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감독들의 희로애락]
7회말-이기는 리더십, 우승의 조건

마침내 정상의 영광 안긴 '다이아몬드 위 마에스트로'

▲'야신' 김성근
1989년 돌풍·2000년대 왕조 이끌어
혹독한 훈련 기반 세 차례 우승컵 차지
'일구이무' 정신 바탕 매 경기 전력투구

▲'힐만매직' 트레이 힐만
'긍정 리더십' 인천팀 최초 외인 사령탑
선수와 격의없는 소통 더그아웃 활력
2018년 장타력 극대화 KS 우승 기적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연승과 연패를 거듭한다. 중요한 건 승패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선수단을 통솔하는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때도 바로 이 순간이다.

22연승 신기록도 모자라 16연승을 내달린 팀이 있었다. 수염을 깎지 않은 감독의 징크스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 이면에는 “승리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여기며 안간힘을 쓴 집념이 있었다. 개막하자마자 6연패에 빠진 팀도 있었다. 야심차게 영입한 외국인 감독은 변함없이 운동장에 먼저 나와 ‘파이팅’을 외쳤다. 정답은 없었다. 두 가지 색깔의 리더십은 모두 선수단을 하나로 모았고, 기적과도 같은 결말을 일궜다. 
 


▲ 2010년 9월26일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한 김성근(왼쪽) SK 와이번스 감독이 주장 김재현과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10년 9월26일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한 김성근(왼쪽) SK 와이번스 감독이 주장 김재현과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야신' 김성근

유언실행(有言實行). 2010년 초 문학구장 감독실 칠판에는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한다'는 뜻의 사자성어가 적혔다. SK 와이번스는 4승 4패로 시즌을 시작했다. 2007년부터 2년 연속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고, 2009년에도 7차전 끝에 아쉽게 우승을 놓친 SK 와이번스에 어울리지 않는 출발이었다.

▲ 1989년 시즌을 앞두고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취임한 김성근./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89년 시즌을 앞두고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취임한 김성근./인천일보 필름 자료

전력투구를 하지 않은 승리는 없었다. 혹독한 훈련은 안간힘을 쓰는 야구로 이어졌고, 두려움은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SK 와이번스는 2010년 시즌 초반 16연승을 질주하며 선두로 올라섰다. 김성근(80) 감독은 2011년 펴낸 저서 '김성근이다'에서 “프로야구 팀의 존재 이유는 승리”라고 했다. SK 와이번스는 그해 133경기에서 84승을 올렸고, 한국시리즈에서도 4연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왕조'의 주축 타자였던 박정권은 “선수들을 이끄는 리더십이 왕조의 원동력이었다. 일흔 나이에 펑고를 그렇게 쳐주셨다는 게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며 “연습을 많이 하면 그만큼 기회가 주어졌고, 운동장에 나가면 무서울 게 없었다”고 말했다.

▲ 2007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3월25일 출정식에서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이 고사를 지내고 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7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3월25일 출정식에서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이 고사를 지내고 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일구이무(一球二無). '공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고, 진정으로 최선의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이 말은 김성근의 지론이었다. 승부를 가르는 공 하나 때문에 선수들은 겨우내 훈련에 매달렸다. 김성근 감독이 '전력의 반'이라고 표현했던 포수 박경완은 “전지훈련을 가면 손바닥이 터질 때까지 방망이를 휘두르며 매일 1000개가 넘는 공을 쳤다. 그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야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오대산 극기훈련으로 시작한 1989년 태평양 돌핀스의 돌풍도, 당연하게만 여겨졌던 SK 와이번스 우승도 밑바탕에는 절실함과 믿음이 있었다. 태평양 돌핀스 포수였던 김동기는 “김성근 감독은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투수 기운을 북돋워줬다. 선수 자원이 부족해도 그런 믿음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 2007년 9월28일 정규시즌 1위를 확정한 김성근(가운데) SK 와이번스 감독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약속하며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7년 9월28일 정규시즌 1위를 확정한 김성근(가운데) SK 와이번스 감독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약속하며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김성근은 인천시민의 날인 2006년 10월15일 인천시청에서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처음 입었다. 그날 취임식에서 “그동안 감독 하면서 우승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오늘 처음 해보는 것”이라고 했다. 유언실행이었다.

