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루수 '악마 2루수' 정근우
공수주 만능 내야수…와이번스 왕조 '돌격대장' 활약
혹독한 훈련 바탕 끈질긴 수비로 상대팀에 악몽 선사
현역 시절 끝내기 안타만 16번 기록 '끝내주는 선수'
▲유격수 '국민 유격수' 박진만
인천서 나고 자란 토박이 …1996년 고향서 프로 데뷔
올림픽·WBC 등 한국야구 황금기 내야진 진두지휘
2011년 다시 인천행…시간 지나도 안정적 기량 과시
2008년 여름 박진만(46)과 정근우(40)는 태극마크를 품에 안고 짐을 꾸렸다. 출발지는 달랐지만 목적지는 같았다. 결말은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이었다.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는 2011년 시즌부터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함께 입었다. 역대 최강 내야 수비진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2루수-'악마 2루수' 정근우
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 캐나다와의 경기에 정근우가 2루수로 나섰다. 앞서 미국과의 경기에선 9회말 대타로 나와 2루타를 때렸고, 득점까지 기록하며 역전승의 디딤돌을 놨다. 캐나다전 1회부터 안타와 도루를 기록한 정근우는 3회 솔로홈런을 날렸다. 경기는 1대 0으로 끝났다.
SK 와이번스가 최강으로 군림했던 그 무렵 정근우는 '공공의 적'이었다. 매서운 방망이와 빠른 발, 그리고 안타성 타구를 잡아내는 얄미운 수비를 더그아웃 맞은편에서 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베이징올림픽에서 악착같이 홈으로 파고드는 그의 주루는 응원 유니폼의 경계를 허물었다.
정근우가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2루수 부문에서 압도적인 선택을 받았다. 인천 야구인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정근우는 38표를 얻었다. “비교 불가”, “역대 최고 2루수”라는 선정 이유처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었다.
정근우는 입단 이듬해인 2006년 45도루를 기록하며 리그 2위에 올랐고, 골든글러브까지 차지했다. 인천 야구에서 2루수가 골든글러브를 품에 안은 건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삼미 슈퍼스타즈와 청보 핀토스에서 3년 연속 수상한 정구선 이후 21년 만이었다.
차세대 2루수로 떠오른 정근우와 SK 와이번스의 전성기는 일치했다. 정근우는 2007년 3할2푼3리를 시작으로 2011년까지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특히 2009년 3할5푼(5위)의 고감도 타격감을 선보이며 득점왕을 차지했고, 최다안타 2위(168안타)·도루 2위(53도루)에 올랐다. 그해 정근우 타율은 인천 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기록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공격과 주루 모두 뛰어났지만 정근우를 '역대 최고 2루수'로 만든 건 '악마'와도 같은 수비였다. 좌우로 빠질 법한 타구를 그는 안간힘을 쓰며 따라가 글러브에 담았고, 그라운드에 뒹굴면서도 1루에 공을 던졌다. 혹독한 훈련이 밑거름이었다. SK 와이번스 왕조를 이끌었던 감독 김성근은 저서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2013)에서 “정근우는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선수다. SK에서 제일 야단맞았던 게 정근우”라고 했다. 정근우는 2020년 11월 은퇴 기자회견을 통해 “펑고를 워낙 많이 받아서 악마 2루수가 되지 않으면 안 됐다. 경기에 나갈 때 위로는 몰라도 양옆으로는 절대 빠뜨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떠올렸다.
무엇보다도 정근우는 '끝내주는' 선수였다. 그는 현역 시절 끝내기 안타를 16번이나 쳤다. 프로야구 역대 최다 기록이다. SSG 랜더스 코치 조동화는 “공수주 삼박자가 모두 뛰어났고, 투지·근성을 갖춰 팀의 사기를 올려주는 선수였다”고 말했다.
유격수-'국민 유격수' 박진만
2006년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열린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선 파란 유니폼을 입은 유격수에 눈길이 쏠렸다. 미국 감독은 “유격수의 빛나는 수비에 졌다”고 했고, 멕시코 감독은 “한국 유격수가 인상적이었다. 위치 선정이 뛰어나고, 움직임도 빠르다”고 혀를 내둘렀다. 미국·멕시코·일본을 연이어 꺾고 준결승에 진출한 대표팀 수훈갑 박진만을 두고 한 말이었다.
박진만의 플레이는 '메이저리그급 수비'라는 표현을 유행시켰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도 그의 글러브에서 확정됐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또한 그의 더블플레이로 완성됐다. 인천에서 나고 자라 인천 프로야구의 첫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견인했던 유격수 이름 앞에는 '국민 유격수'라는 훈장이 붙었다.
인천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유격수는 역시 박진만이었다. 그는 연고지를 옮긴 현대 유니콘스와 2005년부터 5년간 몸담았던 삼성 라이온즈에서 전성기를 보냈지만,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에 참여한 야구인 40명 가운데 37명은 프로야구 경력의 시작과 끝을 고향 인천과 함께한 박진만을 잊지 못했다. “유격수의 대명사”, “대한민국 유격수 수비를 논할 때 1순위”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박진만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88년 서화초등학교를 전국야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에는 유격수 포지션에 자리잡았고, 1995년 전국체전 우승 주역으로 활약했다.
