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야구장 이상 의미' 웃터골
1920년대 준공 전국 최초 공설운동장
현재 해당 부지 제물포고 야구부 사용
삼미·태평양 돌풍 진원지 강한 인상
관중 열기 지나쳐 종종 난동 일어나
인천구장·도원구장 등 이름도 다양
야구의 역사는 곧 운동장의 역사였다. 그라운드를 따라 이야기가 쌓였다. 인천 야구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웃터골과 인천야구장의 길은 엇갈렸다. 명맥이 끊겼던 웃터골에는 고교야구가 다시 숨을 불어넣었고, '구도 인천'을 일군 인천구장은 자취를 감췄다. 그라운드가 없으면 야구도 없었다.
'100년 야구 역사의 발상지' 웃터골
1921년 4월17일 인천 학생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한용단(漢勇團)'은 일본인 야구팀 '실업단'을 5대 1로 꺾었다. 같은 날 '미가도'와의 경기에서도 9대 6으로 승리했다. 한용단이 연전연승한 한일전 무대는 공설운동장, 지금의 제물포고 자리인 '웃터골'이었다. 고일(1903∼1975)은 1955년에 펴낸 책 '인천석금'에 “시합이 펼쳐지면 흰옷을 입은 남녀노소의 모습이 장관을 이루며 웃터골 주위에 진을 쳤다. 야구대회가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시민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며 “오늘날의 인천 야구를 전국적으로 과시할 수 있었던 근원”이라고 썼다.
웃터골은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아래 분지를 일컫는 지명이었다. 산기슭을 따라 늘어선 소나무 숲과 평평한 땅은 자연이 선물한 관중석과 그라운드였다. 동아일보 1920년 9월19일자는 “공설운동장은 관측소(현 인천기상대) 아래 있으나 불완전한 감이 있다”며 “확장 공사에 착수해 멀어도 10월 말일 내로는 준공할 터”라고 전했다. 전국 최초 공설운동장으로, 당시 공사 면적은 2300여평이었다.
일제강점기 웃터골은 야구장 그 이상의 야구장이었다. 신태범(1912∼2001)은 '인천 한 세기'(1996)에서 “한용단이 유명했던 것은 야구를 잘한다고만 해서가 아니었다. 그간 쌓이고 쌓였던 일본인에 대한 원한과 울분을 한때나마 야구 경기를 통해서 발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공공연하게 일본인과 맞붙어 싸울 수 있고, 마음놓고 응원할 수 있는 기회란 이것밖에는 없었던 것”이라고 떠올렸다.
'한용단' 계보를 이은 '고려' 야구단이 일본 야구팀들을 누르고 인천야구대회를 제패한 1920년대 후반 웃터골은 3배 규모로 커졌다. 조선일보는 1927년 7월6일자 1면에 “작년 9월부터 확장 공사한 인천공설운동장은 총 1만4000여원을 들여 6월 말일로 준공된 바 장내 설비는 보는 사람으로 놀랄 만치 정돈”됐다고 했다.
인천 야구의 요람이었던 웃터골은 인천부립중학교(현 제물포고)가 지어지면서 도산정, 지금의 도원동으로 공설운동장 지위를 넘긴다. 동아일보는 1936년 8월1일자에서 “4만원의 거액을 들여 공사 중이던 인천 도산정 공설운동장은 과반 준공돼 지난 26일 개장 운동회를 개최”했다고 전했다. 공설운동장에는 육상경기장과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구장이 들어섰다. 해방 이후 '구도 인천' 시대를 열고, 훗날 숭의야구장·도원구장으로 불리며 야구팬 애환이 스며든 공간이다. 공설운동장 시대는 일찌감치 마감했지만, 웃터골에선 오늘도 제물포고 야구부가 땀을 흘리며 100년 넘게 야구를 이어오고 있다.
'구도와 전사들' 도원 혹은 숭의
1989년 10월17일 태평양 돌핀스와 해태 타이거즈의 플레이오프 3차전은 관중 소란으로 잇따라 경기가 중단됐다. 관중석에선 빈병과 돌이 그라운드로 날아들었다. 2차전 오심 논란에 더해 상대 투수 선동열이 8타자 연속 삼진을 잡은 영향도 있었지만, 이날 관중들이 흥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앞서 태평양 돌핀스는 3차전 홈 경기를 수원구장에서 치른다고 발표했다. 분노한 관중들의 소란을 우려한 조처였다. 결과적으로 인천에서 경기가 열렸으니 화만 돋운 셈이었다.
1990년대까지도 '관중 난동'은 심심찮게 신문 지면을 장식했지만, 인천구장은 한 수 위였다. 투척은 유니폼을 가리지 않았다. 연패에 항의하는 농성과 경찰 대치도 다반사였다. 패색이 짙어지면 웃통을 벗고 그물망을 오르는 관중도 나왔다. '전사'와 '타잔'이 공존하는 야구장이었다.
