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야구도시의 뿌리]
9회초-고교야구 전성시대

●인천고
한 세기 넘게 명맥 이어온 인천지역 최장수팀
유일무이 '100주년 대회' 우승 고교 왕중왕에
1950·1970년대 휩쓸어…2020년 봉황기 왕좌

●동산고
사상 최초 청룡기 3연패…우승깃발 영구 소장
정민태·위재영·류현진 등 '특급 에이스' 배출
2016년 대통령배 제패 '야구 명문고' 전통 계승

●제물포고
1980년대 옛 웃터골 자리서 탄생한 신흥강자
2009~2010년 미추홀기 대회 2연속 정상 등극
프로선수 꾸준히 배출 '인재 등용문' 역할 톡톡

야구도시의 뿌리는 학생 야구였다.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용단’ 야구는 시대를 대변했다. 해방 이후 도시 대항 야구와 학생 야구가 전부였던 시절, 인천고와 동산고는 야구의 대명사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는 1950년대 인천을 떠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구도는 인천으로 통했고, 인천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 2020년 11월2일 봉황기 우승을 차지한 인천고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사진제공=인천고
▲ 2020년 11월2일 봉황기 우승을 차지한 인천고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사진제공=인천고

 

'고교야구 왕중왕' 인천고

2005년 4월1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인천고와 부산고가 맞붙었다. '한국야구 100주년 기념 최우수고교 야구대회' 결승전, 고교야구 왕중왕을 가리는 역사상 유일무이한 대회에서 인천고는 신일고·광주동성고·광주일고를 차례로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이재원(SSG 랜더스)이 포수 마스크를 쓰고, 김재환(두산 베어스)·이명기(NC 다이노스)가 타선에서 활약한 인천고는 부산고를 2대 0으로 꺾었다. 2004년 대통령배에 이어 2년 연속 전국 제패로 인천 고교야구 부흥을 이끌었던 양후승(61) 전 감독은 “모교 감독을 맡아 어깨가 무거웠지만, 후배들에게 추억을 안겨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교야구 왕중왕'에 오른 인천고 야구부는 한 세기가 넘게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고시엔' 그라운드를 밟았던 김선웅이 해방 이후 인천고 야구부를 재건하면서 1950년대 초반 첫 번째 전성기를 맞았다. 전설의 에이스 서동준과 유격수 김진영이 전국 무대를 주름잡으며 '무적함대'로 떠올랐다. 1953년 청룡기 우승을 비롯해 고교야구 모든 대회를 휩쓸었다. 이듬해에도 청룡기를 2연패하고, 황금사자기를 품에 안았다. 1952년부터 3년 연속 전국체전 우승도 차지했다. 성인 무대를 제패한 '전인천군'과 더불어 '구도'와 '인천'을 등식화한 계기였다.

인천고는 1970년대 후반 다시 고교야구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에이스 계보를 이은 투수 최계훈이 등장하면서다. 1학년부터 마운드를 지킨 최계훈은 인천고를 연이어 전국 대회 결승으로 이끌었다. 유일한 아쉬움은 항상 마지막 경기였다. 1977년 황금사자기, 1979년 봉황기 결승에서 인천고는 고배를 마셨다. 특히 1979년 최강 전력으로 평가받았던 인천고는 전국 대회에서 네 차례 결승에 올라 모두 준우승에 그쳤다.

▲ 1989년 9월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한 인천고 선수들에게 재학생과 동문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89년 9월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한 인천고 선수들에게 재학생과 동문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인천고는 1989년 황금사자기를 차지하며 10년 만에 '준우승 징크스'에서 탈출했다. 2004년 대통령배에 이어 2020년에는 마침내 봉황기 우승을 이뤘다. 고교야구 4대 대회에서 모두 정상을 밟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것이다. 10년째 지휘봉을 잡고 있는 계기범(52) 감독은 “가장 오래된 야구부이고, 선배들이 많은 업적을 이뤘다”며 “구도 인천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선수들을 발굴하고 키우겠다”고 말했다.

 

▲ 10년째 인천고 야구부를 이끌고 있는 계기범 감독.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 10년째 인천고 야구부를 이끌고 있는 계기범 감독.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청룡기 영구 소장' 동산고

1957년 7월1일 동산고와 인천고는 2년 만에 청룡기 결승에서 마주했다. 그 무렵 고교야구 주인공은 인천이었다. 청룡기에서 1953년부터 2년간 인천고, 1955년부터 2년간 동산고가 정상을 차지했다. 1957년 결승은 최강자를 가리는 승부나 다름없었다.

1회에 2점을 선취한 동산고 마운드에는 '초고교급 투수' 신인식이 있었다. 한 해 전 결승에서 노히트노런 대기록을 수립했던 신인식의 강속구가 지배한 경기는 3대 1로 끝났다. 조선일보는 1957년 7월2일자에서 “신인식 투수가 특히 연달은 호투를 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음에 다대한 공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사상 최초로 3연속 우승을 일군 동산고는 청룡기를 영구 소장하고 있다.

