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루수 '미스터 인천' 김경기
'인천야구 상징적 존재'·'영원한 4번타자' 숱한 애칭
1994년 홈런왕 경쟁 연고팀 최초 한국시리즈 견인
유니콘스 연고 이전 후 영입 요구 현수막 걸리기도
▲3루수 '리빙 레전드' 최정
2008 KS 최연소 MVP·2018 우승 발판 홈런 기억
끝없이 한계 도전 '교타자 → 호타준족 → 거포' 변신
'역대 최고 3루수' 반열…“역사 쓰고 있는 선수” 평가
'짠물야구'는 점수를 적게 주는 투수진만을 가리키는 표현은 아니었다. '물방망이'는 인천 야구의 고민거리였다.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김경기(54)와 최정(35)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입단했다. 인천 야구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루수-'미스터 인천' 김경기
1994년 인천 야구팬 눈길은 김경기가 쓴 헬멧으로 향했다. 팀타율 꼴찌 타선에서 그가 홈런을 칠 때마다 헬멧에는 하트 모양 스티커가 하나씩 늘었다. 그해 9월15일 플레이오프 직행을 확정하는 홈런까지 하트는 23개가 됐다. 리그 홈런 2위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같은 해 10월9일 플레이오프 첫 경기가 벌어진 인천구장에는 3만명이 넘는 관중이 몰렸다. 표를 구하지 못한 2만여명은 발길을 돌릴 정도였다. 김경기는 한화 이글스 에이스 정민철을 상대로 기선을 제압하는 홈런을 터뜨렸다. 2차전에선 비거리 140m 홈런으로 공을 경기장 밖으로 보냈다. 그리고 3차전 연장 10회초 김경기는 정민철의 7구를 받아쳐 결승 홈런을 터뜨렸다. 인천 야구의 첫 번째 한국시리즈 진출이었다.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이 참여한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에서 김경기가 1루수 부문 주인공으로 선정됐다. '미스터 인천' 김경기는 22표를 얻어 '미스터 옥토버' 박정권(18표)을 제쳤다. 야구인들은 “인천 하면 떠오르는 선수”라고 김경기를 기억했다.
1990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한 김경기는 곧장 4번타자를 꿰찼다. 1992년 21홈런(7위)을 치며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로 떠오른 그는 1996년 20홈런(4위)을 기록하며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인천 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거포의 상징인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자는 그가 유일하다.
선수 생활 내내 부상에 시달렸던 김경기가 100경기를 넘게 출전했던 1994년과 1996년, 그리고 1998년 인천 연고팀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1996년 1차전에서 터졌던 인천 연고팀 한국시리즈 첫 홈런도 그의 방망이에서 나왔다. 2년 뒤인 1998년 현대 유니콘스는 인천 최초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궜고, 김경기는 우승패를 들어올렸다.
2000년 3월15일은 인천 야구에도, 김경기 야구 인생에도 분기점이었다. 현대 유니콘스가 연고지로 옮겼고, 인천에는 SK 와이번스가 들어왔다. 수원구장에는 '인천 자존심 김경기 고향의 품으로'가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현대 유니콘스는 그해 7월 김경기를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했다. 하지만 눈앞의 성적이 중요하지 않은 신생팀에서 베테랑이 설 자리는 좁았다. 김경기는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내주며 이듬해까지 97경기에만 출장했고, 홈런도 6개를 추가하는 데 그쳤다. 그의 마지막 홈런은 2001년 10월3일 현대 유니콘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 9회 마지막 타석이었다.
인천 야구팬들에게 김경기는 누구와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4번타자였다. 홈런으로 이기는 경기를 즐길 수 있게 해준 존재는 그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20세기 인천 야구가 경험한 세 차례 한국시리즈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코치와 선수로 한솥밥을 먹었던 김시진 KBO 경기운영위원은 “설명이 필요없는 인천의 레전드”라고 말했다.
3루수-'리빙 레전드' 최정
2008년 10월29일 한국시리즈 3차전. 1대 1로 팽팽하던 6회초 최정의 타구가 잠실구장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4차전 결승 2루타, 5차전 쐐기타를 친 최정은 공수에서 맹활약하며 21세로 역대 최연소 한국시리즈 MVP가 됐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른 2018년 11월12일 또다시 두산 베어스와 만난 한국시리즈 6차전 9회초. 3대 4로 SK 와이번스가 뒤진 상황에서 상대 에이스 린드블럼이 등판했다. 앞선 두 타자는 모두 삼진. 최정은 린드블럼의 공을 잡아당겨 잠실구장 담장을 넘겼다. 동점 홈런을 발판으로 SK 와이번스는 끝내기 승리를 거뒀고, 우승을 차지했다.
인천 야구인 40명이 고른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3루수 부문 주인공은 최정이었다. 최정은 만장일치에 가까운 38표를 받았다. SSG 랜더스 타격코치 정경배는 “KBO를 대표하는 3루수”라고 했다.
최정은 끊임없이 한계를 뛰어넘는 선수였다. 2006년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던 그는 감독 김성근이 부임하면서 붙박이 3루수로 발돋움했다. '지옥훈련'에서 수비를 가다듬은 결과였다.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최정은 3할2푼8리를 기록한 교타자였고, 리그 최고 수비수였다. 과감하게 뛰어들어 땅볼을 부드럽게 걷어쥐는 손놀림과 강한 타구를 반사 신경으로 잡은 뒤 뿌리는 빨랫줄 같은 송구는 트레이드 마크였다. 김성근은 저서 '김성근이다'(2011)에서 “하루에 펑고를 1000개씩 쳐줬다. 최정의 장점은 잡으려고 달려든다는 점이었다. 의지와 욕심이 있는 선수였던 것”이라고 했다.