인천구장은 1만2500석 규모였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슈퍼스타다운 활약을 보인 1983년(6649명) 이후 연간 평균 관중이 절반 넘게 들어찬 때는 태평양 돌핀스가 돌풍을 일으킨 1989년(6992명)이었다. 중계가 드물었던 시절, 매진에 발길을 돌리기 아쉬웠던 시민은 광성고 언덕으로 올라가 먼발치에서나마 선수들의 움직임과 전광판을 눈에 담았다.
암표상이 등장한 그해 호루라기를 입에 문 비공식 응원단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 캐릭터와 닮아 '쿠웨이트 박(본명 김영식·가운데 사진)'이라고 불린 남자는 40대 중반 회사원이었다. 응원이라고 해봤자 3·3·7 박수를 유도하며 선수 이름을 연호하는 정도였지만 관중들은 그의 손짓에 흥겨워했고, 야구장에 오면 그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1990년대 들어 치어리더가 응원단상에 오르기 전까지 쿠웨이트 박과 그 뒤를 이은 '고릴라 아저씨'는 인천구장에서 연예인과도 같았다.
인천구장의 상징은 '철벽 담장'이었다. 펜스까지 거리가 중앙 110m, 좌우 91m에 불과했던 야구장에는 홈런을 막는 철조망이 세워졌다. 4m 안팎이었던 높이는 태평양 돌핀스 지휘봉을 잡은 김성근 감독이 취임하면서 7m까지 올라갔다. '투수왕국'을 지킨 철망이었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김재박 감독은 철망을 잘라냈고, 그해 인천 연고팀 사상 최초로 팀 홈런 1위(106개)를 기록했다.
입구 주변으로 노점이 진을 쳤던 야구장 안에선 관중석과 그라운드 사이 그물망 아래 간이 매점이 자리했다. 좌판이나 마찬가지였던 그곳에서 풍기는 컵라면과 마른오징어 냄새는 선수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태평양 돌핀스 투수였던 김홍집은 “경기 전에 몸을 풀 때면 정명원 형이 오징어를 몰래 얻어왔다. 주머니에 숨겨서 한 조각씩 입에 물고 뛰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인천구장'이었다. 공설운동장 명칭이 '숭의종합경기장'으로 바뀌면서 '숭의야구장'이라고 불렸고, 도원역과 가까워 '도원구장'으로도 일컬어졌다. SK 와이번스 창단까지 함께했던 야구장은 2001년을 끝으로 문학에 홈 구장 자리를 내준다. 공식 경기는 2008년 9월5일 '제6회 남구청장기 초중 야구대회'가 마지막이었다. 같은 해 6월 먼저 철거된 주경기장 뒤를 따라 야구장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축구전용경기장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였던 임호균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야구장을 없애버렸다. 자주 바뀐 연고팀처럼 인천 야구도 떠돌이 신세가 됐다”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연극이 끝나고 난 후…아마야구는 변방으로
독립야구단 '인천 웨이브스'는 2019년 창단 이후 연수구 송도LNG야구장에서 시합하고, 인근 흙 구장에서 연습해왔다. 가장 큰 문제는 접근성이었다. 신항을 지나 육로 끄트머리에 있는 야구장은 대중교통으로 닿을 수 없다. 지병호(50) 감독은 “독립구단 여건상 선수단 버스가 없어서 카풀로 움직이는 형편”이라며 “전용구장을 확보하지 못해 운동장 이용 시간만큼 돈을 내는데 차량도, 식사도 해결하기가 어려우니까 훈련량도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10년 3월 준공된 송도LNG야구장은 인천 '시립' 야구장이다. 인천시는 2008년 옛 인천구장(숭의야구장·도원구장)을 철거하면서 대체 시설로 송도LNG 종합스포츠타운에 인조잔디구장과 보조구장을 만들었다. 한때 SK 와이번스가 2군 경기장으로 사용했고, 지금도 고교야구 주말리그가 벌어진다.
인천에 시립 야구장은 인천SSG랜더스필드(문학구장)와 송도LNG야구장뿐이다. 아마야구는 송도LNG야구장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인천시 자료를 보면 인천에 정식 야구장은 9개(총 17면)가 있지만, 사회인 야구를 소화하기에도 버겁다. 이마저도 15개인 부산에 견주면 부족한 숫자다.
접근성 문제는 인천 웨이브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통의 라이벌' 인천고와 동산고, 그리고 제물포고가 맞붙을 때마다 응원전이 벌어졌던 인천구장이 문을 닫으면서 고교야구도 관심에서 멀어졌다. LNG(액화천연가스) 생산기지와 송도자원환경센터로 둘러싸인 그라운드에는 더 이상 함성이 들리지 않는다. 김학용 전 동산고 감독은 “지금은 고교야구를 어디서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인프라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탁상공론만 하니까 야구 발전도 기대하기가 어려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변방으로 밀려난 아마야구 입지도 불안하다. 시는 2016년 송도LNG야구장 부지를 인천도시공사에 매각하며 대체 야구장 신설 계획을 마련했지만 깜깜무소식이다. 시 체육진흥과 관계자는 “대체 야구장 조성 논의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며 “국민체육진흥기금 사업에 선정돼 내년 송도LNG야구장을 개보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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