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투수 '인천의 허리' 조웅천
돌핀스~와이번스 '전천후 카드'
중간·마무리 오가며 헌신적 활약
13년 연속 50경기 출장 대기록도
▲포수 '불멸의 포도대장' 박경완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 포수 평가
인천 영광의 순간마다 안방 지켜
“전력의 반” 극찬…유일 영구결번
태평양 돌핀스 돌풍과 현대 유니콘스 우승의 원동력은 '투수왕국'이었다. SK 와이번스는 '벌떼 마운드'로 왕조 시대를 열었다. 투수왕국과 벌떼 마운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20년간 '인천의 허리'로 마운드를 지탱한 조웅천(51)과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공수겸장' 박경완(50)이다.
구원투수-'인천의 허리' 조웅천
1994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태평양 돌핀스는 이듬해 7위로 고꾸라졌다. 선발진이 무너질 때마다 중간계투로 나선 사이드암 조웅천은 1995년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80과 3분의 2이닝을 던졌다. 1990년 1군 무대에 오른 이후 4년간 소화했던 70이닝보다도 많은 투구였다.
조웅천은 일반 학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야구부 창단 2년째를 맞았던 순천상고로 전학 가며 야구선수 꿈을 놓지 않았다. 졸업한 뒤에는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고 1989년 태평양 돌핀스에 연습생(육성선수)으로 문을 두드렸다. 1995년 6월15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해 첫 승을 올리기까지 6년이 걸렸다. 잡초 같았던 야구 인생은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로 이어지며 소나무와 같은 존재가 됐다. 2008년까지 13년 연속 5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인천 야구인 40명이 참여한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에서 가장 치열했던 부문은 구원투수였다. 역대 최고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인 정명원(13표), SK 와이번스 벌떼 불펜의 '여왕벌' 정대현(9표), 최다 출장 기록 보유자인 정우람(4표)보다 많은 표를 얻은 선수는 구원투수 역사를 새로 쓴 조웅천(14표)이었다. SSG 랜더스 감독 김원형은 “데뷔 때부터 인천에서 가장 오래, 많은 활약을 한 선수”라고 말했다.
현대 유니콘스에서 '현대판 마당쇠'로 불린 그는 1996년부터 '기록 제조기'로 명성을 쌓았다. 그해 조웅천은 전체 126경기 가운데 68경기에 등판했다.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장명부가 세운 60경기를 뛰어넘은 신기록이었다. 한국시리즈 2차전에선 연장전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인천 연고팀의 한국시리즈 첫 승리이자, 첫 번째 승리투수였다.
'필승조'로 자리매김한 조웅천은 2000년 연고지를 옮긴 현대 유니콘스 소속으로 초대 홀드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듬해부터 SK 와이번스에서 중간과 마무리를 전천후로 오갔다. 2003년 1점대 평균자책점으로 30세이브를 올려 구원왕도 차지했다.
그 이후 행보도 신기록의 연속이었다. 2005년 김용수(613경기)의 기록을 넘어서며 투수 최다 출장 신기록을 세웠다. 'KBO 1호' 통산 700경기 출장(2007년 4월), 800경기 출장(2008년 8월)도 조웅천의 몫이었다. SK 와이번스가 왕조로 군림한 2007년에도 평균자책점 1.57을 기록하며 2승 9세이브 16홀드로 활약했다. 200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그는 813경기에서 마운드에 올랐다. 지금은 SSG 랜더스 코치로 투수진을 이끌고 있다. SSG 랜더스 단장 류선규는 “오랜 기간 안정감 있는 투구로 셋업맨과 마무리 역할을 잘 소화했다”고 말했다.
포수-'전력의 절반' 박경완
2009년 6월24일 기아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9회초 땅볼을 치고 나간 박경완은 쩔뚝이며 쓰러진 채 1루에 가까스로 손을 뻗었다. 진단 결과는 아킬레스건 파열. 이튿날 수술했던 의사는 “선수 생명은 끝났다”고 말했다. 박경완은 SK 와이번스가 끝내기 홈런을 맞고 우승을 놓친 그해 11월 오키나와로 재활을 떠났다. 일행은 트레이닝 코치뿐이었다. 석 달 동안 박경완은 걷기만 했다.
이듬해 개막전에서 타격 훈련도 건너뛴 박경완은 선발 포수로 출장해 첫 타석부터 2루타를 기록했다. 팀도 3대 2로 승리를 거뒀다. 그는 “몸 상태보다도 직전 시즌부터 계속된 팀 19연승 기록이 깨질까봐 불안했다. 다행히 22연승까지 이어갔다”고 했다. 집도의는 “논문으로 쓸 만한 사례”라고 했지만, 정작 그가 써내려간 건 포수 최초 300홈런, 개인 통산 20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이었다. 2010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마지막 스트라이크를 잡고 마운드로 달려오는 그를 향해 에이스 김광현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인천 야구인 40명 가운데 35명이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대표하는 포수로 박경완을 꼽았다. 초중고를 거쳐 프로까지 그와 배터리를 이뤘던 SSG 랜더스 감독 김원형은 “300홈런을 기록하며 인천에서 많은 활약을 했던 레전드 포수”라고 말했다.