20대 중반 최정은 '호타준족'으로 거듭났다. 2012년부터 2년 연속 3할 타율에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했다. 특히 2013년에는 28홈런(3위)을 쏘아올리며 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WAR, 스탯티즈 기준) 7.11로 리그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011년부터 3년 내내 골든글러브도 받았다.
서른 무렵 최정은 '홈런공장장'으로 또다시 진화했다. 2016년 40홈런과 106타점·106득점을 기록하며 홈런왕과 골든글러브를 석권했다. 2017년에는 3할1푼6리 타율에 46홈런으로 홈런왕·장타율왕·골든글러브를 품으며 최고 타자 반열에 올라섰다. 최정은 지난해에도 35홈런으로 개인 통산 세 번째 홈런왕을 차지했다. 역대 최초 17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 기록도 세웠다. 득점 생산력을 보여주는 지표 OPS(출루율+장타율)는 지난해까지 12년 연속 특급타자 기준인 9할을 넘겼다. 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최정(82.71)보다 높은 WAR을 기록한 선수는 선동열(107.07)·양준혁(87.22)밖에 없다. SSG 랜더스 감독 김원형은 “3루수의 역사를 쓰고 있는 선수”라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1루수 김경기 “첫 우승 뒤 도원구장 돌 때 울던 관중들 못 잊어”
독립구단 '인천 웨이브스' 단장 활동 중
“자신감 가득했던 1994년이 내 전성기
“2001년 도원구장 고별전 결장 아쉬움”
2002년 1월 김경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계약 불가' 통보였다.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은 지 1년 반만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출장 기회가 적었어요. 5경기만이라도 더 뛰어보게 해달라고 말하지 못한 게 한으로 맺혀 있습니다.” 은퇴한 지 20년 지나서도 김경기의 야구 열정은 변함없다. 5년간 해설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독립야구단에서 후배들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지난 5월26일 미추홀구 학익동 자택 근처에서 만난 김경기는 “현장 체질”이라며 미소 지었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해설 마이크를 내려놨다.
-독립야구단 '인천 웨이브스' 단장을 맡고 있다.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 선수들이 모여 있는데, 운영이 여의치 않아 후원을 받으려고 백방으로 뛰는 중이다.
▲짝수 해 성적은 좋았지만 홀수 해마다 부진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한 달 동안 대소변을 받아낼 정도였다. 짝수 해에는 거의 전 경기를 출장했는데, 이듬해가 되면 허리 통증 때문에 제대로 뛸 수 없었다.
▲전성기는 언제였다고 생각하는지.
-1994년이 기억에 남는다. 플레이오프 내내 홈런을 쳤을 정도로 잘 맞았다. 스트라이크만 던져주면 담장을 넘긴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시즌 막판까지 홈런왕 경쟁을 벌였는데, 상대 팀에서 고의사구로 거른 타석이 많았다.
▲연고지 이전 이후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고지 이전을 시즌 직전 신문 보고 알았다. 도원구장은 각별한 곳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도, 가장 아쉬웠던 때도 도원구장과 함께했다.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하고 도원구장을 돌았을 때 서로 부둥켜안고 울던 관중들을 잊지 못한다. 아쉬웠던 기억은 SK 와이번스로 와서 도원구장에서 했던 마지막 경기였다. 2001년을 끝으로 홈 구장을 문학으로 옮기는 걸 알았는데, 경기에 내보내주지 않았다. 대타라도 나가서 추억이 담겨 있던 도원구장과 이별하고 싶었지만,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던 그날이 너무 아쉽다.
/글·사진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어떻게 선정했나
인천일보는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과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를 선정했다. 투수 3명(우완·좌완·구원)과 포수, 내야수(4명), 외야수(3명), 지명타자 등 총 12명이다.
올스타 후보는 42명이 추려졌다. 인천 연고팀에서 3년 이상 활동한 선수 가운데 KBO 공식 시상식과 골든글러브 수상자, 올스타전 베스트 멤버를 기준으로 삼았다. 국가대표로 각종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도 목록에 올랐다. 2000년대 이전에는 프로 선수들의 국가대표 출전이 불가능했던 점을 고려해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구성됐던 한일 슈퍼게임 멤버도 반영했다. 2002년 SK 와이번스가 선정한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도 포함했다. 투수 포지션의 경우, 인천 연고팀에서 500이닝 이상 투구한 선수 가운데 선정 요건을 충족한 후보들로 올스타를 뽑았다.
5월18일부터 6월22일까지 진행된 투표에는 야구인 40명이 참여했다. 특정 시기에 몰리지 않도록 20대(5명), 30대(10명), 40대(10명), 50대(10명), 60대 이상(5명) 등 세대별로 배분했다. 20대는 SSG 랜더스 현역 가운데 인천 출신 선수로 한정했고, 30대는 인천 출신이거나 인천 연고팀 3년 이상 활동 선수로 추렸다. 공정한 투표를 기하기 위해 올스타 후보는 투표인단에서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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