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3회초 - 인천 거포의 계보

화끈한 방망이·물샐틈없는 수비 '황금 내야진'

▲1루수 '미스터 인천' 김경기
'인천야구 상징적 존재'·'영원한 4번타자' 숱한 애칭
1994년 홈런왕 경쟁 연고팀 최초 한국시리즈 견인
유니콘스 연고 이전 후 영입 요구 현수막 걸리기도

▲3루수 '리빙 레전드' 최정
2008 KS 최연소 MVP·2018 우승 발판 홈런 기억
끝없이 한계 도전 '교타자 → 호타준족 → 거포' 변신
'역대 최고 3루수' 반열…“역사 쓰고 있는 선수” 평가

 

'짠물야구'는 점수를 적게 주는 투수진만을 가리키는 표현은 아니었다. '물방망이'는 인천 야구의 고민거리였다.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김경기(54)와 최정(35)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입단했다. 인천 야구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루수-'미스터 인천' 김경기

1994년 인천 야구팬 눈길은 김경기가 쓴 헬멧으로 향했다. 팀타율 꼴찌 타선에서 그가 홈런을 칠 때마다 헬멧에는 하트 모양 스티커가 하나씩 늘었다. 그해 9월15일 플레이오프 직행을 확정하는 홈런까지 하트는 23개가 됐다. 리그 홈런 2위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 1994년 홈런왕 경쟁을 벌이며 태평양 돌풍을 이끈 김경기./태평양 돌핀스 1994년 팬북
▲ 1994년 홈런왕 경쟁을 벌이며 태평양 돌풍을 이끈 김경기./태평양 돌핀스 1994년 팬북

같은 해 10월9일 플레이오프 첫 경기가 벌어진 인천구장에는 3만명이 넘는 관중이 몰렸다. 표를 구하지 못한 2만여명은 발길을 돌릴 정도였다. 김경기는 한화 이글스 에이스 정민철을 상대로 기선을 제압하는 홈런을 터뜨렸다. 2차전에선 비거리 140m 홈런으로 공을 경기장 밖으로 보냈다. 그리고 3차전 연장 10회초 김경기는 정민철의 7구를 받아쳐 결승 홈런을 터뜨렸다. 인천 야구의 첫 번째 한국시리즈 진출이었다.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이 참여한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에서 김경기가 1루수 부문 주인공으로 선정됐다. '미스터 인천' 김경기는 22표를 얻어 '미스터 옥토버' 박정권(18표)을 제쳤다. 야구인들은 “인천 하면 떠오르는 선수”라고 김경기를 기억했다.

▲ 1994년 태평양 돌핀스 4번타자 김경기가 홈런을 칠 때마다 헬멧에 붙었던 하트 모양 스티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4년 태평양 돌핀스 4번타자 김경기가 홈런을 칠 때마다 헬멧에 붙었던 하트 모양 스티커. /인천일보 필름 자료

1990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한 김경기는 곧장 4번타자를 꿰찼다. 1992년 21홈런(7위)을 치며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로 떠오른 그는 1996년 20홈런(4위)을 기록하며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인천 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거포의 상징인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자는 그가 유일하다.

▲ 1994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선제 홈런을 터뜨린 김경기가 김재박 코치와 환호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4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선제 홈런을 터뜨린 김경기가 김재박 코치와 환호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선수 생활 내내 부상에 시달렸던 김경기가 100경기를 넘게 출전했던 1994년과 1996년, 그리고 1998년 인천 연고팀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1996년 1차전에서 터졌던 인천 연고팀 한국시리즈 첫 홈런도 그의 방망이에서 나왔다. 2년 뒤인 1998년 현대 유니콘스는 인천 최초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궜고, 김경기는 우승패를 들어올렸다.

2000년 3월15일은 인천 야구에도, 김경기 야구 인생에도 분기점이었다. 현대 유니콘스가 연고지로 옮겼고, 인천에는 SK 와이번스가 들어왔다. 수원구장에는 '인천 자존심 김경기 고향의 품으로'가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현대 유니콘스는 그해 7월 김경기를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했다. 하지만 눈앞의 성적이 중요하지 않은 신생팀에서 베테랑이 설 자리는 좁았다. 김경기는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내주며 이듬해까지 97경기에만 출장했고, 홈런도 6개를 추가하는 데 그쳤다. 그의 마지막 홈런은 2001년 10월3일 현대 유니콘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 9회 마지막 타석이었다.