인천 야구 영광의 순간마다 포수 마스크를 쓴 박경완이 있었다. 1998년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차지했을 때도 '투수왕국'의 포수는 박경완이었다. SK 와이번스가 '왕조'로 불리며 일궈낸 우승도 박경완의 손에서 비롯했다. 2007년과 2010년 마지막 공을 잡아낸 것도 그였고, 2008년 접전을 마무리한 더블플레이도 그의 송구로 완성됐다.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에 연습생(육성선수)으로 입단한 박경완은 1994년부터 주전 포수로 발돋움하며 4할이 넘는 도루저지율과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1998년 시즌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으면서 인천 야구와 박경완 모두 전성기를 맞았다.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과 함께 박경완은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연고지를 옮긴 현대 유니콘스에서 MVP·홈런왕·골든글러브를 차지하고, 포수 최초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한 그는 2003년 인천으로 돌아왔다.
SK 와이번스에서 박경완은 감독 김성근 표현대로 “전력의 반”이었다. 그의 등번호 '26번'은 인천 프로야구 유일무이한 영구결번이 됐다. 박경완의 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WAR)는 67.63(스탯티즈 기준)으로, 역대 포수 가운데 1위다. 허구연 KBO 총재는 지난해 저서 '그라운드는 패배를 모른다'에서 “박경완은 포수로서의 리드, 타자 대처 능력, 포구 능력, 센스 등에서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다”며 “공수 양면에서 그를 능가할 포수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포수 박경완] “숱한 우승·영구결번 뜻깊은 선물 받아”
“수비 가장 중요시…투수 성장 책임감"
“포수로 2000경기 못 채워 아쉬움 남아"
“도루 저지·타자와 수싸움 자부심 느껴”
1995년 무렵 어느 날 박경완은 차를 몰고 가다가 길을 잃었다. “고속도로에서 반대쪽으로 가는 바람에 인천 방향으로 접어들었는데, 포근한 느낌이 들었어요. 친구한테 '나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길이 좋아 보여'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나 박경완(사진)은 인천 연고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됐고,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영구결번 선수가 됐다. 지난달 14일 제물포고 야구부 훈련장에서 인스트럭터로 활동 중인 박경완을 만났다.
▲인천에서 유일한 영구결번이다.
-팀을 옮기면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2006년 은퇴를 고민하기도 했고, 2009년 부상을 겪었지만 고된 훈련 끝에 성적을 냈기 때문에 야구가 재밌었다. 선수와 코치로 SK 와이번스에서 네 번 우승하면서 영구결번이라는 뜻깊은 선물도 받았다.
▲홈런왕 2회, 골든글러브 4회뿐 아니라 통산 포수 최다 홈런, 리그 최초 4연타석 홈런, 포수 최초 40홈런 등의 기록을 쌓았다.
-공격은 내세울 만한 기록이 없다고 생각한다. 제일 중요하게 여긴 건 수비다. 4타수 무안타였어도 팀이 이기고, 투수들이 승리·홀드·세이브를 챙겼으면 그걸로 만족했다. 30대부터는 투수들이 성장하는 데 책임감을 느꼈고, 경기 출장에 의미를 가졌다.
▲통산 2043경기를 뛰었다.
-포수로 1990경기를 나섰다. 국내에선 포수 2000경기 출장 기록이 없었고, 메이저리그에서도 드물다. 10경기를 끝내 채우지 못했다. 지금도 10경기만 포수 마스크를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어떤 포수였다고 생각하는지.
-도루 저지도 자부심이 있었지만 블로킹을 우선시했다. 그래야 투수가 마음놓고 던질 수 있다. 자신감 있었던 건 수싸움이었다. 타자가 걸어오는 모습만 봐도 '초구 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 타자를 분석해서 구속·볼카운트 대응을 머리에 저장했다. 3연전 첫 타석에서 어떤 공을 쳤는지를 기억하면서 수싸움을 벌였다. 야구는 확률 싸움이다. 10번 붙어서 6번 이기면 된다.
/글·사진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어떻게 선정했나
인천일보는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과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를 선정했다. 투수 3명(우완·좌완·구원)과 포수, 내야수(4명), 외야수(3명), 지명타자 등 총 12명이다.
올스타 후보는 42명이 추려졌다. 인천 연고팀에서 3년 이상 활동한 선수 가운데 KBO 공식 시상식과 골든글러브 수상자, 올스타전 베스트 멤버를 기준으로 삼았다. 국가대표로 각종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도 목록에 올랐다. 2000년대 이전에는 프로 선수들의 국가대표 출전이 불가능했던 점을 고려해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구성됐던 한일 슈퍼게임 멤버도 반영했다. 2002년 SK 와이번스가 선정한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도 포함했다. 투수 포지션의 경우, 인천 연고팀에서 500이닝 이상 투구한 선수 가운데 선정 요건을 충족한 후보들로 올스타를 뽑았다.
5월18일부터 6월22일까지 진행된 투표에는 야구인 40명이 참여했다. 특정 시기에 몰리지 않도록 20대(5명), 30대(10명), 40대(10명), 50대(10명), 60대 이상(5명) 등 세대별로 배분했다. 20대는 SSG 랜더스 현역 가운데 인천 출신 선수로 한정했고, 30대는 인천 출신이거나 인천 연고팀 3년 이상 활동 선수로 추렸다. 공정한 투표를 기하기 위해 올스타 후보는 투표인단에서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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