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잊을 수 없는 이름]
5회초-슈퍼스타즈의 슈퍼스타

도원야구장 화려하게 수놓았던 '최초의 슈퍼스타'

▲'불멸의 기록' 장명부
일본 프로야구 맹활약 후 1983년 합류
한 시즌 동안 60경기·30승·427.1이닝
상상조차 힘든 기록 남기며 마운드 지배

▲'컨트롤의 달인' 임호균
1982년 국가대표 선발 세계선수권 출전
1987년 프로야구 최소 투구 완봉승 눈길
“인천야구 상징…제구 최고로 꼽혀” 평가

▲'강견의 해결사' 양승관
1982년 올스타·팀내 유일 골든글러브
경기 중 위기 때마다 결정적 안타·홈런
강한 어깨 외야수 주자에겐 '공포의 대상'

 

찰나의 환희와 기나긴 한숨이 이어진 3년 반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잠깐 반짝였고,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별빛이 명멸하는 동안 마운드에서 장명부는 초인적인 투구를 거듭했고, 임호균은 공 하나하나에 승부를 걸었다. 양승관의 방망이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쏘아올렸다. 그들이 그라운드에 나설 때면 슈퍼스타즈는 슈퍼스타즈일 수 있었다.

 

▲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 장명부(오른쪽)는 1983년 30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 장명부(오른쪽)는 1983년 30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불멸의 기록' 장명부

1985년 6월21일 인천구장은 4914명의 관중들로 채워졌다. 그해에도 어김없이 꼴찌에 머문 삼미 슈퍼스타즈 고별 경기였다. 마운드에 오른 장명부는 1회부터 8실점하며 무너졌다. '30승 투수' 위용은 온데간데없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마지막 경기에서도 6대 16으로 대패했다. 장명부, 그리고 슈퍼스타즈의 시대가 저문 순간이었다.

1982년 겨울 일본 프로야구에서 '전격은퇴'를 선언한 장명부 입국으로 야구계는 떠들썩했다. 재일교포 장명부는 단순히 일본 프로야구를 경험한 선수가 아니었다. 통산 91승을 올리며 평균자책점 3.68을 기록한 거물급 투수였다. 1979년부터 일본시리즈를 2연패한 히로시마 카프 에이스였다.

▲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 장명부(가운데)가 1983년 6월4일 내한한 히로시마 응원단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 장명부(가운데)가 1983년 6월4일 내한한 히로시마 응원단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프로야구 원년 15승 65패로 초라한 성적을 남겼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듬해 우승을 넘보는 팀으로 급부상했다. 세계야구선수권 국가대표 임호균·김진우·정구선·이선웅이 합류한 전력에 장명부의 가세는 화룡점정이었다. 장명부는 1983년 전체 100경기 가운데 60경기에 등판하며 36경기를 완투했고, 무려 427과 3분의 1이닝을 던졌다. 최종 성적은 30승 16패 6세이브. 그가 기록한 투구 이닝과 승수는 불멸의 기록으로 남았다.

▲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 장명부(가운데)가 1983년 6월4일 내한한 히로시마 응원단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 장명부(가운데)가 1983년 6월4일 내한한 히로시마 응원단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변화무쌍했던 공만큼이나 장명부의 인생도 파란만장했다. 이듬해 260이닝을 넘게 던지며 13승을 기록했지만, 그와 함께 팀도 내리막을 걸었다. 1985년 청보 핀토스에서 장명부가 기록한 25패는 단일 시즌 최다 기록으로 남았다. '떠돌이' 신세가 됐던 장명부 소식은 2005년 일본발 부고로 전해졌다. 그의 곁에는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였던 김재현은 “팀내 갈등도 있었지만 투수로서의 자세 등을 장명부에게서 배웠다”며 “한국 야구는 그의 등장으로 진짜 프로가 됐다”고 말했다.

 


 

▲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마운드에서 장명부와 쌍두마차를 이룬 임호균./사진제공=임호균
▲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마운드에서 장명부와 쌍두마차를 이룬 임호균./사진제공=임호균

 

'컨트롤의 달인' 임호균

1987년 8월25일 인천구장 경기는 1시간 54분 만에 끝났다. 청보 핀토스 투수 임호균은 73개 공만으로 완봉승을 거뒀다. 안타 2개를 허용했지만, 무잔루로 경기를 끝내며 27명의 타자만 상대했다. 최소 투구 완봉승 기록으로 남은 경기다.

프로야구 원년 1할대 승률의 꼴찌팀 삼미 슈퍼스타즈에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그해 세계야구선수권 출전으로 프로 진출이 유보됐던 임호균의 존재였다.

