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끝나지 않는 이야기]
연장전-인천 야구와 함께한 사람들

구도의 산증인들, 청춘 바쳐 던지고 춤추다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

'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한 구단에 오랫동안 뿌리내린 이들을 '원클럽맨' 또는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칭한다. 인천 야구와 함께한 사람들은 원클럽맨, 그리고 프랜차이즈 스타로 대접받을 자격이 있다.

 


 

▲ 채병용
▲ 채병용 SSG 랜더스 2군 투수코치가 지난 14일 강화군 길상면 SSG퓨처스필드에서 인천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위기때 먼저 내 이름 떠올리길 바랐다”

['원클럽맨' 채병용 SSG 2군 코치]

19시즌간 마운드 전천후 활약 '왕조의 주역'
2009 KS 혼신투 … 7차전 끝내기홈런 불운
“던지는 순간 '끝났다' 느껴 … 지금도 생각나”
“은퇴 후 코치 변신 “배운다 생각으로 지도”

▲ 현역 시절이었던 2018년 9월25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채병용 코치의 투구 장면./사진제공=SSG 랜더스
▲ 현역 시절이었던 2018년 9월25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채병용 코치의 투구 장면./사진제공=SSG 랜더스

2007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선발로 나와 승리를 기록한 투수는 이듬해 한국시리즈 5차전 9회말에 등판했다. 점수는 2점 차. 1사 만루 위기에서 투수 앞 땅볼을 유도해 병살로 경기를 마무리한 투수는 마운드에 주저앉았다. SK 와이번스의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한 순간이었다.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마다 등판했던 채병용은 2007년과 2008년 2점대 평균자책점에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이런 성적을 올린 투수는 KBO 리그를 통틀어 채병용말고는 아무도 없다.

지난 14일 강화 SSG퓨처스필드에서 만난 채병용은 야구 인생을 돌아보며 “김성근 감독님을 만났던 그때가 전성기”라고 했다. “운동을 그렇게까지 많이 해본 적이 없었어요. 억울해서라도 10승을 해야 했죠. 선수들 모두 마찬가지였어요. 그렇게 똘똘 뭉쳐서 우승한 거죠.”

▲ 지난 2008년 10월31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의 우승을 확정짓고 마운드에서 환호하고 있는 채병용./사진제공=SSG 랜더스
▲ 지난 2008년 10월31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의 우승을 확정짓고 마운드에서 환호하고 있는 채병용./사진제공=SSG 랜더스

통산 84승 73패 22세이브 29홀드. 2001년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고 2019년까지 채병용이 인천에 바친 기록이다. 은퇴 이후에도 지난해 전력분석원, 올해 SSG 랜더스 2군 투수코치로 그는 20년 넘게 '원클럽맨' 경력을 이어가고 있다. 통산 성적과 한국시리즈 등판 기록이 보여주듯이 채병용은 선발·중간·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마운드에 올랐다. “제게 어울리는 보직이 '전천후'라고 생각했어요. 선발이 일찍 무너지거나 위기 상황에 몰렸을 때 누군가는 던져야 하잖아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채병용'이길 바랐어요.”

채병용이 잊지 못하는 한국시리즈는 20대 초반 나이로 에이스급 활약을 펼친 2003년도, 2년 연속 우승한 2007∼2008년도 아닌 2009년이다. 프로야구 40년 역사상 유일한 한국시리즈 7차전 끝내기 홈런이 나온 그 순간 채병용은 마운드에 있었다. 팔꿈치 수술을 앞뒀던 그는 주축 투수들이 이탈했던 그해 가을 야구에서 버팀목이었다. SK 와이번스가 2패로 몰렸던 플레이오프 3차전 선발로 나와 승리를 이끌었고, 최종 5차전에서도 선발로 나섰다. 한국시리즈에 오른 뒤에도 팀이 수세에 몰릴 때마다 등판해 4차전 선발승, 6차전 세이브를 기록했다.

