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3회말 -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

인천야구 환희의 순간, 꼭짓점엔 그들이 있었다

▲2루수 '악마 2루수' 정근우
공수주 만능 내야수…와이번스 왕조 '돌격대장' 활약
혹독한 훈련 바탕 끈질긴 수비로 상대팀에 악몽 선사
현역 시절 끝내기 안타만 16번 기록 '끝내주는 선수'

▲유격수 '국민 유격수' 박진만
인천서 나고 자란 토박이 …1996년 고향서 프로 데뷔
올림픽·WBC 등 한국야구 황금기 내야진 진두지휘
2011년 다시 인천행…시간 지나도 안정적 기량 과시

 

2008년 여름 박진만(46)과 정근우(40)는 태극마크를 품에 안고 짐을 꾸렸다. 출발지는 달랐지만 목적지는 같았다. 결말은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이었다.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는 2011년 시즌부터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함께 입었다. 역대 최강 내야 수비진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2루수-'악마 2루수' 정근우

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 캐나다와의 경기에 정근우가 2루수로 나섰다. 앞서 미국과의 경기에선 9회말 대타로 나와 2루타를 때렸고, 득점까지 기록하며 역전승의 디딤돌을 놨다. 캐나다전 1회부터 안타와 도루를 기록한 정근우는 3회 솔로홈런을 날렸다. 경기는 1대 0으로 끝났다.

SK 와이번스가 최강으로 군림했던 그 무렵 정근우는 '공공의 적'이었다. 매서운 방망이와 빠른 발, 그리고 안타성 타구를 잡아내는 얄미운 수비를 더그아웃 맞은편에서 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베이징올림픽에서 악착같이 홈으로 파고드는 그의 주루는 응원 유니폼의 경계를 허물었다.

 

▲ SK 와이번스 왕조 주축 멤버이자 역대 최고 2루수로 꼽히는 정근우.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SK 와이번스 왕조 주축 멤버이자 역대 최고 2루수로 꼽히는 정근우.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정근우가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2루수 부문에서 압도적인 선택을 받았다. 인천 야구인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정근우는 38표를 얻었다. “비교 불가”, “역대 최고 2루수”라는 선정 이유처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었다.

정근우는 입단 이듬해인 2006년 45도루를 기록하며 리그 2위에 올랐고, 골든글러브까지 차지했다. 인천 야구에서 2루수가 골든글러브를 품에 안은 건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삼미 슈퍼스타즈와 청보 핀토스에서 3년 연속 수상한 정구선 이후 21년 만이었다.

▲ 2010년 12월 마무리 훈련부터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함께 입은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 정근우(왼쪽)와 박진만./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10년 12월 마무리 훈련부터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함께 입은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 정근우(왼쪽)와 박진만./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차세대 2루수로 떠오른 정근우와 SK 와이번스의 전성기는 일치했다. 정근우는 2007년 3할2푼3리를 시작으로 2011년까지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특히 2009년 3할5푼(5위)의 고감도 타격감을 선보이며 득점왕을 차지했고, 최다안타 2위(168안타)·도루 2위(53도루)에 올랐다. 그해 정근우 타율은 인천 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기록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 악착같은 수비를 선보여 '악마 2루수'로 불렸던 정근우./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악착같은 수비를 선보여 '악마 2루수'로 불렸던 정근우./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공격과 주루 모두 뛰어났지만 정근우를 '역대 최고 2루수'로 만든 건 '악마'와도 같은 수비였다. 좌우로 빠질 법한 타구를 그는 안간힘을 쓰며 따라가 글러브에 담았고, 그라운드에 뒹굴면서도 1루에 공을 던졌다. 혹독한 훈련이 밑거름이었다. SK 와이번스 왕조를 이끌었던 감독 김성근은 저서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2013)에서 “정근우는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선수다. SK에서 제일 야단맞았던 게 정근우”라고 했다. 정근우는 2020년 11월 은퇴 기자회견을 통해 “펑고를 워낙 많이 받아서 악마 2루수가 되지 않으면 안 됐다. 경기에 나갈 때 위로는 몰라도 양옆으로는 절대 빠뜨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떠올렸다.