 

▲ 201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트레이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 /사진제공=SSG 랜더스
▲ 201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트레이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 /사진제공=SSG 랜더스

 

'힐만 매직' 트레이 힐만

2017년 3월31일 SK 와이번스는 개막전에서 2대 3으로 패했다. 감독 트레이 힐만(59)은 당시 “결과를 빼고는 다 좋았다”는 소감을 남겼다. 날이 갈수록 연패 숫자는 쌓여 '6'에 다다랐다. 그해 주장이었던 박정권은 “동요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힐만 감독은 평정심을 유지했다. 운동장에서 '괜찮다'고 웃으며 독려하고 힘을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 201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트레이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사진제공=SSG 랜더스
▲ 201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트레이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사진제공=SSG 랜더스

힐만 감독은 구단 첫 번째 외국인 사령탑이었다. 메이저리그(캔자스시티 로열스)와 일본프로야구(닛폰햄 파이터스)에서 모두 감독을 맡았고, 2006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화려한 경력 또한 눈길을 끌었다. 연패는 예상을 빗나간 출발이었다.

연패 끝에 거둔 2017년 시즌 첫 승, 그리고 힐만 감독의 KBO리그 데뷔 첫 승부터 마법 같았다. 4월8일 인천에서 열린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최정은 홈런 네 방을 터뜨렸고, 팀은 9대 2로 이겼다. “가장 훌륭한 감독은 그 팀의 장점을 살리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선수들을 헷갈리게 하지 않고 일정한 메시지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취임 일성대로 힐만 감독은 장점인 장타력을 극대화했다. 그해 SK 와이번스 타자들이 쳐낸 홈런 234개는 프로야구 40년간 어느 팀도 도달하지 못한 숫자였다. 초반 연패를 딛고 SK 와이번스는 와일드카드로 2년 만의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 201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트레이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 /사진제공=SSG 랜더스
▲ 201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트레이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 /사진제공=SSG 랜더스
▲ 2018년 11월4일 한국시리즈 1차전을 앞두고 트레이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이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사진제공=SSG 랜더스
▲ 2018년 11월4일 한국시리즈 1차전을 앞두고 트레이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이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사진제공=SSG 랜더스

'힐만 매직'의 원동력은 긍정의 리더십이었다. 힐만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선수들과 격의 없이 지냈고, 행사장에선 분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장점을 살리는 야구도 계속됐다. '홈런 공장'은 2018년에도 233개의 홈런을 생산했다. 매직은 그해 가을 정점을 찍었다. 1차전 끝내기 홈런으로 시작한 플레이오프는 5차전 연장 역전 끝내기 홈런으로 끝났다. 한국시리즈에서도 정규시즌 1위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명승부를 거듭하며 4승 2패로 우승을 차지했다. 마지막 6차전은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고, 홈런으로 역전한 경기였다. “가장 훌륭한 감독은 그 팀의 장점을 살리는 감독”이라는 지론은 데뷔 첫 승부터 한국시리즈 마지막 승리까지 유효했다.

▲ 2018년 11월12일 잠실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한 직후 SK 와이번스 선수들이 트레이 힐만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사진제공=SSG 랜더스
▲ 2018년 11월12일 잠실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한 직후 SK 와이번스 선수들이 트레이 힐만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사진제공=SSG 랜더스

짧지만 강렬했던 2년이었다. 계약 기간을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간 힐만에겐 인천시 명예시민증이 주어졌다. 그는 당시 “인천 팬들과의 경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고 했다. 박정권은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인내력을 보인 모습이 가을야구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

▲ 2018년 11월15일 트레이 힐만 감독이 이임식에서 선수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SSG 랜더스
▲ 2018년 11월15일 트레이 힐만 감독이 이임식에서 선수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SSG 랜더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오랫동안 야구한 인천에서 인정받고 싶다”

[김원형 SSG 랜더스 감독 인터뷰]

2007~2008년 우승 이끈 '왕조의 주장'
시즌 내내 선두 “투타 조화 선수 자신감”
“가을야구서 '관중수 1위' 성원 보답해야”

▲ 김원형 SSG 랜더스 감독.

김원형(50·사진) SSG 랜더스 감독은 야구 인생의 반을 인천에서 보냈다. 프로 통산 134승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66승도 SK 와이번스에서 기록했다. 올스타전 휴식기였던 지난달 19일 인천SSG랜더스필드에서 만난 그는 “정정당당하게 이기는 야구가 제일 재밌는 야구라고 생각한다”며 “인천에서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다. SSG 랜더스는 후반기 들어서도 7할에 육박하는 승률로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 관중 수도 10개 구단 가운데 가장 많다. 구도는 김원형 감독이 주장이었던 그때를 떠올리고 있다.