▲ 채병용 SSG 랜더스 2군 투수코치가 지난해 10월3일 인천SSG랜더스필드에서 열린 은퇴식에 앞서 가족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SSG 랜더스
▲ 채병용 SSG 랜더스 2군 투수코치가 지난해 10월3일 인천SSG랜더스필드에서 열린 은퇴식에 앞서 가족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SSG 랜더스

7차전 동점 상황, 다시 그는 몸을 풀기 시작했다. 잠실구장 3루 관중들은 '채병용'을 연호했다. “그날 아침까지 팔이 굽어 있었어요. 함성 소리를 들으니까 뭉클해져서 마운드에 올랐죠. 마지막 공을 놓는 순간 끝났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른 구종을 선택했더라면, 내가 아프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조금만 덜 아팠더라면 하는 생각이 지금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요.”

팔꿈치 수술과 공익근무요원 복무로 그는 공백기를 보냈다. 그때마다 채병용을 일으킨 건 '다시 해보자'는 되뇌임이었다. 너클볼도 장착했다. “살아남기 위해서였어요. 구속이 떨어진 상태였고, 지금 가진 구종으로 타자를 상대했을 때 과연 제압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어요. 너클볼을 익히는 데 거의 2년이나 걸렸죠.”

채병용 손에는 이제 글러브와 공이 아닌, 수첩과 펜이 쥐어져 있다. “가르친다기보다는 배운다는 생각으로 코치 생활을 하고 있어요. 인천 야구 역사가 길잖아요.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후배들이 갈고닦으면 인천 야구가 더욱 발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연재 이후, 우완선발 부문 후보에서 채병용 SSG 랜더스 코치가 누락된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원클럽맨'으로 통산 1336이닝, 84승을 기록한 채병용 코치는 2008년 승률왕을 차지해 후보 선정 기준을 충족했으나, 수상 실적과 기록 집계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습니다. 채병용 코치와 SSG 랜더스 구단,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20년간 인천야구 지킨 '응원단상의 전설'

['프랜차이즈 치어리더' 배수현]

중구 신흥동 출신 … “아버지 덕 도원구장 익숙”
“선수들에게 좋은 기운 전달할 수 있어 행복해”
“인천야구는 내 청춘이 담긴 역사 … 뗄 수 없어”
“마음은 벌써 KS 준비 … 마지막까지 응원 부탁”

▲
▲ 배수현 SSG 랜더스 치어리더가 지난 20일 인천SSG랜더스필드 홈 경기를 앞두고 인천일보와 만나 랜더스 세리머니 손동작을 하면서 승리를 기원하고 있다.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응원단상은 그라운드와 관중석 사이에 있죠. 선수와 팬을 연결해주는 게 치어리더, 제 역할이에요.”

자신을 치어리더계 일명 '시조새'라고 칭하는 SSG랜더스 치어리더 배수현. 프로야구 40년 역사의 절반에 해당하는 20년간 인천 야구만 응원해 온 그는 단순한 치어리더가 아니다.

인천 중구 신흥동 출신으로 오직 인천 야구만을 현장에서 응원해 온 그는 인천을 위해 선수들과 같이 뛴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어린 시절,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버지 덕에 도원구장을 자주 찾았어요. 제게 야구장은 결코 낯설지 않은 곳이었죠. 치어리더가 되고 싶어 구단 홍보팀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면접을 보고 데뷔를 했는데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네요.”

야구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기억들은 그에게 오롯이 남아 있다. “관중들과 함께 힘차게 응원하며 선수들에게 좋은 기운을 전달해 줄 수 있다는 게 행복해요. 제게도 조금이나마 승리기여도 지분이 있다고 믿어요.”

▲ 배수현 SSG 랜더스 치어리더가 지난 5월1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단상에 올라 응원하고 있다./사진제공=SSG 랜더스

오랜 세월을 관중들과 수많은 경기를 응원해왔지만 배수현에게 잊을 수 없는 세 가지 장면이 있다. 2007년 SK 와이번스가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했을 때, 2018년 당시 넥센 히어로즈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 경기, SSG 랜더스 창단 첫 경기에서 최정 선수가 쏘아 올린 홈런이다. “어릴 때는 눈물이 많지 않았는데, 극적으로 이기거나 꼭 승리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통한 경기가 끝나면 눈물이 흘러요. 인천 야구는 제 청춘이 담긴 제 역사에요. 야구장에서 벌어지는 희로애락이 제 인생에 있다 보니 야구는 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됐죠.”

