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불타는 그라운드]
8회초-웃터골에서 도원까지

일제강점기 '야구장 이상 의미' 웃터골
1920년대 준공 전국 최초 공설운동장
현재 해당 부지 제물포고 야구부 사용

삼미·태평양 돌풍 진원지 강한 인상
관중 열기 지나쳐 종종 난동 일어나
인천구장·도원구장 등 이름도 다양

야구의 역사는 곧 운동장의 역사였다. 그라운드를 따라 이야기가 쌓였다. 인천 야구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웃터골과 인천야구장의 길은 엇갈렸다. 명맥이 끊겼던 웃터골에는 고교야구가 다시 숨을 불어넣었고, '구도 인천'을 일군 인천구장은 자취를 감췄다. 그라운드가 없으면 야구도 없었다.

 

▲ 1932년 웃터골 공설운동장 전경. /사진제공=인천시
▲ 1932년 웃터골 공설운동장 전경. /사진제공=인천시

 

'100년 야구 역사의 발상지' 웃터골

1921년 4월17일 인천 학생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한용단(漢勇團)'은 일본인 야구팀 '실업단'을 5대 1로 꺾었다. 같은 날 '미가도'와의 경기에서도 9대 6으로 승리했다. 한용단이 연전연승한 한일전 무대는 공설운동장, 지금의 제물포고 자리인 '웃터골'이었다. 고일(1903∼1975)은 1955년에 펴낸 책 '인천석금'에 “시합이 펼쳐지면 흰옷을 입은 남녀노소의 모습이 장관을 이루며 웃터골 주위에 진을 쳤다. 야구대회가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시민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며 “오늘날의 인천 야구를 전국적으로 과시할 수 있었던 근원”이라고 썼다.

▲공설운동장이 만들어지기 전인 1907년 웃터골과 인천관측소 모습. /사진제공=화도진도서관
▲공설운동장이 만들어지기 전인 1907년 웃터골과 인천관측소 모습. /사진제공=화도진도서관

웃터골은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아래 분지를 일컫는 지명이었다. 산기슭을 따라 늘어선 소나무 숲과 평평한 땅은 자연이 선물한 관중석과 그라운드였다. 동아일보 1920년 9월19일자는 “공설운동장은 관측소(현 인천기상대) 아래 있으나 불완전한 감이 있다”며 “확장 공사에 착수해 멀어도 10월 말일 내로는 준공할 터”라고 전했다. 전국 최초 공설운동장으로, 당시 공사 면적은 2300여평이었다.

일제강점기 웃터골은 야구장 그 이상의 야구장이었다. 신태범(1912∼2001)은 '인천 한 세기'(1996)에서 “한용단이 유명했던 것은 야구를 잘한다고만 해서가 아니었다. 그간 쌓이고 쌓였던 일본인에 대한 원한과 울분을 한때나마 야구 경기를 통해서 발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공공연하게 일본인과 맞붙어 싸울 수 있고, 마음놓고 응원할 수 있는 기회란 이것밖에는 없었던 것”이라고 떠올렸다.

'한용단' 계보를 이은 '고려' 야구단이 일본 야구팀들을 누르고 인천야구대회를 제패한 1920년대 후반 웃터골은 3배 규모로 커졌다. 조선일보는 1927년 7월6일자 1면에 “작년 9월부터 확장 공사한 인천공설운동장은 총 1만4000여원을 들여 6월 말일로 준공된 바 장내 설비는 보는 사람으로 놀랄 만치 정돈”됐다고 했다.

▲ 웃터골 공설운동장 자리에서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제물포고 야구부 선수들은 야구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 웃터골 공설운동장 자리에서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제물포고 야구부 선수들은 야구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야구의 요람이었던 웃터골은 인천부립중학교(현 제물포고)가 지어지면서 도산정, 지금의 도원동으로 공설운동장 지위를 넘긴다. 동아일보는 1936년 8월1일자에서 “4만원의 거액을 들여 공사 중이던 인천 도산정 공설운동장은 과반 준공돼 지난 26일 개장 운동회를 개최”했다고 전했다. 공설운동장에는 육상경기장과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구장이 들어섰다. 해방 이후 '구도 인천' 시대를 열고, 훗날 숭의야구장·도원구장으로 불리며 야구팬 애환이 스며든 공간이다. 공설운동장 시대는 일찌감치 마감했지만, 웃터골에선 오늘도 제물포고 야구부가 땀을 흘리며 100년 넘게 야구를 이어오고 있다.