▲ 고향팀 청보 핀토스로 돌아온 임호균. 그는 1987년 73구 완봉승이라는 진기록을 수립했다./사진제공=임호균
▲ 고향팀 청보 핀토스로 돌아온 임호균. 그는 1987년 73구 완봉승이라는 진기록을 수립했다./사진제공=임호균

인천고를 졸업한 그는 1981년 실업야구 평균자책점 1위 투수였다. 김재박의 개구리번트와 한대화의 역전 홈런으로 각인된 세계야구선수권에서도 임호균은 평균자책점 0으로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유니폼을 입은 임호균은 롯데 자이언츠와의 시즌 두 번째 경기에서 최동원과 맞대결 끝에 데뷔전 첫 승을 따냈다. 실업야구에서 은퇴를 고민했던 20대 후반의 나이었지만, 프로 첫해 성적은 평균자책점 3.03에 12승 15패 2세이브. 그해 임호균이 던진 234와 3분의 2이닝은 장명부에 이어 리그 2위 기록이었다.

▲ 삼미 슈퍼스타즈와 청보 핀토스에 이어 태평양 돌핀스 투수로 고향팀 마운드를 지킨 임호균. /사진제공=임호균
▲ 삼미 슈퍼스타즈와 청보 핀토스에 이어 태평양 돌핀스 투수로 고향팀 마운드를 지킨 임호균. /사진제공=임호균

임호균은 절묘한 컨트롤을 자랑했다. 73구 완봉도 우연이 아니었다. 인천고 재학 시절이었던 1974년 8월2일 화랑기 준준결승에선 휘문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는데, 투구수는 79개였다.

1984년 롯데 자이언츠에서 10승을 올리며 최동원과 우승을 합작했던 그는 1987년 다시 고향팀에 돌아왔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임호균은 청보 핀토스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11경기를 완투했고, 9승을 올렸다. 국가대표 동료였던 김시진 KBO 경기운영위원은 “인천 야구를 상징하는 선수였다. 제구는 최고로 꼽힌 투수”라고 말했다.

▲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한 임호균(가운데 점퍼를 입고 있는 선수)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임호균
▲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한 임호균(가운데 점퍼를 입고 있는 선수)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임호균

 


 

▲ 1998년 10월30일 인천 연고팀의 한을 풀고 처음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현대 유니콘스 양승관(오른쪽에서 두 번째) 코치가 선수들과 기뻐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8년 10월30일 인천 연고팀의 한을 풀고 처음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현대 유니콘스 양승관(오른쪽에서 두 번째) 코치가 선수들과 기뻐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강견의 해결사' 양승관

1985년 4월30일 인천구장에선 살얼음판 승부가 이어졌다.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 최계훈은 MBC 청룡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2회말 정구선 솔로홈런이 유일한 득점이었다. 8회말 1사 만루에서 주자 일소 3루타가 터졌고, 4대 0으로 경기가 끝났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3월30일 개막전 이후 꼬박 한 달 만에 이기며 연패 늪에서 탈출했다. 3루타 주인공은 전날 18연패에 빠진 경기에서도 홈런을 날리며 고군분투한 양승관이었다.

▲ 1983년 8월 삼미 슈퍼스타즈 양승관이 득점을 올리며 동료들과 환호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83년 8월 삼미 슈퍼스타즈 양승관이 득점을 올리며 동료들과 환호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양승관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시작과 끝을 지켜본 타자였다. 꼴찌팀이 배출한 원년 올스타전 감투상 수상자였고, 강견의 외야수였던 그는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유일하게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선두권으로 도약했던 1983년에도 팀에서 유일한 3할 타자로 타선을 이끌었다.

삼미 슈퍼스타즈에 이어 청보 핀토스를 악몽에서 깨운 것도 양승관의 홈런이었다. 1986년 청보 핀토스는 개막과 동시에 7연패 수렁에 빠졌다. 그해 4월6일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에 6대 8로 뒤진 9회말 양승관은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역전 3점 홈런을 터뜨렸다. 초보 감독이었던 허구연은 “1승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며 눈물을 흘렸다.