그는 최근 관중 수가 늘면서 인천 야구를 응원하는 분위기도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고 전한다. “옛날 야구는 단순히 어른들의 문화였지만 이제는 확 바뀌었어요. 추신수·최정·김광현 선수 등 스타 플레이어도 많아지고 다양한 이벤트가 벌어지면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죠. 인천 야구가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마흔 살이 된다며 은퇴를 고민 중이라는 그는 아직도 먼발치에서 야구장만 봐도 기운이 솟구친다. “벌써 한국시리즈를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시리즈를 경험하지 못한 지금 치어리더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기도 해요. 시즌 내내 좋은 성적을 내는 SSG 랜더스에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올해 마지막까지 인천 야구를 즐겨 주세요.”

▲ 배수현 SSG 랜더스 치어리더가 지난해 9월21일 키움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사진제공=SSG 랜더스
▲ 배수현 SSG 랜더스 치어리더가 지난해 9월21일 키움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사진제공=SSG 랜더스

/이은경·이아진 기자 lotto@incheonilbo.com



관련기사
[구도 인천] 구도의 미래 짊어진 새싹들, 마음껏 치고 던질 수 있어야 인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원 14명 가운데 졸업은 앞둔 6학년은 9명이다. 초등야구의 고민은 '선수 모집'이다. 정정호(38) 서화초 감독은 “리틀·유소년 야구단 출신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몰리니까 중학교 정원은 꽉 차는데, 초등 야구부는 대회 출전이 어려울 정도로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지난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지역 중학교로는 26년 만에 입상한 동인천중 야구부원은 42명이다. 중학야구의 고민은 '진학'이다. 송순석(40) 동인천중 감독은 “학년당 10명이 넘는데, 중학야구 팀은 클럽을 포함해 7 [구도 인천] 구도의 영광 이끈 어린 영웅들, 인천야구 '주춧돌로 성장' 야구도시의 뿌리는 학생 야구였다.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용단’ 야구는 시대를 대변했다. 해방 이후 도시 대항 야구와 학생 야구가 전부였던 시절, 인천고와 동산고는 야구의 대명사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는 1950년대 인천을 떠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구도는 인천으로 통했고, 인천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고교야구 왕중왕' 인천고2005년 4월1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인천고와 부산고가 맞붙었다. '한국야구 100 [구도 인천] 문학에서 랜필까지…인천팬 웃고 울린 ‘꿈의 극장’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 자락에 '꿈의 구장'이 터를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때는 2002년이었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는 축구를 비췄지만,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이라는 두 글자는 인천 야구와 동의어가 됐다. 또 다른 꿈의 구장은 '구도'의 기억도 소환했다. '꿈의 구장' 문학, '랜필'로 진화2002년 4월9일 인천 연고팀 역사상 한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이 세워졌다.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 경기에 입장한 관중 수는 2만7044명. [구도 인천] 웃터골에서 도원까지…인천야구 애환 품은 운동장 야구의 역사는 곧 운동장의 역사였다. 그라운드를 따라 이야기가 쌓였다. 인천 야구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웃터골과 인천야구장의 길은 엇갈렸다. 명맥이 끊겼던 웃터골에는 고교야구가 다시 숨을 불어넣었고, '구도 인천'을 일군 인천구장은 자취를 감췄다. 그라운드가 없으면 야구도 없었다. '100년 야구 역사의 발상지' 웃터골1921년 4월17일 인천 학생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한용단(漢勇團)'은 일본인 야구팀 '실업단'을 5대 1로 꺾었다. 같은 날 '미가도&# [구도 인천] 이기는 리더십, 우승의 조건…김성근·힐만·김원형 감독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연승과 연패를 거듭한다. 중요한 건 승패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선수단을 통솔하는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때도 바로 이 순간이다.22연승 신기록도 모자라 16연승을 내달린 팀이 있었다. 