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학생 주축 '한용단' 결성
명맥 이은 '고려야구단' 일본팀 격파
일제강점기 야구는 '항일'과 동의어
광복 이후 최초 올스타팀 '전인천군'
1950년대 내내 전국무대 제패 위용
인천군 키즈 양산 '구도의 시대' 도래
1955년 이기상 vs 신인식 명투수전
인천고 vs 동산고 라이벌 구도 각인
최관수·임호균·최계훈 역사 뒤이어
1982년 프로야구가 첫발을 내디뎠다. '삼미 슈퍼스타즈'로 출발한 인천 프로야구도 40년을 맞았다.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를 거쳐 'SSG 랜더스'에 이른 인천 연고팀은 유난히 부침을 겪었다. '왕조'의 시절도 누렸다. 인천사람들에게 프로야구는 눈물이자, 환희였다.
인천은 일찍이 '야구도시'였다. 100여년 전 웃터골은 야구의 성지였고, '한용단'은 울분을 풀어준 존재였다. 해방 직후 '전인천군'은 전국을 제패했다. 인천고·동산고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구도'라는 별칭도 얻었다.
인천일보는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구도 인천(球都 仁川)' 기획 기사를 연재한다. 매주 한 차례씩, 총 9회에 걸쳐 인천 야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다. 구도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야구는 인천이었고, 인천은 야구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2년 5월21일, 제물포고 자리인 '웃터골' 공설운동장에서 전인천야구대회가 열렸다. 10개 팀이 맞붙었던 대회에서 인천 학생들이 결성한 '한용단(漢勇團)'은 결승에 올랐다. 경기 상대는 일본인 야구팀이었던 '동지회(同志會)'.
한용단이 6대 5로 앞선 상황에서 9회말 2사 3루 상황을 맞았다. 볼 카운트는 3볼 2스트라이크. 한용단 투수는 최후의 1구를 던졌다. '인천 야구 한 세기'(2005)는 그 직후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가 포볼로 번복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이에 격분한 관중들은 장내로 뛰어 들어가 심판에게 거세게 항의하자 심판은 생명에 위협을 느껴 줄행랑을 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갔다.”
▲웃터골의 용감한 사람들
경찰 출동에도 항의 구호를 외치던 수천 명 관중은 밤이 깊어서야 자진 해산했다. 웃터골에선 야구대회가 잇따라 열렸고, 구름 관중이 몰려 들었다. 신태범(1912∼2001)은 '인천 한 세기'(1996)에서 “어렸을 때 웃터골에서 애를 태워 가면서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던 한용단의 믿음직한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한용단이 나온다는 소문만 돌면 철시를 하다시피 온 시내를 비워 놓고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열병에 들뜬 것처럼 웃터골로 모여들었다”고 떠올렸다.
한용단은 3·1운동 열기가 남아 있던 1920년 무렵 만들어졌다. 경인선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학생들이 주축이었다. 개항장 인천에선 야구가 새로운 스포츠로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야구사'(1932)는 1914년 추계경인야구대회의 “참가팀은 철도구락부, 인천, 동양협회, 조선은행, 오성이었다”고 기록했다. 인천상업(인천고의 전신)도 이듬해 경룡추계야구대회에 출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고백년사'(1995)를 보면, 1899년 일본인 학생이 “베이스볼이라는 서양식 공치기를 하고 5시경에 돌아와 목욕탕에 갔다”고 쓴 일기도 남아 있다.
전조선야구대회에도 참가했던 한용단은 해체 운명을 맞았고, '고려' 야구단이 명맥을 이었다. 고려 야구단은 1926년 웃터골에서 열린 인천체육회 주최 전인천야구대회 우승을 비롯해 1928년부터 3년 연속 정상에 올랐다. 동아일보는 1926년 9월28일자에서 “인천에 야구대회가 시작한 이래 일본인팀과 조선인팀의 우승을 다투기를 십수년”이었다며 “이번 고려군의 우승은 인천 조선인 운동계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더라”고 전했다.
일제강점기 인천에서 야구는 항일과 동의어였다. 고일(1903∼1975)은 1955년에 쓴 '인천석금'에서 웃터골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웃터골이 유명해진 것은 한일 대결 야구 경기 때문이었다. 손에 땀을 쥐고 경기에 열광하고 있는 관중들은 일본인 심판의 공정치 못한 판정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쟁취했을 때는 성난 파도와 같이 너나없이 흥분해 무서운 함성과 더불어 돌격하듯 환호했다. 운동 경기의 승부 때문에 빚어진 이 같은 항일 투쟁은 마침내 일본 경찰과의 충돌을 불렀고, 관중들은 검거되거나 해산당했다.”
▲인천 야구 올스타 '전인천군'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를 졸업하고 일본 프로야구팀 한큐 브레이브스(현 오릭스 버펄로스)에서 뛰던 유완식(1919∼2009)은 1945년 여름 인천에 머무르고 있었다. 프로야구는 전쟁으로 멈췄고,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한 상태였다. 광복은 그에게도, 인천 야구에도 일대 전환점이었다.