 

▲ 삼미 슈퍼스타즈 홈 구장으로 사용되던 1983년 8월 옛 인천구장 전경. /인천일보 필름 자료
▲ 삼미 슈퍼스타즈 홈 구장으로 사용되던 1983년 8월 옛 인천구장 전경. /인천일보 필름 자료

 

'구도와 전사들' 도원 혹은 숭의

1989년 10월17일 태평양 돌핀스와 해태 타이거즈의 플레이오프 3차전은 관중 소란으로 잇따라 경기가 중단됐다. 관중석에선 빈병과 돌이 그라운드로 날아들었다. 2차전 오심 논란에 더해 상대 투수 선동열이 8타자 연속 삼진을 잡은 영향도 있었지만, 이날 관중들이 흥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앞서 태평양 돌핀스는 3차전 홈 경기를 수원구장에서 치른다고 발표했다. 분노한 관중들의 소란을 우려한 조처였다. 결과적으로 인천에서 경기가 열렸으니 화만 돋운 셈이었다.

▲ 태평양 돌핀스가 창단했던 1988년 옛 인천구장 외야. 높은 철망과 듬성듬성 심어진 잔디가 보인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 태평양 돌핀스가 창단했던 1988년 옛 인천구장 외야. 높은 철망과 듬성듬성 심어진 잔디가 보인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1990년대까지도 '관중 난동'은 심심찮게 신문 지면을 장식했지만, 인천구장은 한 수 위였다. 투척은 유니폼을 가리지 않았다. 연패에 항의하는 농성과 경찰 대치도 다반사였다. 패색이 짙어지면 웃통을 벗고 그물망을 오르는 관중도 나왔다. '전사'와 '타잔'이 공존하는 야구장이었다.

인천구장은 1만2500석 규모였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슈퍼스타다운 활약을 보인 1983년(6649명) 이후 연간 평균 관중이 절반 넘게 들어찬 때는 태평양 돌핀스가 돌풍을 일으킨 1989년(6992명)이었다. 중계가 드물었던 시절, 매진에 발길을 돌리기 아쉬웠던 시민은 광성고 언덕으로 올라가 먼발치에서나마 선수들의 움직임과 전광판을 눈에 담았다.

▲ 1989년 8월 비공식 응원단장으로 인기를 끌었던 '쿠웨이트 박'을 보며 관중들이 즐거워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89년 8월 비공식 응원단장으로 인기를 끌었던 '쿠웨이트 박'을 보며 관중들이 즐거워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암표상이 등장한 그해 호루라기를 입에 문 비공식 응원단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 캐릭터와 닮아 '쿠웨이트 박(본명 김영식·가운데 사진)'이라고 불린 남자는 40대 중반 회사원이었다. 응원이라고 해봤자 3·3·7 박수를 유도하며 선수 이름을 연호하는 정도였지만 관중들은 그의 손짓에 흥겨워했고, 야구장에 오면 그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1990년대 들어 치어리더가 응원단상에 오르기 전까지 쿠웨이트 박과 그 뒤를 이은 '고릴라 아저씨'는 인천구장에서 연예인과도 같았다.

인천구장의 상징은 '철벽 담장'이었다. 펜스까지 거리가 중앙 110m, 좌우 91m에 불과했던 야구장에는 홈런을 막는 철조망이 세워졌다. 4m 안팎이었던 높이는 태평양 돌핀스 지휘봉을 잡은 김성근 감독이 취임하면서 7m까지 올라갔다. '투수왕국'을 지킨 철망이었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김재박 감독은 철망을 잘라냈고, 그해 인천 연고팀 사상 최초로 팀 홈런 1위(106개)를 기록했다.