 

▲개막 10연승을 시작으로 전반기 내내 1위를 달렸다. 지난해와 올해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자, 어려운 질문이다. 우선 달라진 건 선발진이다. 김광현·폰트를 중심으로 투수들이 완벽하게 자기 역할을 소화해준다. 마운드가 안정되니까 좋은 경기력이 나온다. 야수들도 초반에 점수를 못 내도 경기 후반 활발한 공격력으로 승리를 가져온다. 이런 모습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면서 선수들에게 자신감이 생겼다.

 

▲SSG 랜더스 감독을 맡은 지 2년째다.

-때로는 부드럽고, 또 냉철하고, 그러면서 따뜻하게 다가가려고 한다. 선수들에게 바라는 점은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해야 한다'는 거다. 나이를 먹으면 신체 기능이 떨어지니까 기량을 유지하는 데 자기관리가 중요하다. 사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감독에 대해 잘 몰랐다. 경기에만 집중해서 시야가 좁았다. 팬들이 감독을 주목한다는 것도 몰랐다. 지금은 표정 관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웃음)

 

▲SK 와이번스 창단 멤버였고,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2007년부터 2년간 주장을 맡았다.

-개인적으로는 힘든 시기였다. 주장이었지만 기량은 떨어진 상태였다. 흔히 말하는 패전 처리 투수로 나설 때는 자존심도 상했다. 책임감 때문에 인내하는 자세도 생겼다. 그래도 박경완·박재홍·김재현·이호준·조웅천 등 베테랑들이 도와주니까 선수단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이름만 들어도 엄청난 선수들 아닌가. 한국시리즈에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는데 서운하지 않았다. 우승만으로도 기뻤다.

 

▲ 김원형 SSG 랜더스 감독이 지난 7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 경기에서 승리한 뒤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제공=SSG 랜더스
▲ 김원형 SSG 랜더스 감독이 지난 7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 경기에서 승리한 뒤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제공=SSG 랜더스

▲전반기 성적이 좋아서 부담이 되진 않는지.

-선수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도 '어쨌든 전반기는 끝'이라고 얘기했다. 후반기 58경기가 중요하다. 지금 이 시간부터 준비해서 좋았던 흐름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

 

▲인천에서 20년 동안 선수·코치·감독을 경험했는데.

-가끔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지역색이 강하다. 그만큼 야구에 대한 깊이가 있고, 연고팀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 관심이 크니까 우리가 야구를 더 잘해야 한다. 인천에서 오랫동안 야구를 하면서 '여기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인천 야구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가을이 오고 있다.

-선수도, 구단도, 코칭스태프도 올해 하나의 목표를 갖고 시작했다. 2년 동안 코로나19 때문에 야구장에 관중이 없었다. 환호성도 잊고 있었다. 올해 개막전부터 팬들이 많이 오시니까 열기가 다시 느껴졌다. 팬들의 응원이 선두를 달린 원동력이었다. 최지훈·박성한·전의산 같은 젊은 선수들은 환호와 박수 소리를 처음 들으면서 야구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올해 더욱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본다. 관중 수 1위를 만들어주고 계신 팬들 성원에 보답해야 한다.