▲ 2002년 4월9일 문학구장에서 치러진 인천 개막전에서 김경기 은퇴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 2002년 4월9일 문학구장에서 치러진 인천 개막전에서 김경기 은퇴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제공=한국미디어저널

인천 야구팬들에게 김경기는 누구와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4번타자였다. 홈런으로 이기는 경기를 즐길 수 있게 해준 존재는 그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20세기 인천 야구가 경험한 세 차례 한국시리즈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코치와 선수로 한솥밥을 먹었던 김시진 KBO 경기운영위원은 “설명이 필요없는 인천의 레전드”라고 말했다.

 


 

 

3루수-'리빙 레전드' 최정

2008년 10월29일 한국시리즈 3차전. 1대 1로 팽팽하던 6회초 최정의 타구가 잠실구장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4차전 결승 2루타, 5차전 쐐기타를 친 최정은 공수에서 맹활약하며 21세로 역대 최연소 한국시리즈 MVP가 됐다.

▲ 우타자 최초로 400홈런을 넘기며 프로야구 통산 홈런 2위에 올라 있는 SSG 랜더스 최정. /사진제공=SSG 랜더스
▲ 우타자 최초로 400홈런을 넘기며 프로야구 통산 홈런 2위에 올라 있는 SSG 랜더스 최정. /사진제공=SSG 랜더스
▲ 2018년 11월12일 한국시리즈 6차전 9회초 2아웃에서 극적인 동점 홈런을 친 SK 와이번스 최정. /사진제공=SSG 랜더스
▲ 2018년 11월12일 한국시리즈 6차전 9회초 2아웃에서 극적인 동점 홈런을 친 SK 와이번스 최정. /사진제공=SSG 랜더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른 2018년 11월12일 또다시 두산 베어스와 만난 한국시리즈 6차전 9회초. 3대 4로 SK 와이번스가 뒤진 상황에서 상대 에이스 린드블럼이 등판했다. 앞선 두 타자는 모두 삼진. 최정은 린드블럼의 공을 잡아당겨 잠실구장 담장을 넘겼다. 동점 홈런을 발판으로 SK 와이번스는 끝내기 승리를 거뒀고, 우승을 차지했다.

인천 야구인 40명이 고른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3루수 부문 주인공은 최정이었다. 최정은 만장일치에 가까운 38표를 받았다. SSG 랜더스 타격코치 정경배는 “KBO를 대표하는 3루수”라고 했다.

▲ SSG 랜더스 최정은 타격뿐 아니라 수비도 최정상급으로 평가받는다. /사진제공=SSG 랜더스
▲ SSG 랜더스 최정은 타격뿐 아니라 수비도 최정상급으로 평가받는다. /사진제공=SSG 랜더스

최정은 끊임없이 한계를 뛰어넘는 선수였다. 2006년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던 그는 감독 김성근이 부임하면서 붙박이 3루수로 발돋움했다. '지옥훈련'에서 수비를 가다듬은 결과였다.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최정은 3할2푼8리를 기록한 교타자였고, 리그 최고 수비수였다. 과감하게 뛰어들어 땅볼을 부드럽게 걷어쥐는 손놀림과 강한 타구를 반사 신경으로 잡은 뒤 뿌리는 빨랫줄 같은 송구는 트레이드 마크였다. 김성근은 저서 '김성근이다'(2011)에서 “하루에 펑고를 1000개씩 쳐줬다. 최정의 장점은 잡으려고 달려든다는 점이었다. 의지와 욕심이 있는 선수였던 것”이라고 했다.

20대 중반 최정은 '호타준족'으로 거듭났다. 2012년부터 2년 연속 3할 타율에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했다. 특히 2013년에는 28홈런(3위)을 쏘아올리며 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WAR, 스탯티즈 기준) 7.11로 리그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011년부터 3년 내내 골든글러브도 받았다.