▲ 1996년 5월8일 옛 인천구장에서 열린 현대 유니콘스와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경기에서 관중들이 응원하고 있다. 뒤편에 지붕이 있는 곳이 지정석이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6년 5월8일 옛 인천구장에서 열린 현대 유니콘스와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경기에서 관중들이 응원하고 있다. 뒤편에 지붕이 있는 곳이 지정석이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입구 주변으로 노점이 진을 쳤던 야구장 안에선 관중석과 그라운드 사이 그물망 아래 간이 매점이 자리했다. 좌판이나 마찬가지였던 그곳에서 풍기는 컵라면과 마른오징어 냄새는 선수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태평양 돌핀스 투수였던 김홍집은 “경기 전에 몸을 풀 때면 정명원 형이 오징어를 몰래 얻어왔다. 주머니에 숨겨서 한 조각씩 입에 물고 뛰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인천구장'이었다. 공설운동장 명칭이 '숭의종합경기장'으로 바뀌면서 '숭의야구장'이라고 불렸고, 도원역과 가까워 '도원구장'으로도 일컬어졌다. SK 와이번스 창단까지 함께했던 야구장은 2001년을 끝으로 문학에 홈 구장 자리를 내준다. 공식 경기는 2008년 9월5일 '제6회 남구청장기 초중 야구대회'가 마지막이었다. 같은 해 6월 먼저 철거된 주경기장 뒤를 따라 야구장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축구전용경기장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였던 임호균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야구장을 없애버렸다. 자주 바뀐 연고팀처럼 인천 야구도 떠돌이 신세가 됐다”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 2002년 시즌부터 문학구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한 SK 와이번스가 월드컵 기간이었던 그해 6월9일 인천구장(도원구장·숭의야구장)에서 마지막 공식 경기를 가졌다. 고별전 상대는 현대 유니콘스였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2년 시즌부터 문학구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한 SK 와이번스가 월드컵 기간이었던 그해 6월9일 인천구장(도원구장·숭의야구장)에서 마지막 공식 경기를 가졌다. 고별전 상대는 현대 유니콘스였다./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연극이 끝나고 난 후…아마야구는 변방으로

독립야구단 '인천 웨이브스'는 2019년 창단 이후 연수구 송도LNG야구장에서 시합하고, 인근 흙 구장에서 연습해왔다. 가장 큰 문제는 접근성이었다. 신항을 지나 육로 끄트머리에 있는 야구장은 대중교통으로 닿을 수 없다. 지병호(50) 감독은 “독립구단 여건상 선수단 버스가 없어서 카풀로 움직이는 형편”이라며 “전용구장을 확보하지 못해 운동장 이용 시간만큼 돈을 내는데 차량도, 식사도 해결하기가 어려우니까 훈련량도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10년 3월 준공된 송도LNG야구장은 인천 '시립' 야구장이다. 인천시는 2008년 옛 인천구장(숭의야구장·도원구장)을 철거하면서 대체 시설로 송도LNG 종합스포츠타운에 인조잔디구장과 보조구장을 만들었다. 한때 SK 와이번스가 2군 경기장으로 사용했고, 지금도 고교야구 주말리그가 벌어진다.

▲ 도원역 지하보도에 전시되고 있던 옛 인천구장 관람석 의자.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 도원역 지하보도에 전시되고 있는 옛 인천구장 관람석 의자.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에 시립 야구장은 인천SSG랜더스필드(문학구장)와 송도LNG야구장뿐이다. 아마야구는 송도LNG야구장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인천시 자료를 보면 인천에 정식 야구장은 9개(총 17면)가 있지만, 사회인 야구를 소화하기에도 버겁다. 이마저도 15개인 부산에 견주면 부족한 숫자다.