수염을 깎지 않은 감독의 징크스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 이면에는 “승리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여기며 안간힘을 쓴 집념이 있었다. 개막하자마자 6연패에 빠진 팀도 있었다. 야심차게 영입한 외국인 감독은 변함없이 운동장에 먼저 나와 ‘파이팅’을 외쳤다. 정답은 없었다. 두 [구도 인천] 근성과 감각, 명장의 조건…김진영·김재박 감독 감독과 대행 체제를 오가며 어수선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명장' 김진영(1935∼2020)의 존재였다.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그가 더그아웃에 앉아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성적으로 직결됐다. 명장이 떠나고 부침했던 사령탑은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남다른 감각을 지닌 김재박(68)의 등장으로 마침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감독을 맡은 그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의 오류도 증명했다. '인천 야구의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왕조의 탄생과 부활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응원가 '연안부두' 가사처럼 인천은 연고팀과 이별을 반복했다. 그래도 마음마다 설레게 하는 야구는 계속됐다. 오랜 기다림 끝에 환희의 순간도 마주했다. 가을의 이야기도 다시 시작됐다. 2000년 현대 연고지 이전2000년 3월16일 시범경기가 치러진 인천구장 분위기는 심상찮았다. 원정팀이 안타를 치면 환호가 터졌고, 현대 유니콘스에는 야유가 쏟아졌다. 그날 신문에는 현대 유니콘스는 서울, 신생 SK 야구단은 인천으로 연고지가 결정됐다는 기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만년 꼴찌, 한을 풀다 20세기 인천 프로야구는 영욕의 시간들을 보냈다. 드물었던 기쁨 뒤에는 어김없이 슬픔이 찾아왔다. 연패에서 탈출하자마자 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환호한 순간 끝내기 패배를 마주했다. 인천 야구의 한을 푼 한국시리즈 우승 끝에는 또 다른 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5년 18연패와 청보 등장장명부의 초인적 활약에 힘입어 1983년 우승 후보로 떠올랐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듬해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도깨비팀'이라는 별명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였다.도깨비팀은 1985년 시즌 개막과 동시에 [구도 인천] 돌핀스 돌풍의 주역…정명원·최창호·박정현·김동기 1989년 인천 연고팀이 처음 가을야구에 등장했다. 잠자고 있던 구도의 야성도 깨어났다.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도원구장)은 1만3000석이 일찌감치 매진됐고, 입장하지 못한 극성팬들이 철탑에 오르는 소동도 벌어졌다. 2000원짜리 입장권이 2만원에 팔린 암표는 기승을 부렸다.준플레이오프 3경기 선발투수는 박정현·최창호·정명원이 차례로 나섰다. 나란히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그해 태평양 돌핀스가 올린 62승 가운데 40승을 책임진 삼총사였다. 프로야구 최초로 포수 전 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김동기도 변함없이 마스크를 썼다. 돌풍은 멈출 [구도 인천] 슈퍼스타즈의 슈퍼스타…장명부·임호균·양승관 찰나의 환희와 기나긴 한숨이 이어진 3년 반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잠깐 반짝였고,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별빛이 명멸하는 동안 마운드에서 장명부는 초인적인 투구를 거듭했고, 임호균은 공 하나하나에 승부를 걸었다. 양승관의 방망이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쏘아올렸다. 그들이 그라운드에 나설 때면 슈퍼스타즈는 슈퍼스타즈일 수 있었다. '불멸의 기록' 장명부1985년 6월21일 인천구장은 4914명의 관중들로 채워졌다. 그해에도 어김없이 꼴찌에 머문 삼미 슈퍼스타즈 고별 경기였다. 마운드에 오른 장명부는 1회부터 8실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외야수-이진영' '지명타자-김기태' 2003년 정규리그를 4위로 마친 SK 와이번스는 처음 '가을야구'를 경험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2연승한 SK 와이번스는 플레이오프에서 기아 타이거즈와 맞붙었다. 3차전 이진영(42)의 2점 홈런에 이어 김기태(53)의 적시타가 터졌다. SK 와이번스를 신흥 명문 구단으로 도약시킨 좌타자들의 활약은 '인천 SK' 구호가 물결을 이룬 문학구장에서 한국시리즈의 첫 번째 페이지를 열었다. 외야수-'국민 우익수' 이진영2003년 10월19일 한국시리즈 3차전이 열린 문학구장은 3만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외야수-박재홍·김강민'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등장한 '괴물 신인' 박재홍(49)은 인천 연고팀은 물론, 프로야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 첫해 신인으로 지명한 김강민(40)은 공수주에서 꾸준한 기량을 과시하며 프로야구 최장 '원클럽맨'이 됐다. 