/글·사진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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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망이'는 인천 야구의 고민거리였다.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김경기(54)와 최정(35)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입단했다. 인천 야구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루수-'미스터 인천' 김경기1994년 인천 야구팬 눈길은 김경기가 쓴 헬멧으로 향했다. 팀타율 꼴찌 타선에서 그가 홈런을 칠 때마다 헬멧에는 하트 모양 스티커가 하나씩 늘었다. 그해 9월15일 플레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구원투수-조웅천' '포수-박경완' 태평양 돌핀스 돌풍과 현대 유니콘스 우승의 원동력은 '투수왕국'이었다. SK 와이번스는 '벌떼 마운드'로 왕조 시대를 열었다. 투수왕국과 벌떼 마운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20년간 '인천의 허리'로 마운드를 지탱한 조웅천(51)과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공수겸장' 박경완(50)이다. 구원투수-'인천의 허리' 조웅천1994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태평양 돌핀스는 이듬해 7위로 고꾸라졌다. 선발진이 무너질 때마다 중간계투로 나선 사이드암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우완선발-정민태' '좌완선발-김광현' 프로야구 40년은 별들의 역사였다. '슈퍼스타즈'가 쏘아 올린 공은 인천에도 수많은 별들의 발자취를 남겼다.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통틀어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를 뽑았다. 이른바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다. 12명의 올스타를 선정한 설문조사는 세대별로 추린 인천 야구인 40명을 대상으로 했다. 인천일보는 '구도 인천' 2회부터 4회까지 매주 4명씩 인천 그라운드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냈던 전설들을 소환한다. 인천 야구팬이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법한 '드림팀'이다. 그리고 & [구도 인천] 슈퍼스타 등장부터 랜더스까지…눈물·환희 뒤섞인 '굴곡의 세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2년 7월17일, 인천공설운동장(숭의종합운동장·도원구장)에서 프로야구 첫 경기가 열렸다. 그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야구장 보수 공사로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기리그 홈 경기를 춘천에서 치렀다. 인천시민 앞에 첫선을 보인 경기 상대는 서울 연고 MBC 청룡.결과는 4대 10으로 대패였다. 삼미 슈퍼스타즈 후기리그 성적은 0승6패가 됐다. '구도'라는 자부심을 가진 관중들에게 낯선 야구였다. 그때부터 인천 프로야구단에는 반복되는 꼴찌와 구단 매각이라는 비운이 계속됐다. 40년 세월은 야속 [구도 인천] 100년 전 웃터골의 열기, 100년 후 연안부두 함성으로 1982년 프로야구가 첫발을 내디뎠다. '삼미 슈퍼스타즈'로 출발한 인천 프로야구도 40년을 맞았다.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를 거쳐 'SSG 랜더스'에 이른 인천 연고팀은 유난히 부침을 겪었다. '왕조'의 시절도 누렸다. 인천사람들에게 프로야구는 눈물이자, 환희였다.인천은 일찍이 '야구도시'였다. 100여년 전 웃터골은 야구의 성지였고, '한용단'은 울분 [구도 인천] 웃터골에서 도원까지…인천야구 애환 품은 운동장 야구의 역사는 곧 운동장의 역사였다. 그라운드를 따라 이야기가 쌓였다. 인천 야구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웃터골과 인천야구장의 길은 엇갈렸다. 명맥이 끊겼던 웃터골에는 고교야구가 다시 숨을 불어넣었고, '구도 인천'을 일군 인천구장은 자취를 감췄다. 그라운드가 없으면 야구도 없었다. '100년 야구 역사의 발상지' 웃터골1921년 4월17일 인천 학생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한용단(漢勇團)'은 일본인 야구팀 '실업단'을 5대 1로 꺾었다. 같은 날 '미가도&# [구도 인천] 문학에서 랜필까지…인천팬 웃고 울린 ‘꿈의 극장’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 자락에 '꿈의 구장'이 터를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때는 2002년이었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는 축구를 비췄지만,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이라는 두 글자는 인천 야구와 동의어가 됐다. 또 다른 꿈의 구장은 '구도'의 기억도 소환했다. '꿈의 구장' 문학, '랜필'로 진화2002년 4월9일 인천 연고팀 역사상 한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이 세워졌다.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 경기에 입장한 관중 수는 2만7044명. [구도 인천] 구도의 영광 이끈 어린 영웅들, 인천야구 '주춧돌로 성장' 야구도시의 뿌리는 학생 야구였다.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용단’ 야구는 시대를 대변했다. 해방 이후 도시 대항 야구와 학생 야구가 전부였던 시절, 인천고와 동산고는 야구의 대명사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는 1950년대 인천을 떠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구도는 인천으로 통했고, 인천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고교야구 왕중왕' 인천고2005년 4월1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인천고와 부산고가 맞붙었다. '한국야구 100 [구도 인천] 구도의 미래 짊어진 새싹들, 마음껏 치고 던질 수 있어야 인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원 14명 가운데 졸업은 앞둔 6학년은 9명이다. 초등야구의 고민은 '선수 모집'이다. 정정호(38) 서화초 감독은 “리틀·유소년 야구단 출신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몰리니까 중학교 정원은 꽉 차는데, 초등 야구부는 대회 출전이 어려울 정도로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지난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지역 중학교로는 26년 만에 입상한 동인천중 야구부원은 42명이다. 중학야구의 고민은 '진학'이다. 송순석(40) 동인천중 감독은 “학년당 10명이 넘는데, 중학야구 팀은 클럽을 포함해 7 [구도 인천] 구도의 산증인들…채병용 코치·배수현 치어리더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