팀이 위기에 처할수록 빛을 발했던 양승관은 현대 유니콘스 코치로 1998년 인천 연고팀 첫 번째 우승을 경험했다. '형제 야구인'으로 활약한 양후승 전 인천고 감독은 “형이 외야에서 공을 잡으면 주자가 홈에 들어올 엄두를 못 낼 만큼 어깨가 강했다. 공수 모두 치열한 연습이 밑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임호균 인터뷰] 73구 완봉승 제구력 마술사 “후배들에 길 열어주고파”

“상대 타자들 공격적 승부 덕분에 진기록 가능”
“1982년 세계선수권, 야구팬 끌어들인 시작점”

프로야구에는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진기록이 있다. 임호균(66)의 73구 완봉승이다. 인천 출신으로 삼미 슈퍼스타즈부터 태평양 돌핀스까지 유니폼을 입었던 그는 한국독립야구위원회 대외협력위원장과 을지대 평생교육원 교수를 지내며 여전히 야구인으로 살아간다. 지난 6월20일 경기도 성남시 자택 인근에서 만난 임호균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1987년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73구로 완봉승을 거뒀다. 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 투수들은 한 이닝에만 74구를 던진 적도 있다. 어떻게 그런 경기가 가능했을까.

-상대가 최고 전력이었던 해태 타이거즈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타자들이 초구부터 공격적으로 나왔고, 나도 도망가지 않고 스트라이크를 던졌다. 구종이 다양하진 않았다. 커브, 슬라이더, 역회전 공 정도를 던졌다.

 

▲프로 8년간 탈삼진은 252개로 적은 편이었다.

-삼진을 잡으려면 최소한 공 3개를 던져야 한다. 난 1개만으로도 승부하려고 했다. 공 서너 개 던지고도 아웃카운트를 잡으면 이닝이 끝난다.

 

▲'구도'를 자부하는 인천과 부산에서 선수 생활을 했는데.

-인천 프로야구단은 계속 바뀌었고, 야구 역사를 상징하는 도원구장도 사라졌다. 정통성이 끊겼다. 반면 부산은 성적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롯데 자이언츠가 원년부터 지금까지 존재한다. 야구 열기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연장으로 가면서 이틀간 치러졌던 호주와의 경기가 힘들었는데, 마지막 일본전에서 드라마처럼 이겼다. 야구팬들을 끌어들인 시작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글·사진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양승관 인터뷰] 언제나 승리 갈망했던 승부사 “지금도 야구는 내 전부”

“공 던지면 도원구장 밖까지 쉽게 넘겨” 회상
“이기고 싶어 숙소에서 스윙·새벽에도 훈련”

연패마저 훈훈하게 그려졌던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2004)에서 긴장감을 불어넣은 인물이 있다. 삼미 슈퍼스타즈 유일한 '3할 타자' 양승관(63)이다. 그는 누구보다 승리를 갈망했던 선수였다. 독립야구단 파주 챌린저스 단장으로 그라운드에 남아 있는 양승관은 지난 6월20일 경기도 광주시 팀업캠퍼스 야구장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야구는 나의 전부”라고 말했다.

 

▲강견으로 유명하다. 인터넷 지식백과에는 인천공설운동장(도원구장·숭의야구장) 야구장 홈플레이트에서 공을 던지면 축구장까지 날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잠실구장에서도 좌중간 관중석까지 던졌다. 도원구장은 외야 관중석이 좁았으니까 경기장을 쉽게 넘기곤 했다. 옆에 있던 축구장까지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장외로 던진 건 사실이다.(웃음)

 

▲동료에게 화를 내는 모습으로 영화에 등장하는데.

-주변 성토가 심해서 개봉했을 땐 일부러 안 봤다. SK 와이번스 코치로 전지훈련 가서 혼자 보다가 속상해서 술을 많이 마셨다.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 화를 내긴 했다. 땡볕에 수비하면서 30분 넘게 서 있으면 짜증났다.(웃음)

 

▲밤늦게까지 남아서 훈련하는 장면도 나온다.

-팀이 패배 의식에 젖어 있었다. 이기고 싶어서 숙소 주차장에서 스윙 연습하고, 새벽에도 훈련했다. 그래도 전력이 약하니까 초반에 박살나거나, 앞서다가도 후반에 뒤집혔다.

 

▲선수층이 왜 얇았을까.

-인천 고교야구가 침체기였다. 실업야구에서 이름을 알린 선배들은 은퇴를 고민할 때였다. 인천 출신 선배들은 나이를 먹었고, 투수는 부족했다. 한 경기만 이겨도 우승한 기분이었다.