▲ 지난 6월11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5회말 역전 2점 홈런을 친 최정이 타구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제공=SSG 랜더스
▲ 지난 6월11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5회말 역전 2점 홈런을 친 최정이 타구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제공=SSG 랜더스

서른 무렵 최정은 '홈런공장장'으로 또다시 진화했다. 2016년 40홈런과 106타점·106득점을 기록하며 홈런왕과 골든글러브를 석권했다. 2017년에는 3할1푼6리 타율에 46홈런으로 홈런왕·장타율왕·골든글러브를 품으며 최고 타자 반열에 올라섰다. 최정은 지난해에도 35홈런으로 개인 통산 세 번째 홈런왕을 차지했다. 역대 최초 17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 기록도 세웠다. 득점 생산력을 보여주는 지표 OPS(출루율+장타율)는 지난해까지 12년 연속 특급타자 기준인 9할을 넘겼다. 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최정(82.71)보다 높은 WAR을 기록한 선수는 선동열(107.07)·양준혁(87.22)밖에 없다. SSG 랜더스 감독 김원형은 “3루수의 역사를 쓰고 있는 선수”라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1루수 김경기 “첫 우승 뒤 도원구장 돌 때 울던 관중들 못 잊어”

독립구단 '인천 웨이브스' 단장 활동 중
“자신감 가득했던 1994년이 내 전성기
“2001년 도원구장 고별전 결장 아쉬움”

2002년 1월 김경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계약 불가' 통보였다.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은 지 1년 반만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출장 기회가 적었어요. 5경기만이라도 더 뛰어보게 해달라고 말하지 못한 게 한으로 맺혀 있습니다.” 은퇴한 지 20년 지나서도 김경기의 야구 열정은 변함없다. 5년간 해설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독립야구단에서 후배들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지난 5월26일 미추홀구 학익동 자택 근처에서 만난 김경기는 “현장 체질”이라며 미소 지었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해설 마이크를 내려놨다.

-독립야구단 '인천 웨이브스' 단장을 맡고 있다.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 선수들이 모여 있는데, 운영이 여의치 않아 후원을 받으려고 백방으로 뛰는 중이다.

 

▲짝수 해 성적은 좋았지만 홀수 해마다 부진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한 달 동안 대소변을 받아낼 정도였다. 짝수 해에는 거의 전 경기를 출장했는데, 이듬해가 되면 허리 통증 때문에 제대로 뛸 수 없었다.

 

▲전성기는 언제였다고 생각하는지.

-1994년이 기억에 남는다. 플레이오프 내내 홈런을 쳤을 정도로 잘 맞았다. 스트라이크만 던져주면 담장을 넘긴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시즌 막판까지 홈런왕 경쟁을 벌였는데, 상대 팀에서 고의사구로 거른 타석이 많았다.

 

▲연고지 이전 이후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고지 이전을 시즌 직전 신문 보고 알았다. 도원구장은 각별한 곳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도, 가장 아쉬웠던 때도 도원구장과 함께했다.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하고 도원구장을 돌았을 때 서로 부둥켜안고 울던 관중들을 잊지 못한다. 아쉬웠던 기억은 SK 와이번스로 와서 도원구장에서 했던 마지막 경기였다. 2001년을 끝으로 홈 구장을 문학으로 옮기는 걸 알았는데, 경기에 내보내주지 않았다. 대타라도 나가서 추억이 담겨 있던 도원구장과 이별하고 싶었지만,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던 그날이 너무 아쉽다.

 

/글·사진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어떻게 선정했나

인천일보는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과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를 선정했다. 투수 3명(우완·좌완·구원)과 포수, 내야수(4명), 외야수(3명), 지명타자 등 총 12명이다.

올스타 후보는 42명이 추려졌다. 인천 연고팀에서 3년 이상 활동한 선수 가운데 KBO 공식 시상식과 골든글러브 수상자, 올스타전 베스트 멤버를 기준으로 삼았다. 국가대표로 각종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도 목록에 올랐다. 2000년대 이전에는 프로 선수들의 국가대표 출전이 불가능했던 점을 고려해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구성됐던 한일 슈퍼게임 멤버도 반영했다. 2002년 SK 와이번스가 선정한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도 포함했다. 투수 포지션의 경우, 인천 연고팀에서 500이닝 이상 투구한 선수 가운데 선정 요건을 충족한 후보들로 올스타를 뽑았다. 