▲ SK 와이번스 톱타자를 맡았던 정근우는 공수주 모두 뛰어났던 선수로 평가받는다.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SK 와이번스 톱타자를 맡았던 정근우는 공수주 모두 뛰어났던 선수로 평가받는다.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무엇보다도 정근우는 '끝내주는' 선수였다. 그는 현역 시절 끝내기 안타를 16번이나 쳤다. 프로야구 역대 최다 기록이다. SSG 랜더스 코치 조동화는 “공수주 삼박자가 모두 뛰어났고, 투지·근성을 갖춰 팀의 사기를 올려주는 선수였다”고 말했다.

 


 

 

유격수-'국민 유격수' 박진만

2006년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열린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선 파란 유니폼을 입은 유격수에 눈길이 쏠렸다. 미국 감독은 “유격수의 빛나는 수비에 졌다”고 했고, 멕시코 감독은 “한국 유격수가 인상적이었다. 위치 선정이 뛰어나고, 움직임도 빠르다”고 혀를 내둘렀다. 미국·멕시코·일본을 연이어 꺾고 준결승에 진출한 대표팀 수훈갑 박진만을 두고 한 말이었다.

▲ '국민 유격수'로 불리며 1996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데뷔해 2015년 SK 와이번스에서 은퇴한 박진만.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국민 유격수'로 불리며 1996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데뷔해 2015년 SK 와이번스에서 은퇴한 박진만.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박진만의 플레이는 '메이저리그급 수비'라는 표현을 유행시켰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도 그의 글러브에서 확정됐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또한 그의 더블플레이로 완성됐다. 인천에서 나고 자라 인천 프로야구의 첫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견인했던 유격수 이름 앞에는 '국민 유격수'라는 훈장이 붙었다.

인천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유격수는 역시 박진만이었다. 그는 연고지를 옮긴 현대 유니콘스와 2005년부터 5년간 몸담았던 삼성 라이온즈에서 전성기를 보냈지만,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에 참여한 야구인 40명 가운데 37명은 프로야구 경력의 시작과 끝을 고향 인천과 함께한 박진만을 잊지 못했다. “유격수의 대명사”, “대한민국 유격수 수비를 논할 때 1순위”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 1988년 10월 전국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직후 인천일보를 방문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 선수가 당시 6학년이었던 박진만.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88년 10월 전국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직후 인천일보를 방문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 선수가 당시 6학년이었던 박진만.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5년 5월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인천 예선 제물포고와의 경기에서 인천고 유격수 박진만이 1루로 송구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5년 5월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인천 예선 제물포고와의 경기에서 인천고 유격수 박진만이 1루로 송구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박진만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88년 서화초등학교를 전국야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에는 유격수 포지션에 자리잡았고, 1995년 전국체전 우승 주역으로 활약했다.

▲ 1998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현대 유니콘스 박진만이 홈에서 세이프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8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현대 유니콘스 박진만이 홈에서 세이프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1996년 입단한 박진만은 '불세출의 유격수'로 명성을 떨쳤던 감독 김재박과 조우했다. 둘의 만남은 인천에도, 프로야구에도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재박 등번호인 '7번'을 물려받은 박진만은 첫해부터 주전 유격수를 맡았다. 1998년 인천 연고팀이 첫 우승을 거둔 한국시리즈 1차전에선 결승 2타점 2루타를 쳤고, 마지막 6차전에선 적시타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현대 유니콘스 연고지 이전은 박진만과 인천을 갈라놓았다. 인천은 골든글러브를 5회 수상하며 기량이 절정에 오른 박진만을 먼발치에서 지켜봤다. 그가 유격수를 맡았던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온즈는 2003년부터 4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을 번갈아 차지했다.