 

/글·사진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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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시절도 누렸다. 인천사람들에게 프로야구는 눈물이자, 환희였다.인천은 일찍이 '야구도시'였다. 100여년 전 웃터골은 야구의 성지였고, '한용단'은 울분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만년 꼴찌, 한을 풀다 20세기 인천 프로야구는 영욕의 시간들을 보냈다. 드물었던 기쁨 뒤에는 어김없이 슬픔이 찾아왔다. 연패에서 탈출하자마자 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환호한 순간 끝내기 패배를 마주했다. 인천 야구의 한을 푼 한국시리즈 우승 끝에는 또 다른 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5년 18연패와 청보 등장장명부의 초인적 활약에 힘입어 1983년 우승 후보로 떠올랐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듬해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도깨비팀'이라는 별명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였다.도깨비팀은 1985년 시즌 개막과 동시에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왕조의 탄생과 부활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응원가 '연안부두' 가사처럼 인천은 연고팀과 이별을 반복했다. 그래도 마음마다 설레게 하는 야구는 계속됐다. 오랜 기다림 끝에 환희의 순간도 마주했다. 가을의 이야기도 다시 시작됐다. 2000년 현대 연고지 이전2000년 3월16일 시범경기가 치러진 인천구장 분위기는 심상찮았다. 원정팀이 안타를 치면 환호가 터졌고, 현대 유니콘스에는 야유가 쏟아졌다. 그날 신문에는 현대 유니콘스는 서울, 신생 SK 야구단은 인천으로 연고지가 결정됐다는 기 [구도 인천] 근성과 감각, 명장의 조건…김진영·김재박 감독 감독과 대행 체제를 오가며 어수선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명장' 김진영(1935∼2020)의 존재였다.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그가 더그아웃에 앉아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성적으로 직결됐다. 명장이 떠나고 부침했던 사령탑은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남다른 감각을 지닌 김재박(68)의 등장으로 마침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감독을 맡은 그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의 오류도 증명했다. '인천 야구의 [구도 인천] 이기는 리더십, 우승의 조건…김성근·힐만·김원형 감독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연승과 연패를 거듭한다. 중요한 건 승패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선수단을 통솔하는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때도 바로 이 순간이다.22연승 신기록도 모자라 16연승을 내달린 팀이 있었다. 수염을 깎지 않은 감독의 징크스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 이면에는 “승리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여기며 안간힘을 쓴 집념이 있었다. 개막하자마자 6연패에 빠진 팀도 있었다. 야심차게 영입한 외국인 감독은 변함없이 운동장에 먼저 나와 ‘파이팅’을 외쳤다. 정답은 없었다. 두 [구도 인천] 웃터골에서 도원까지…인천야구 애환 품은 운동장 야구의 역사는 곧 운동장의 역사였다. 그라운드를 따라 이야기가 쌓였다. 인천 야구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웃터골과 인천야구장의 길은 엇갈렸다. 명맥이 끊겼던 웃터골에는 고교야구가 다시 숨을 불어넣었고, '구도 인천'을 일군 인천구장은 자취를 감췄다. 그라운드가 없으면 야구도 없었다. '100년 야구 역사의 발상지' 웃터골1921년 4월17일 인천 학생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한용단(漢勇團)'은 일본인 야구팀 '실업단'을 5대 1로 꺾었다. 같은 날 '미가도&# [구도 인천] 문학에서 랜필까지…인천팬 웃고 울린 ‘꿈의 극장’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 자락에 '꿈의 구장'이 터를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때는 2002년이었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는 축구를 비췄지만,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이라는 두 글자는 인천 야구와 동의어가 됐다. 또 다른 꿈의 구장은 '구도'의 기억도 소환했다. '꿈의 구장' 문학, '랜필'로 진화2002년 4월9일 인천 연고팀 역사상 한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이 세워졌다.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 경기에 입장한 관중 수는 2만7044명. [구도 인천] 구도의 영광 이끈 어린 영웅들, 인천야구 '주춧돌로 성장' 야구도시의 뿌리는 학생 야구였다.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용단’ 야구는 시대를 대변했다. 해방 이후 도시 대항 야구와 학생 야구가 전부였던 시절, 인천고와 동산고는 야구의 대명사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는 1950년대 인천을 떠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구도는 인천으로 통했고, 인천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고교야구 왕중왕' 인천고2005년 4월1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인천고와 부산고가 맞붙었다. '한국야구 100 [구도 인천] 구도의 미래 짊어진 새싹들, 마음껏 치고 던질 수 있어야 인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원 14명 가운데 졸업은 앞둔 6학년은 9명이다. 초등야구의 고민은 '선수 모집'이다. 정정호(38) 서화초 감독은 “리틀·유소년 야구단 출신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몰리니까 중학교 정원은 꽉 차는데, 초등 야구부는 대회 출전이 어려울 정도로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지난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지역 중학교로는 26년 만에 입상한 동인천중 야구부원은 42명이다. 중학야구의 고민은 '진학'이다. 송순석(40) 동인천중 감독은 “학년당 10명이 넘는데, 중학야구 팀은 클럽을 포함해 7 [구도 인천] 구도의 산증인들…채병용 코치·배수현 치어리더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