5월18일부터 6월22일까지 진행된 투표에는 야구인 40명이 참여했다. 특정 시기에 몰리지 않도록 20대(5명), 30대(10명), 40대(10명), 50대(10명), 60대 이상(5명) 등 세대별로 배분했다. 20대는 SSG 랜더스 현역 가운데 인천 출신 선수로 한정했고, 30대는 인천 출신이거나 인천 연고팀 3년 이상 활동 선수로 추렸다. 공정한 투표를 기하기 위해 올스타 후보는 투표인단에서 제외했다.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인단 (가나다순)

20대(5명) - 김교람(SSG 내야수), 김정우(SSG 투수), 김택형(SSG 투수), 이정범(SSG 외야수), 하성진(SSG 내야수)

30대(10명) - 김성현(SSG 내야수), 김태훈(SSG 투수), 문승원(SSG 투수), 박민호(SSG 투수), 서진용(SSG 투수), 오준혁(SSG 외야수), 이현석(SSG 포수), 이흥련(SSG 포수), 정정호(서화초 감독), 하재훈(SSG 외야수)

40대(10명) - 고효준(SSG 투수), 김영수(인하대 코치), 손지환(SSG 코치), 송순석(동인천중 감독), 엄정욱(엄정욱베이스볼아카데미 감독), 이대진(SSG 코치), 이양기(동산고 감독), 정경배(SSG 코치), 정상호(SSG 코치), 조동화(SSG 코치)

50대(10명) - 강필선(제물포고 감독), 계기범(인천고 감독), 김원형(SSG 감독), 김정준(SSG 데이터센터장), 김홍집(부평구리틀야구단 감독), 류선규(SSG 단장), 장광호(덕적고 감독), 전형도(SSG 코치), 정원배(인하대 감독), 조원우(SSG 코치)

60대 이상(5명) - 김시진(KBO 경기운영위원), 김재현(전 동산고 코치), 김학용(전 동산고 감독), 양후승(전 인천고 감독), 임호균(한국독립야구위원회 대외협력위원장)

 