▲ 2011년 고향팀 SK 와이번스로 복귀한 유격수 박진만./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11년 고향팀 SK 와이번스로 복귀한 유격수 박진만./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2011년 박진만은 10여년 만에 고향팀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2할8푼 타율로 녹슬지 않은 공격력도 선보였다. “시간이 지나도 대한민국 최고 유격수”라는 응원가 가사처럼 수비는 명불허전이었다. '박진만 시리즈'로 불린 2012년 롯데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는 백미였다. 박진만은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호수비로 SK 와이번스를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올렸다.

박진만은 2015년 무릎 부상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통산 2000경기 출장 기록에 7경기를 남긴 채였다. SK 와이번스 수비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 박진만은 삼성 라이온즈 퓨처스팀(2군) 감독을 맡고 있다. SSG 랜더스 수비코치 손지환은 “가장 안정적인 수비력을 보유한 선수였다”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20년전 인천 프로야구 '추억의 올스타'

2002년 와이번스 선정…김경기 최다득표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2년 6월 인천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SK 와이번스는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를 발표했다. 구단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팬 투표로 선정한 결과였다. 포지션별로 11명을 뽑은 올스타 투표에서 후보는 인천을 연고지로 삼았던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에서 3년 이상 활약한 선수가 대상이었다.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 투표에서 최고 스타는 김경기였다. 그해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치른 김경기는 전체 유효표 3044표 가운데 85%를 득표했다.

우완투수는 당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던 정민태, 좌완투수는 SK 와이번스 에이스로 떠오른 이승호가 뽑혔다. 포수 부문 올스타는 청보 핀토스부터 현대 유니콘스까지 주전으로 활약한 김동기가 차지했다.

내야수는 신구 조화를 이룬 이름들로 채워졌다. 1루수 김경기에 이어 2루수는 삼미 슈퍼스타즈와 청보 핀토스 소속으로 골든글러브를 3년 연속 수상한 정구선이 선정됐다. 3루수 주인공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출신으로 이듬해부터 1992년까지 인천 내야를 책임진 이선웅이었다. 유격수 올스타로는 1998년 인천 연고팀 첫 우승을 이끌고 리그 최고 유격수로 도약했던 박진만이 이름을 올렸다.

총 3명을 뽑은 외야수 부문에는 태평양 돌핀스 출신 도루왕 김일권, '영원한 3할 타자' 윤덕규, '30(홈런)·30(도루)의 사나이' 박재홍이 뽑혔다. 지명타자는 2000년 SK 와이번스 팀으로 옮긴 뒤 주축타자로 발돋움한 이호준이었다.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는 당시 SK 와이번스가 인천야구장(도원·숭의구장) 고별 기념으로 준비한 이벤트였다. 그해부터 홈 구장이 된 문학야구장(현 인천SSG랜더스필드)은 '구도 인천'의 새로운 터전으로 자리잡았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어떻게 선정했나

인천일보는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과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를 선정했다. 투수 3명(우완·좌완·구원)과 포수, 내야수(4명), 외야수(3명), 지명타자 등 총 12명이다.

올스타 후보는 42명이 추려졌다. 인천 연고팀에서 3년 이상 활동한 선수 가운데 KBO 공식 시상식과 골든글러브 수상자, 올스타전 베스트 멤버를 기준으로 삼았다. 국가대표로 각종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도 목록에 올랐다. 2000년대 이전에는 프로 선수들의 국가대표 출전이 불가능했던 점을 고려해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구성됐던 한일 슈퍼게임 멤버도 반영했다. 2002년 SK 와이번스가 선정한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도 포함했다. 투수 포지션의 경우, 인천 연고팀에서 500이닝 이상 투구한 선수 가운데 선정 요건을 충족한 후보들로 올스타를 뽑았다. 

