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령볼'로 불린 커브 앞세워 맹위
한국 성인 야구 최초 '퍼펙트게임'
“'어, 어' 하다가 그렇게 됐지” 회상
“더그아웃 동료들 난리 칠 때 실감”
1959년 동산고 청룡기 우승 주역
준결승 경북고전 '노히트노런'도
전인천군 활약·인천시청 창단멤버
20대 중반 은퇴 이후 은행원 생활
동료들 프로 지도자 생활 먼발치서
“아쉬웠지만 살길 찾아야겠다 생각”
“지금도 빠지지 않고 야구 중계 봐
SSG 전인천군 유니폼 볼 때 감회
후배들 '자기 공' 갖고 마운드 서길
야구 하나에 몰두하고 불태웠으면”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다. 야구계를 떠나 사업가로 살아가고 있는 '퍼펙트 투수'를 지난달 16일 충북 진천으로 찾아갔다. 1965년 실업야구를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던 그가 반세기 만에 퍼펙트 게임을 떠올렸다.
1964년 9월23일 서울 수유동에 있었던 상업은행 야구장에서 크라운맥주와 철도청의 실업야구 경기가 벌어졌다. 크라운맥주 선발투수로 좌완 고순선이 나섰다. 1회부터 시작된 삼자범퇴 행진은 끝날 줄을 몰랐다.
0대 0으로 팽팽했던 균형은 8회초 크라운맥주가 적시타로 1점을 뽑으면서 기울었다. 고순선이 삼진 6개를 잡는 동안, 상대팀 철도청 타자들은 1루를 밟는 것조차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웃카운트는 하나둘 쌓여 27개에 다다르고 있었다.
'망령볼'을 던진 퍼펙트 투수
“그냥 '어, 어' 하다가 그렇게 됐지. 노히트 노런인 줄로만 알고 덤덤했어요. 퍼펙트 게임이란 개념 자체를 몰랐으니까. 근데 경기가 끝나고 더그아웃에서 동료 선수가 난리를 치더라고요. 그제야 좋다고 으쌰으쌰 뛰었던 거지.”
경기 이튿날 신문에는 '완전시합의 대기록', '대망의 퍼펙트 게임', '새로운 기원'을 알리는 기사들이 실렸다. 그때까지 퍼펙트 게임은 중학·고교야구에서 한 차례씩 나왔지만, 성인 무대는 사상 처음이었다. 당대 최고 선수들이 모여 13개 팀이 총 312경기를 치렀던 그해 실업야구 위상은 프로에 못지 않았다. “컨디션도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팀이 좋았어요. 1루수 김응용(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을 비롯해서 수비수들이 실책을 안 했고, 포수 배성서(전 빙그레 이글스 감독)가 리드도 잘해줬고. 뜬공 하나만 놓쳐도 그만이잖아요.”
퍼펙트 게임 비결은 '망령볼'이었다. '인천 야구 한 세기'(2005)를 보면 동산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박현덕 감독을 회고하는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박현덕 감독은 연희전문학교 에이스 출신답게 투수에 큰 관심을 뒀다. 이를 반영하듯 청룡기 3연패 주역인 신인식 투수와 망령볼을 잘 던졌다는 고순선 투수, 후에 역전 군산상고 신화를 만든 최관수 투수 등을 아꼈다.” 망령볼을 잘 던진 투수는 동산고를 졸업하고 실업야구에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대기록 다음날 기사는 “스피드 있는 직구와 커브를 배합”했다고 고순선의 투구를 묘사했다. 커브는 폭포수와도 같았다. “그때만 해도 변화구에 대한 개념이 약했는데, 뚝 떨어지는 커브를 땅바닥에 내다꽂으니까 망령볼이라고 했어요. 살이 까지고 신경질 내면서도 포수들이 공 받아주느라 고생 많았지.”
가슴에 새긴 '인천' 유니폼
망령볼은 동산고에 청룡기를 다시 안긴 공이었다. 1957년 청룡기 3연패를 경험했던 고순선은 이듬해 2학년으로 올라서며 투수를 맡았다. “청룡기에서 3년 연속 우승했을 때 1학년이었어요. 신인식 선배 공이 어마어마했지. 칠 수 있으면 쳐보라는 식으로 정신없이 직구를 꽂아넣는 거야. 대단한 업적을 남긴 선배들이 졸업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지.”