유완식을 중심으로 인천 야구 올스타팀인 '전인천군(全仁川軍)'이 꾸려졌다. 전인천군에는 인천상업 소속으로 일본 '고시엔' 본선 무대에 올랐던 김선웅, 일본 프로야구 입단 제의를 받았던 연희전문학교 투수 박현덕도 있었다.
인천에 주둔한 미군과의 연습 경기로 조직력을 다진 전인천군은 1947년부터 전성기를 맞는다. 그해 5월 '4도시 대항 리그전', 7월 '전국지구대표야구쟁패전'에서 우승했고, 이어 8월 '제2회 전국도시대항야구대회' 결승에서도 부산을 2대 1로 꺾으며 정상에 올랐다.
전인천군은 1950년대 내내 도시대항야구대회에서 전국 무대를 평정했다. 그들의 야구를 보며 '전인천군 키즈'들도 자라나고 있었다. 바야흐로 구도의 시대였다.
▲구도 역사를 써내려간 투수들
1955년 6월5일 관객들로 초만원을 이룬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제10회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이 시작됐다. 3연속 우승을 노린 인천고 마운드에는 훗날 인천시의회 초대 의장을 지낸 이기상이 올랐고, 라이벌 동산고 투수로는 1학년생 신인식이 나섰다.
좌완 이기상의 변화구와 신예 신인식의 강속구가 맞붙은 경기는 9회말까지 1대 1로 팽팽한 투수전이었다. 승부의 추는 연장 12회말 2사에 이르러서야 폭투로 끝내기 점수를 뽑은 동산고로 기울었다. 인천고의 청룡기 3연패를 저지한 동산고는 이듬해 중앙고와의 결승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신인식을 앞세워 청룡기 3연패를 차지했다. 1950년대 중반 희비가 엇갈린 명승부는 인천 야구의 맞수였던 두 학교가 전국구 라이벌로 각인된 경기였다.
해방 이후 먼저 주목받은 학교는 동산이었다. 에이스 박현식이 활약한 동산고는 1946년 제1회 청룡기, 1947년 제1회 황금사자기 4강에 오르며 두각을 나타냈다. 전쟁이 끝나면서 1953년 재개된 고교야구에선 인천고가 최강자로 군림했다. 그해 서동준의 완투로 청룡기 우승을 차지한 인천고는 이듬해 청룡기와 황금사자기를 모두 거머쥐었다.
이들 라이벌은 1960년대 최관수(동산고), 1970년대 임호균·최계훈(인천고) 등 걸출한 투수들을 배출하며 구도 역사를 이었다. 1983년부터 모교인 동산고 감독을 맡아 '제2의 전성기'를 열었던 김학용(70)은 “두 학교가 전국 무대에서 우승하며 영광의 세월을 공유했다. 인천 야구인으로서 '구도 인천'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사진제공=인천일보 필름 자료·'인천야구 한 세기'
'공의 도시' 인천, 그 중심에 김선웅·박현덕
구도(球都). 말 그대로 '공의 도시'를 일컫는 단어다. 공은 야구공만을 가리키진 않았다. 일제강점기 신문에는 '구도'라는 표현이 종종 나오는데, 축구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서 '구도 평양'으로 자주 등장한다.
전국 단위로 발행한 신문들의 야구 기사에서 구도는 '전국지구대표 고등학교 야구쟁패전'(황금사자기) 개최를 알린 동아일보 1958년 10월9일자부터 등장한다. 해방 이후 지명 앞에 '구도' 수식어가 붙은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신문은 “구도 인천은 성인야구나 학도야구나 그 열렬한 불을 뿜는 듯한 투지는 자타가 공인하는 바로, 왕년 고등학교 대회에서 3년 연승한 실적으로 보아 결코 경시 못할 동산고와 인고는 야심만만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구도로 자리매김한 '인천야구 전성시대'는 해방 이후 전국 최강으로 떠오른 '전인천군', 맞수였던 인천고와 동산고에서 비롯했다. 그리고 전인천군과 고교야구를 아우르는 이름이 있다. 바로 김선웅(1919~1978)과 박현덕(1919~1993)이다.
김선웅은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에 다니던 1936년 일본 고교야구대회에 참가해 한국인 최초로 '고시엔' 그라운드를 밟았다. 전인천군 선수로도 뛰었고, 1946년 재창단한 인천고 야구부를 25년간 이끌며 황금기를 열었다.
연희전문에서 투수로 활약했던 박현덕도 전인천군 멤버였다. 박현덕은 1945년 창단한 동산고 야구부 감독을 맡아 1970년대까지 동산 야구를 꽃피웠다. 박현덕의 형은 1938년 오사카 타이거즈에 입단한 한국인 최초 프로야구 선수 박현명이고, 동생은 삼미 슈퍼스타즈 초대 감독인 박현식이다.
김선웅과 박현덕은 2005년 한국야구위원회(KBO)·대한야구협회가 선정한 '야구 100주년 공로상' 수상자 10인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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