5월18일부터 6월22일까지 진행된 투표에는 야구인 40명이 참여했다. 특정 시기에 몰리지 않도록 20대(5명), 30대(10명), 40대(10명), 50대(10명), 60대 이상(5명) 등 세대별로 배분했다. 20대는 SSG 랜더스 현역 가운데 인천 출신 선수로 한정했고, 30대는 인천 출신이거나 인천 연고팀 3년 이상 활동 선수로 추렸다. 공정한 투표를 기하기 위해 올스타 후보는 투표인단에서 제외했다.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인단 (가나다순)

20대(5명) - 김교람(SSG 내야수), 김정우(SSG 투수), 김택형(SSG 투수), 이정범(SSG 외야수), 하성진(SSG 내야수)

30대(10명) - 김성현(SSG 내야수), 김태훈(SSG 투수), 문승원(SSG 투수), 박민호(SSG 투수), 서진용(SSG 투수), 오준혁(SSG 외야수), 이현석(SSG 포수), 이흥련(SSG 포수), 정정호(서화초 감독), 하재훈(SSG 외야수)

40대(10명) - 고효준(SSG 투수), 김영수(인하대 코치), 손지환(SSG 코치), 송순석(동인천중 감독), 엄정욱(엄정욱베이스볼아카데미 감독), 이대진(SSG 코치), 이양기(동산고 감독), 정경배(SSG 코치), 정상호(SSG 코치), 조동화(SSG 코치)

50대(10명) - 강필선(제물포고 감독), 계기범(인천고 감독), 김원형(SSG 감독), 김정준(SSG 데이터센터장), 김홍집(부평구리틀야구단 감독), 류선규(SSG 단장), 장광호(덕적고 감독), 전형도(SSG 코치), 정원배(인하대 감독), 조원우(SSG 코치)