두 선수가 한솥밥을 먹었던 시절, SK 와이번스는 '왕조'로 불렸다. 인천 야구장을 주름잡은 '괴물'과 '짐승'의 출현은 프로야구 판도마저 뒤흔들었다. 외야수-'호타준족' 박재홍1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2루수-정근우' '유격수-박진만' 2008년 여름 박진만(46)과 정근우(40)는 태극마크를 품에 안고 짐을 꾸렸다. 출발지는 달랐지만 목적지는 같았다. 결말은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이었다.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는 2011년 시즌부터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함께 입었다. 역대 최강 내야 수비진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2루수-'악마 2루수' 정근우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 캐나다와의 경기에 정근우가 2루수로 나섰다. 앞서 미국과의 경기에선 9회말 대타로 나와 2루타를 때렸고, 득점까지 기록하며 역전승의 디딤돌을 놨다. 캐나다전 1회부터 안타와 도루를 기록한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1루수-김경기' '3루수-최정' '짠물야구'는 점수를 적게 주는 투수진만을 가리키는 표현은 아니었다. '물방망이'는 인천 야구의 고민거리였다.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김경기(54)와 최정(35)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입단했다. 인천 야구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루수-'미스터 인천' 김경기1994년 인천 야구팬 눈길은 김경기가 쓴 헬멧으로 향했다. 팀타율 꼴찌 타선에서 그가 홈런을 칠 때마다 헬멧에는 하트 모양 스티커가 하나씩 늘었다. 그해 9월15일 플레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구원투수-조웅천' '포수-박경완' 태평양 돌핀스 돌풍과 현대 유니콘스 우승의 원동력은 '투수왕국'이었다. SK 와이번스는 '벌떼 마운드'로 왕조 시대를 열었다. 투수왕국과 벌떼 마운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20년간 '인천의 허리'로 마운드를 지탱한 조웅천(51)과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공수겸장' 박경완(50)이다. 구원투수-'인천의 허리' 조웅천1994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태평양 돌핀스는 이듬해 7위로 고꾸라졌다. 선발진이 무너질 때마다 중간계투로 나선 사이드암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우완선발-정민태' '좌완선발-김광현' 프로야구 40년은 별들의 역사였다. '슈퍼스타즈'가 쏘아 올린 공은 인천에도 수많은 별들의 발자취를 남겼다.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통틀어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를 뽑았다. 이른바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다. 12명의 올스타를 선정한 설문조사는 세대별로 추린 인천 야구인 40명을 대상으로 했다. 인천일보는 '구도 인천' 2회부터 4회까지 매주 4명씩 인천 그라운드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냈던 전설들을 소환한다. 인천 야구팬이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법한 '드림팀'이다. 그리고 & [구도 인천] 슈퍼스타 등장부터 랜더스까지…눈물·환희 뒤섞인 '굴곡의 세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2년 7월17일, 인천공설운동장(숭의종합운동장·도원구장)에서 프로야구 첫 경기가 열렸다. 그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야구장 보수 공사로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기리그 홈 경기를 춘천에서 치렀다. 인천시민 앞에 첫선을 보인 경기 상대는 서울 연고 MBC 청룡.결과는 4대 10으로 대패였다. 삼미 슈퍼스타즈 후기리그 성적은 0승6패가 됐다. '구도'라는 자부심을 가진 관중들에게 낯선 야구였다. 그때부터 인천 프로야구단에는 반복되는 꼴찌와 구단 매각이라는 비운이 계속됐다. 40년 세월은 야속 [구도 인천] 100년 전 웃터골의 열기, 100년 후 연안부두 함성으로 1982년 프로야구가 첫발을 내디뎠다. '삼미 슈퍼스타즈'로 출발한 인천 프로야구도 40년을 맞았다.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를 거쳐 'SSG 랜더스'에 이른 인천 연고팀은 유난히 부침을 겪었다. '왕조'의 시절도 누렸다. 인천사람들에게 프로야구는 눈물이자, 환희였다.인천은 일찍이 '야구도시'였다. 100여년 전 웃터골은 야구의 성지였고, '한용단'은 울분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