관련기사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2루수-정근우' '유격수-박진만' 2008년 여름 박진만(46)과 정근우(40)는 태극마크를 품에 안고 짐을 꾸렸다. 출발지는 달랐지만 목적지는 같았다. 결말은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이었다.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는 2011년 시즌부터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함께 입었다. 역대 최강 내야 수비진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2루수-'악마 2루수' 정근우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 캐나다와의 경기에 정근우가 2루수로 나섰다. 앞서 미국과의 경기에선 9회말 대타로 나와 2루타를 때렸고, 득점까지 기록하며 역전승의 디딤돌을 놨다. 캐나다전 1회부터 안타와 도루를 기록한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구원투수-조웅천' '포수-박경완' 태평양 돌핀스 돌풍과 현대 유니콘스 우승의 원동력은 '투수왕국'이었다. SK 와이번스는 '벌떼 마운드'로 왕조 시대를 열었다. 투수왕국과 벌떼 마운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20년간 '인천의 허리'로 마운드를 지탱한 조웅천(51)과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공수겸장' 박경완(50)이다. 구원투수-'인천의 허리' 조웅천1994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태평양 돌핀스는 이듬해 7위로 고꾸라졌다. 선발진이 무너질 때마다 중간계투로 나선 사이드암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우완선발-정민태' '좌완선발-김광현' 프로야구 40년은 별들의 역사였다. '슈퍼스타즈'가 쏘아 올린 공은 인천에도 수많은 별들의 발자취를 남겼다.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통틀어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를 뽑았다. 이른바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다. 12명의 올스타를 선정한 설문조사는 세대별로 추린 인천 야구인 40명을 대상으로 했다. 인천일보는 '구도 인천' 2회부터 4회까지 매주 4명씩 인천 그라운드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냈던 전설들을 소환한다. 인천 야구팬이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법한 '드림팀'이다. 그리고 & [구도 인천] 슈퍼스타 등장부터 랜더스까지…눈물·환희 뒤섞인 '굴곡의 세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2년 7월17일, 인천공설운동장(숭의종합운동장·도원구장)에서 프로야구 첫 경기가 열렸다. 그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야구장 보수 공사로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기리그 홈 경기를 춘천에서 치렀다. 인천시민 앞에 첫선을 보인 경기 상대는 서울 연고 MBC 청룡.결과는 4대 10으로 대패였다. 삼미 슈퍼스타즈 후기리그 성적은 0승6패가 됐다. '구도'라는 자부심을 가진 관중들에게 낯선 야구였다. 그때부터 인천 프로야구단에는 반복되는 꼴찌와 구단 매각이라는 비운이 계속됐다. 40년 세월은 야속 [구도 인천] 100년 전 웃터골의 열기, 100년 후 연안부두 함성으로 1982년 프로야구가 첫발을 내디뎠다. '삼미 슈퍼스타즈'로 출발한 인천 프로야구도 40년을 맞았다.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를 거쳐 'SSG 랜더스'에 이른 인천 연고팀은 유난히 부침을 겪었다. '왕조'의 시절도 누렸다. 인천사람들에게 프로야구는 눈물이자, 환희였다.인천은 일찍이 '야구도시'였다. 100여년 전 웃터골은 야구의 성지였고, '한용단'은 울분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외야수-박재홍·김강민'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등장한 '괴물 신인' 박재홍(49)은 인천 연고팀은 물론, 프로야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 첫해 신인으로 지명한 김강민(40)은 공수주에서 꾸준한 기량을 과시하며 프로야구 최장 '원클럽맨'이 됐다. 두 선수가 한솥밥을 먹었던 시절, SK 와이번스는 '왕조'로 불렸다. 인천 야구장을 주름잡은 '괴물'과 '짐승'의 출현은 프로야구 판도마저 뒤흔들었다. 외야수-'호타준족' 박재홍1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외야수-이진영' '지명타자-김기태' 2003년 정규리그를 4위로 마친 SK 와이번스는 처음 '가을야구'를 경험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2연승한 SK 와이번스는 플레이오프에서 기아 타이거즈와 맞붙었다. 3차전 이진영(42)의 2점 홈런에 이어 김기태(53)의 적시타가 터졌다. SK 와이번스를 신흥 명문 구단으로 도약시킨 좌타자들의 활약은 '인천 SK' 구호가 물결을 이룬 문학구장에서 한국시리즈의 첫 번째 페이지를 열었다. 외야수-'국민 우익수' 이진영2003년 10월19일 한국시리즈 3차전이 열린 문학구장은 3만 [구도 인천] 슈퍼스타즈의 슈퍼스타…장명부·임호균·양승관 찰나의 환희와 기나긴 한숨이 이어진 3년 반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잠깐 반짝였고,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별빛이 명멸하는 동안 마운드에서 장명부는 초인적인 투구를 거듭했고, 임호균은 공 하나하나에 승부를 걸었다. 양승관의 방망이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쏘아올렸다. 그들이 그라운드에 나설 때면 슈퍼스타즈는 슈퍼스타즈일 수 있었다. '불멸의 기록' 장명부1985년 6월21일 인천구장은 4914명의 관중들로 채워졌다. 그해에도 어김없이 꼴찌에 머문 삼미 슈퍼스타즈 고별 경기였다. 마운드에 오른 장명부는 1회부터 8실 [구도 인천] 돌핀스 돌풍의 주역…정명원·최창호·박정현·김동기 1989년 인천 연고팀이 처음 가을야구에 등장했다. 잠자고 있던 구도의 야성도 깨어났다.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도원구장)은 1만3000석이 일찌감치 매진됐고, 입장하지 못한 극성팬들이 철탑에 오르는 소동도 벌어졌다. 2000원짜리 입장권이 2만원에 팔린 암표는 기승을 부렸다.준플레이오프 3경기 선발투수는 박정현·최창호·정명원이 차례로 나섰다. 나란히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그해 태평양 돌핀스가 올린 62승 가운데 40승을 책임진 삼총사였다. 프로야구 최초로 포수 전 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김동기도 변함없이 마스크를 썼다. 