60대 이상(5명) - 김시진(KBO 경기운영위원), 김재현(전 동산고 코치), 김학용(전 동산고 감독), 양후승(전 인천고 감독), 임호균(한국독립야구위원회 대외협력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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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기록' 장명부1985년 6월21일 인천구장은 4914명의 관중들로 채워졌다. 그해에도 어김없이 꼴찌에 머문 삼미 슈퍼스타즈 고별 경기였다. 마운드에 오른 장명부는 1회부터 8실 [구도 인천] 돌핀스 돌풍의 주역…정명원·최창호·박정현·김동기 1989년 인천 연고팀이 처음 가을야구에 등장했다. 잠자고 있던 구도의 야성도 깨어났다.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도원구장)은 1만3000석이 일찌감치 매진됐고, 입장하지 못한 극성팬들이 철탑에 오르는 소동도 벌어졌다. 2000원짜리 입장권이 2만원에 팔린 암표는 기승을 부렸다.준플레이오프 3경기 선발투수는 박정현·최창호·정명원이 차례로 나섰다. 나란히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그해 태평양 돌핀스가 올린 62승 가운데 40승을 책임진 삼총사였다. 프로야구 최초로 포수 전 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김동기도 변함없이 마스크를 썼다. 돌풍은 멈출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만년 꼴찌, 한을 풀다 20세기 인천 프로야구는 영욕의 시간들을 보냈다. 드물었던 기쁨 뒤에는 어김없이 슬픔이 찾아왔다. 연패에서 탈출하자마자 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환호한 순간 끝내기 패배를 마주했다. 인천 야구의 한을 푼 한국시리즈 우승 끝에는 또 다른 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5년 18연패와 청보 등장장명부의 초인적 활약에 힘입어 1983년 우승 후보로 떠올랐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듬해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도깨비팀'이라는 별명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였다.도깨비팀은 1985년 시즌 개막과 동시에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왕조의 탄생과 부활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응원가 '연안부두' 가사처럼 인천은 연고팀과 이별을 반복했다. 그래도 마음마다 설레게 하는 야구는 계속됐다. 오랜 기다림 끝에 환희의 순간도 마주했다. 가을의 이야기도 다시 시작됐다. 2000년 현대 연고지 이전2000년 3월16일 시범경기가 치러진 인천구장 분위기는 심상찮았다. 원정팀이 안타를 치면 환호가 터졌고, 현대 유니콘스에는 야유가 쏟아졌다. 그날 신문에는 현대 유니콘스는 서울, 신생 SK 야구단은 인천으로 연고지가 결정됐다는 기 [구도 인천] 근성과 감각, 명장의 조건…김진영·김재박 감독 감독과 대행 체제를 오가며 어수선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명장' 김진영(1935∼2020)의 존재였다.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그가 더그아웃에 앉아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성적으로 직결됐다. 명장이 떠나고 부침했던 사령탑은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남다른 감각을 지닌 김재박(68)의 등장으로 마침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감독을 맡은 그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의 오류도 증명했다. '인천 야구의 [구도 인천] 이기는 리더십, 우승의 조건…김성근·힐만·김원형 감독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연승과 연패를 거듭한다. 중요한 건 승패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선수단을 통솔하는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때도 바로 이 순간이다.22연승 신기록도 모자라 16연승을 내달린 팀이 있었다. 수염을 깎지 않은 감독의 징크스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 이면에는 “승리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여기며 안간힘을 쓴 집념이 있었다. 개막하자마자 6연패에 빠진 팀도 있었다. 야심차게 영입한 외국인 감독은 변함없이 운동장에 먼저 나와 ‘파이팅’을 외쳤다. 정답은 없었다. 두 [구도 인천] 웃터골에서 도원까지…인천야구 애환 품은 운동장 야구의 역사는 곧 운동장의 역사였다. 그라운드를 따라 이야기가 쌓였다. 인천 야구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웃터골과 인천야구장의 길은 엇갈렸다. 명맥이 끊겼던 웃터골에는 고교야구가 다시 숨을 불어넣었고, '구도 인천'을 일군 인천구장은 자취를 감췄다. 그라운드가 없으면 야구도 없었다. '100년 야구 역사의 발상지' 웃터골1921년 4월17일 인천 학생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한용단(漢勇團)'은 일본인 야구팀 '실업단'을 5대 1로 꺾었다. 같은 날 '미가도&# [구도 인천] 문학에서 랜필까지…인천팬 웃고 울린 ‘꿈의 극장’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 자락에 '꿈의 구장'이 터를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때는 2002년이었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는 축구를 비췄지만,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이라는 두 글자는 인천 야구와 동의어가 됐다. 또 다른 꿈의 구장은 '구도'의 기억도 소환했다. '꿈의 구장' 문학, '랜필'로 진화2002년 4월9일 인천 연고팀 역사상 한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이 세워졌다.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 경기에 입장한 관중 수는 2만7044명. [구도 인천] 구도의 영광 이끈 어린 영웅들, 인천야구 '주춧돌로 성장' 야구도시의 뿌리는 학생 야구였다.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용단’ 야구는 시대를 대변했다. 해방 이후 도시 대항 야구와 학생 야구가 전부였던 시절, 인천고와 동산고는 야구의 대명사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는 1950년대 인천을 떠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구도는 인천으로 통했고, 인천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고교야구 왕중왕' 인천고2005년 4월1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인천고와 부산고가 맞붙었다. '한국야구 100 [구도 인천] 구도의 미래 짊어진 새싹들, 마음껏 치고 던질 수 있어야 인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원 14명 가운데 졸업은 앞둔 6학년은 9명이다. 초등야구의 고민은 '선수 모집'이다. 정정호(38) 서화초 감독은 “리틀·유소년 야구단 출신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몰리니까 중학교 정원은 꽉 차는데, 초등 야구부는 대회 출전이 어려울 정도로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지난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지역 중학교로는 26년 만에 입상한 동인천중 야구부원은 42명이다. 중학야구의 고민은 '진학'이다. 송순석(40) 동인천중 감독은 “학년당 10명이 넘는데, 중학야구 팀은 클럽을 포함해 7 [구도 인천] 구도의 산증인들…채병용 코치·배수현 치어리더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