접근성 문제는 인천 웨이브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통의 라이벌' 인천고와 동산고, 그리고 제물포고가 맞붙을 때마다 응원전이 벌어졌던 인천구장이 문을 닫으면서 고교야구도 관심에서 멀어졌다. LNG(액화천연가스) 생산기지와 송도자원환경센터로 둘러싸인 그라운드에는 더 이상 함성이 들리지 않는다. 김학용 전 동산고 감독은 “지금은 고교야구를 어디서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인프라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탁상공론만 하니까 야구 발전도 기대하기가 어려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 2008년 철거된 야구장 자리에 들어선 축구전용경기장과 아파트 단지./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 2008년 철거된 야구장 자리에 들어선 축구전용경기장과 아파트 단지./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변방으로 밀려난 아마야구 입지도 불안하다. 시는 2016년 송도LNG야구장 부지를 인천도시공사에 매각하며 대체 야구장 신설 계획을 마련했지만 깜깜무소식이다. 시 체육진흥과 관계자는 “대체 야구장 조성 논의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며 “국민체육진흥기금 사업에 선정돼 내년 송도LNG야구장을 개보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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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망이'는 인천 야구의 고민거리였다.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김경기(54)와 최정(35)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입단했다. 인천 야구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루수-'미스터 인천' 김경기1994년 인천 야구팬 눈길은 김경기가 쓴 헬멧으로 향했다. 팀타율 꼴찌 타선에서 그가 홈런을 칠 때마다 헬멧에는 하트 모양 스티커가 하나씩 늘었다. 그해 9월15일 플레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구원투수-조웅천' '포수-박경완' 태평양 돌핀스 돌풍과 현대 유니콘스 우승의 원동력은 '투수왕국'이었다. SK 와이번스는 '벌떼 마운드'로 왕조 시대를 열었다. 투수왕국과 벌떼 마운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20년간 '인천의 허리'로 마운드를 지탱한 조웅천(51)과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공수겸장' 박경완(50)이다. 구원투수-'인천의 허리' 조웅천1994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태평양 돌핀스는 이듬해 7위로 고꾸라졌다. 선발진이 무너질 때마다 중간계투로 나선 사이드암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우완선발-정민태' '좌완선발-김광현' 프로야구 40년은 별들의 역사였다. '슈퍼스타즈'가 쏘아 올린 공은 인천에도 수많은 별들의 발자취를 남겼다.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통틀어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를 뽑았다. 이른바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다. 12명의 올스타를 선정한 설문조사는 세대별로 추린 인천 야구인 40명을 대상으로 했다. 인천일보는 '구도 인천' 2회부터 4회까지 매주 4명씩 인천 그라운드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냈던 전설들을 소환한다. 인천 야구팬이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법한 '드림팀'이다. 그리고 & [구도 인천] 슈퍼스타 등장부터 랜더스까지…눈물·환희 뒤섞인 '굴곡의 세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2년 7월17일, 인천공설운동장(숭의종합운동장·도원구장)에서 프로야구 첫 경기가 열렸다. 그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야구장 보수 공사로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기리그 홈 경기를 춘천에서 치렀다. 인천시민 앞에 첫선을 보인 경기 상대는 서울 연고 MBC 청룡.결과는 4대 10으로 대패였다. 삼미 슈퍼스타즈 후기리그 성적은 0승6패가 됐다. '구도'라는 자부심을 가진 관중들에게 낯선 야구였다. 그때부터 인천 프로야구단에는 반복되는 꼴찌와 구단 매각이라는 비운이 계속됐다. 40년 세월은 야속 [구도 인천] 100년 전 웃터골의 열기, 100년 후 연안부두 함성으로 1982년 프로야구가 첫발을 내디뎠다. '삼미 슈퍼스타즈'로 출발한 인천 프로야구도 40년을 맞았다.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를 거쳐 'SSG 랜더스'에 이른 인천 연고팀은 유난히 부침을 겪었다. '왕조'의 시절도 누렸다. 인천사람들에게 프로야구는 눈물이자, 환희였다.인천은 일찍이 '야구도시'였다. 100여년 전 웃터골은 야구의 성지였고, '한용단'은 울분 [구도 인천] 구도의 영광 이끈 어린 영웅들, 인천야구 '주춧돌로 성장' 야구도시의 뿌리는 학생 야구였다.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용단’ 야구는 시대를 대변했다. 해방 이후 도시 대항 야구와 학생 야구가 전부였던 시절, 인천고와 동산고는 야구의 대명사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는 1950년대 인천을 떠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구도는 인천으로 통했고, 인천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고교야구 왕중왕' 인천고2005년 4월1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인천고와 부산고가 맞붙었다. '한국야구 100 [구도 인천] 구도의 미래 짊어진 새싹들, 마음껏 치고 던질 수 있어야 인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원 14명 가운데 졸업은 앞둔 6학년은 9명이다. 초등야구의 고민은 '선수 모집'이다. 정정호(38) 서화초 감독은 “리틀·유소년 야구단 출신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몰리니까 중학교 정원은 꽉 차는데, 초등 야구부는 대회 출전이 어려울 정도로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지난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지역 중학교로는 26년 만에 입상한 동인천중 야구부원은 42명이다. 중학야구의 고민은 '진학'이다. 송순석(40) 동인천중 감독은 “학년당 10명이 넘는데, 중학야구 팀은 클럽을 포함해 7 [구도 인천] 구도의 산증인들…채병용 코치·배수현 치어리더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