1996년 입단한 박진만은 '불세출의 유격수'로 명성을 떨쳤던 감독 김재박과 조우했다. 둘의 만남은 인천에도, 프로야구에도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재박 등번호인 '7번'을 물려받은 박진만은 첫해부터 주전 유격수를 맡았다. 1998년 인천 연고팀이 첫 우승을 거둔 한국시리즈 1차전에선 결승 2타점 2루타를 쳤고, 마지막 6차전에선 적시타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현대 유니콘스 연고지 이전은 박진만과 인천을 갈라놓았다. 인천은 골든글러브를 5회 수상하며 기량이 절정에 오른 박진만을 먼발치에서 지켜봤다. 그가 유격수를 맡았던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온즈는 2003년부터 4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을 번갈아 차지했다.
2011년 박진만은 10여년 만에 고향팀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2할8푼 타율로 녹슬지 않은 공격력도 선보였다. “시간이 지나도 대한민국 최고 유격수”라는 응원가 가사처럼 수비는 명불허전이었다. '박진만 시리즈'로 불린 2012년 롯데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는 백미였다. 박진만은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호수비로 SK 와이번스를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올렸다.
박진만은 2015년 무릎 부상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통산 2000경기 출장 기록에 7경기를 남긴 채였다. SK 와이번스 수비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 박진만은 삼성 라이온즈 퓨처스팀(2군) 감독을 맡고 있다. SSG 랜더스 수비코치 손지환은 “가장 안정적인 수비력을 보유한 선수였다”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20년전 인천 프로야구 '추억의 올스타'
2002년 와이번스 선정…김경기 최다득표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2년 6월 인천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SK 와이번스는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를 발표했다. 구단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팬 투표로 선정한 결과였다. 포지션별로 11명을 뽑은 올스타 투표에서 후보는 인천을 연고지로 삼았던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에서 3년 이상 활약한 선수가 대상이었다.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 투표에서 최고 스타는 김경기였다. 그해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치른 김경기는 전체 유효표 3044표 가운데 85%를 득표했다.
우완투수는 당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던 정민태, 좌완투수는 SK 와이번스 에이스로 떠오른 이승호가 뽑혔다. 포수 부문 올스타는 청보 핀토스부터 현대 유니콘스까지 주전으로 활약한 김동기가 차지했다.
내야수는 신구 조화를 이룬 이름들로 채워졌다. 1루수 김경기에 이어 2루수는 삼미 슈퍼스타즈와 청보 핀토스 소속으로 골든글러브를 3년 연속 수상한 정구선이 선정됐다. 3루수 주인공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출신으로 이듬해부터 1992년까지 인천 내야를 책임진 이선웅이었다. 유격수 올스타로는 1998년 인천 연고팀 첫 우승을 이끌고 리그 최고 유격수로 도약했던 박진만이 이름을 올렸다.
총 3명을 뽑은 외야수 부문에는 태평양 돌핀스 출신 도루왕 김일권, '영원한 3할 타자' 윤덕규, '30(홈런)·30(도루)의 사나이' 박재홍이 뽑혔다. 지명타자는 2000년 SK 와이번스 팀으로 옮긴 뒤 주축타자로 발돋움한 이호준이었다.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는 당시 SK 와이번스가 인천야구장(도원·숭의구장) 고별 기념으로 준비한 이벤트였다. 그해부터 홈 구장이 된 문학야구장(현 인천SSG랜더스필드)은 '구도 인천'의 새로운 터전으로 자리잡았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어떻게 선정했나
인천일보는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과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를 선정했다. 투수 3명(우완·좌완·구원)과 포수, 내야수(4명), 외야수(3명), 지명타자 등 총 12명이다.
올스타 후보는 42명이 추려졌다. 인천 연고팀에서 3년 이상 활동한 선수 가운데 KBO 공식 시상식과 골든글러브 수상자, 올스타전 베스트 멤버를 기준으로 삼았다. 국가대표로 각종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도 목록에 올랐다. 2000년대 이전에는 프로 선수들의 국가대표 출전이 불가능했던 점을 고려해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구성됐던 한일 슈퍼게임 멤버도 반영했다. 2002년 SK 와이번스가 선정한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도 포함했다. 투수 포지션의 경우, 인천 연고팀에서 500이닝 이상 투구한 선수 가운데 선정 요건을 충족한 후보들로 올스타를 뽑았다.
5월18일부터 6월22일까지 진행된 투표에는 야구인 40명이 참여했다. 특정 시기에 몰리지 않도록 20대(5명), 30대(10명), 40대(10명), 50대(10명), 60대 이상(5명) 등 세대별로 배분했다. 20대는 SSG 랜더스 현역 가운데 인천 출신 선수로 한정했고, 30대는 인천 출신이거나 인천 연고팀 3년 이상 활동 선수로 추렸다. 공정한 투표를 기하기 위해 올스타 후보는 투표인단에서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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