼미 슈퍼스타즈'로 출발한 인천 프로야구도 40년을 맞았다.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를 거쳐 'SSG 랜더스'에 이른 인천 연고팀은 유난히 부침을 겪었다. '왕조'의 시절도 누렸다. 인천사람들에게 프로야구는 눈물이자, 환희였다.인천은 일찍이 '야구도시'였다. 100여년 전 웃터골은 야구의 성지였고, '한용단'은 울분 [구도 인천] 근성과 감각, 명장의 조건…김진영·김재박 감독 감독과 대행 체제를 오가며 어수선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명장' 김진영(1935∼2020)의 존재였다.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그가 더그아웃에 앉아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성적으로 직결됐다. 명장이 떠나고 부침했던 사령탑은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남다른 감각을 지닌 김재박(68)의 등장으로 마침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감독을 맡은 그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의 오류도 증명했다. '인천 야구의 [구도 인천] 이기는 리더십, 우승의 조건…김성근·힐만·김원형 감독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연승과 연패를 거듭한다. 중요한 건 승패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선수단을 통솔하는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때도 바로 이 순간이다.22연승 신기록도 모자라 16연승을 내달린 팀이 있었다. 수염을 깎지 않은 감독의 징크스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 이면에는 “승리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여기며 안간힘을 쓴 집념이 있었다. 개막하자마자 6연패에 빠진 팀도 있었다. 야심차게 영입한 외국인 감독은 변함없이 운동장에 먼저 나와 ‘파이팅’을 외쳤다. 정답은 없었다. 두 [구도 인천] 웃터골에서 도원까지…인천야구 애환 품은 운동장 야구의 역사는 곧 운동장의 역사였다. 그라운드를 따라 이야기가 쌓였다. 인천 야구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웃터골과 인천야구장의 길은 엇갈렸다. 명맥이 끊겼던 웃터골에는 고교야구가 다시 숨을 불어넣었고, '구도 인천'을 일군 인천구장은 자취를 감췄다. 그라운드가 없으면 야구도 없었다. '100년 야구 역사의 발상지' 웃터골1921년 4월17일 인천 학생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한용단(漢勇團)'은 일본인 야구팀 '실업단'을 5대 1로 꺾었다. 같은 날 '미가도&# [구도 인천] 문학에서 랜필까지…인천팬 웃고 울린 ‘꿈의 극장’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 자락에 '꿈의 구장'이 터를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때는 2002년이었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는 축구를 비췄지만,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이라는 두 글자는 인천 야구와 동의어가 됐다. 또 다른 꿈의 구장은 '구도'의 기억도 소환했다. '꿈의 구장' 문학, '랜필'로 진화2002년 4월9일 인천 연고팀 역사상 한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이 세워졌다.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 경기에 입장한 관중 수는 2만7044명. [구도 인천] 구도의 영광 이끈 어린 영웅들, 인천야구 '주춧돌로 성장' 야구도시의 뿌리는 학생 야구였다.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용단’ 야구는 시대를 대변했다. 해방 이후 도시 대항 야구와 학생 야구가 전부였던 시절, 인천고와 동산고는 야구의 대명사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는 1950년대 인천을 떠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구도는 인천으로 통했고, 인천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고교야구 왕중왕' 인천고2005년 4월1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인천고와 부산고가 맞붙었다. '한국야구 100 [구도 인천] 구도의 미래 짊어진 새싹들, 마음껏 치고 던질 수 있어야 인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원 14명 가운데 졸업은 앞둔 6학년은 9명이다. 초등야구의 고민은 '선수 모집'이다. 정정호(38) 서화초 감독은 “리틀·유소년 야구단 출신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몰리니까 중학교 정원은 꽉 차는데, 초등 야구부는 대회 출전이 어려울 정도로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지난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지역 중학교로는 26년 만에 입상한 동인천중 야구부원은 42명이다. 중학야구의 고민은 '진학'이다. 송순석(40) 동인천중 감독은 “학년당 10명이 넘는데, 중학야구 팀은 클럽을 포함해 7 [구도 인천] 구도의 산증인들…채병용 코치·배수현 치어리더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