시합을 겨우 치렀을 정도로 선수가 부족했던 동산고 야구부에서 고순선은 던지고, 또 던졌다. 야구에 눈을 뜬 것도 그 무렵이었다. 동산중 3학년 때 반 대항 야구 시합에서 눈에 띄면서 처음 글러브를 꼈던 그는 투수 경력도 짧았다. “원래 머릿수 채우는 정도였는데,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갈 무렵 힘이 붙으면서 재미가 생기더라고. 계속 던지다 보니까 타자들이 못 치고 '이게 되는구나' 느낀 거지.” 1959년 6월9일 고순선은 경북고와의 준결승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동산고는 결승에 올라 '프로야구 원년 4할타자' 백인천이 버틴 경동고를 꺾으며 2년 만에 청룡기를 탈환했다.
구도로 불렸던 그때, 인천 야구의 에이스 계보는 곧 한국 최고 투수의 계보였다. 고순선 앞에는 1956년 동산고를 전국 대회 전관왕에 올린 신인식이 있었고, 그의 앞에는 1953년 인천고 전관왕의 주역 서동준이 있었다. 그리고 맨 앞에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다가 해방 직후 '전인천군' 창단 멤버로 전국 무대를 제패했던 유완식이 자리했다.
1959년 10월 'NBC(국제야구연맹)배 쟁탈 전국야구선수권대회'는 유완식과 고순선이 조우한 무대였다. 실업·대학을 망라해 개최된 대회에 인천 야구 올스타, 전인천군이 나서면서다. 준결승에서 육군에 석패했지만, 고등학생 고순선은 실업·대학팀을 연달아 무너뜨리며 '미기(美技)상'을 받았다. “준결승도 이기는 경기였는데 심판이 스트라이크 존을 좁게 보는 바람에 벤치가 난리 났지. 실업·대학선수들이 망신을 당하니까 이듬해 고교생 출전 금지 규정까지 생겼어요.”
고순선은 1962년 다시 가슴에 '인천'을 새겼다. 인천에서 해군으로 군복무 중이던 그는 인천시청 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5.16으로 육군 대령이었던 유승원 시장이 취임하고 야구단을 만들었어요. 파견 형태로 뛰었지. 급조된 팀이라 약했어요.” 리그에서 하위권을 전전했던 인천시청 실업팀 역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역과 동시에 고순선은 인천 출신 명투수 서동준과 함께 신생 한일은행 야구단에 들어갔다. 서동준과의 인연은 그가 1965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크라운맥주(당시 한일은행 관리업체)까지 이어졌다.
은행원·사업가 그리고 야구인
여든이 넘은 고순선이 야구인으로 살았던 세월은 10년밖에 되지 않는다. 20대 중반 실업야구에서 은퇴하고, 그는 유니폼을 입었던 한일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 “아쉬움은 많았지만 빨리 일을 배워서 살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이 들면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때부터 20년을 은행원으로, 그 이후로 30년을 사업가로 살았다. 야구공을 쥘 틈도 없었다. 실업야구에서 같이 뛰었던 동료들이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지도자로 명성을 떨치는 모습도 먼발치에서 지켜봤다. “화려한 프로야구를 보면서 '저런 길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꿈일 뿐이지. 현재에 만족하고 생활에 충실해야 하고.”
야구계를 떠나서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 있다. “안 보면 이상한 일”로 여기고, “경기에서 지면 밥맛도 안 날 정도”로 프로야구 중계를 챙겨 본다. “태어나고 자란 데가 인천인데 본성을 버릴 수가 있나. SSG 랜더스가 전인천군 유니폼을 입고 경기할 때마다 감회가 깊더라고. 지금 선수들과 야구하면 공 줍는 것밖에 못 할 거예요. 우리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 차이가 많이 나니까.”
그리고 반세기 전 '구도 인천'의 에이스는 여전히 '퍼펙트 게임'을 꿈꾼다. “투수는 막다른 상황에 몰렸을 때 승부를 볼 수 있는 공이 있어야 하거든. 딱 하나만이라도, 눈 감고 던져도 어디든 던질 수 있는, 자기 공을 갖고 마운드에 서면 좋겠어요. 잡념이 들어가면 야구가 안 돼요. 오직 하나에 몰두하고 불태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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