돌풍은 멈출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만년 꼴찌, 한을 풀다 20세기 인천 프로야구는 영욕의 시간들을 보냈다. 드물었던 기쁨 뒤에는 어김없이 슬픔이 찾아왔다. 연패에서 탈출하자마자 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환호한 순간 끝내기 패배를 마주했다. 인천 야구의 한을 푼 한국시리즈 우승 끝에는 또 다른 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5년 18연패와 청보 등장장명부의 초인적 활약에 힘입어 1983년 우승 후보로 떠올랐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듬해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도깨비팀'이라는 별명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였다.도깨비팀은 1985년 시즌 개막과 동시에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왕조의 탄생과 부활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응원가 '연안부두' 가사처럼 인천은 연고팀과 이별을 반복했다. 그래도 마음마다 설레게 하는 야구는 계속됐다. 오랜 기다림 끝에 환희의 순간도 마주했다. 가을의 이야기도 다시 시작됐다. 2000년 현대 연고지 이전2000년 3월16일 시범경기가 치러진 인천구장 분위기는 심상찮았다. 원정팀이 안타를 치면 환호가 터졌고, 현대 유니콘스에는 야유가 쏟아졌다. 그날 신문에는 현대 유니콘스는 서울, 신생 SK 야구단은 인천으로 연고지가 결정됐다는 기 [구도 인천] 근성과 감각, 명장의 조건…김진영·김재박 감독 감독과 대행 체제를 오가며 어수선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명장' 김진영(1935∼2020)의 존재였다.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그가 더그아웃에 앉아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성적으로 직결됐다. 명장이 떠나고 부침했던 사령탑은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남다른 감각을 지닌 김재박(68)의 등장으로 마침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감독을 맡은 그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의 오류도 증명했다. '인천 야구의 [구도 인천] 이기는 리더십, 우승의 조건…김성근·힐만·김원형 감독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연승과 연패를 거듭한다. 중요한 건 승패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선수단을 통솔하는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때도 바로 이 순간이다.22연승 신기록도 모자라 16연승을 내달린 팀이 있었다. 수염을 깎지 않은 감독의 징크스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 이면에는 “승리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여기며 안간힘을 쓴 집념이 있었다. 개막하자마자 6연패에 빠진 팀도 있었다. 야심차게 영입한 외국인 감독은 변함없이 운동장에 먼저 나와 ‘파이팅’을 외쳤다. 정답은 없었다. 두 [구도 인천] 웃터골에서 도원까지…인천야구 애환 품은 운동장 야구의 역사는 곧 운동장의 역사였다. 그라운드를 따라 이야기가 쌓였다. 인천 야구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웃터골과 인천야구장의 길은 엇갈렸다. 명맥이 끊겼던 웃터골에는 고교야구가 다시 숨을 불어넣었고, '구도 인천'을 일군 인천구장은 자취를 감췄다. 그라운드가 없으면 야구도 없었다. '100년 야구 역사의 발상지' 웃터골1921년 4월17일 인천 학생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한용단(漢勇團)'은 일본인 야구팀 '실업단'을 5대 1로 꺾었다. 같은 날 '미가도&# [구도 인천] 문학에서 랜필까지…인천팬 웃고 울린 ‘꿈의 극장’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 자락에 '꿈의 구장'이 터를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때는 2002년이었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는 축구를 비췄지만,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이라는 두 글자는 인천 야구와 동의어가 됐다. 또 다른 꿈의 구장은 '구도'의 기억도 소환했다. '꿈의 구장' 문학, '랜필'로 진화2002년 4월9일 인천 연고팀 역사상 한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이 세워졌다.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 경기에 입장한 관중 수는 2만7044명. [구도 인천] 구도의 영광 이끈 어린 영웅들, 인천야구 '주춧돌로 성장' 야구도시의 뿌리는 학생 야구였다.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용단’ 야구는 시대를 대변했다. 해방 이후 도시 대항 야구와 학생 야구가 전부였던 시절, 인천고와 동산고는 야구의 대명사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는 1950년대 인천을 떠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구도는 인천으로 통했고, 인천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고교야구 왕중왕' 인천고2005년 4월1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인천고와 부산고가 맞붙었다. '한국야구 100 [구도 인천] 구도의 미래 짊어진 새싹들, 마음껏 치고 던질 수 있어야 인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원 14명 가운데 졸업은 앞둔 6학년은 9명이다. 초등야구의 고민은 '선수 모집'이다. 정정호(38) 서화초 감독은 “리틀·유소년 야구단 출신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몰리니까 중학교 정원은 꽉 차는데, 초등 야구부는 대회 출전이 어려울 정도로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지난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지역 중학교로는 26년 만에 입상한 동인천중 야구부원은 42명이다. 중학야구의 고민은 '진학'이다. 송순석(40) 동인천중 감독은 “학년당 10명이 넘는데, 중학야구 팀은 클럽을 포함해 7 [구도 인천] 구도의 산증인들…채병용 코치·배수현 치어리더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