야구부를 창단하고 전성기를 열었던 '동산 야구의 선구자' 박현덕 감독 지휘 아래 동산고는 1956년 전관왕에 올랐다. 이듬해에도 청룡기에 이어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했다. 1959년에는 신인식의 대를 이은 에이스 고순선을 앞세워 청룡기를 되찾았다. 구도에도, 동산고에도 찬란했던 시기였다.

▲ 1988년 황금사자기 우승 직후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동산고 선수단./사진제공=동산고
▲ 1988년 황금사자기 우승 직후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동산고 선수단./사진제공=동산고
▲ 1989년 봉황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동산고 투수 위재영이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고 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89년 봉황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동산고 투수 위재영이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고 있다./인천일보 필름 자료

30여년이 흘러 두 번째 전성기가 찾아왔다. 정민태가 활약하며 정상급 전력으로 받돋움한 동산고에 1988년 위재영이 입학했다. 1학년 때 황금사자기 우승을 견인한 위재영은 이듬해 최우수선수상과 최우수투수상을 독차지하며 청룡기 우승을 이끌었다. 최고 154㎞ 구속을 기록했던 1990년에는 화랑기를 품에 안으며 선배 신인식처럼 3년 내내 우승기를 동산고에 선물했다. 당시 지휘봉을 잡았던 김학용(70) 전 감독은 “세계청소년대회에서 쿠바를 잡은 투수였다. 제구력도 대한민국 최고였다”며 “그때는 우승하면 시민환영대회가 열릴 만큼 열기가 뜨거웠다”고 말했다.

▲ 동산고 선수들이 2016년 7월31일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동산고
▲ 동산고 선수들이 2016년 7월31일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동산고
▲ 올해부터 모교인 동산고 야구부 지휘봉을 잡은 이양기 감독.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 올해부터 모교인 동산고 야구부 지휘봉을 잡은 이양기 감독.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동산고는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이 에이스로 활약했던 2005년 청룡기 우승을 다시 거머쥐었다. 2016년에는 대통령배에서 정상에 오르며 '야구 명문' 전통을 계승했다. 프로야구 최정상급 내야수로 성장한 김혜성(키움 히어로즈)이 당시 수훈상을 받았다. 대통령배 우승으로 동산고는 고교야구 4대 대회를 석권했다. 올해 취임한 이양기(42) 감독은 “모교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싶다는 꿈을 이룬 만큼 책임감도 크다”며 “선수들과 '우리는 강하다' 구호를 외치며 자부심을 되새기고 있다”고 말했다.

 

▲ 2010년 8월27일 송도LNG야구장에서 열린 제8회 미추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확정한 제물포고 선수들이 기쁨을 나누고 있다./인천일보DB
▲ 2010년 8월27일 송도LNG야구장에서 열린 제8회 미추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확정한 제물포고 선수들이 기쁨을 나누고 있다./인천일보DB

 

'인재 등용문' 제물포고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인천 야구의 터전이었던 웃터골에서 다시 야구가 시작됐다. 인천고·동산고 라이벌전이나 마찬가지였던 인천 고교야구에 제물포고가 가세했다. 1950년대 인천공고(현 인천기계공고), 1960년대 동인천고에 이어 1976년 창단한 인천체고가 야구부 명맥을 유지했지만 양강 구도에 균열을 내진 못했을 때였다. 제물포고는 등장하자마자 다크호스로 급부상했다. 창단 2년 만인 1984년 청룡기 인천지역 예선에서 인천고·동산고·인천체고를 연이어 꺾고 본선 무대에 진출했다. 에이스 허정욱을 중심으로 강호 충암고와 대전고를 누르고 결승까지 올랐다. 신생팀 돌풍뿐 아니라 재학생과 동문 등 3500여명이 벌인 응원전은 연일 화제였다. 결승에서 군산상고에 3대 5로 지며 우승을 놓쳤지만, 인천에 야구 열기를 다시 불붙이기엔 충분했다.

제물포고는 1999년 부산에서 열린 화랑기에서 부산공고·부산고·부산상고(현 개성고)를 잇따라 물리치며 우승했다. 창단 17년 만에 무관의 한을 푼 순간이었다. 제물포고는 인천일보가 주최한 전국 대회였던 미추홀기에서도 2009년부터 2년 연속 정상에 올랐다. 2010년에는 26년 만에 청룡기 결승에 진출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 올해 제물포고 야구부 사령탑으로 취임한 강필선 감독.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 올해 제물포고 야구부 사령탑으로 취임한 강필선 감독.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제물포고는 4대 대회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프로야구 선수를 꾸준히 배출하며 인재 등용문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올 초 사령탑에 오른 강필선(51) 감독은 “프로야구 지도자 출신들로 코칭스태프를 꾸렸다”며 “선수들 기량이 좋아지고 팀 분위기도 살아나는 모습이 보인다”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국내 유일 섬마을 야구부, 유쾌한 도전 '플레이볼'
'인천 고교야구 막내' 덕적고

폐교 위기 극복·지역 유망주 진학 고민 해결
창단 직후 황금사자기 16강 진출 성과 달성
장광호 감독 “내년엔 더 달라진 모습 보일 것”

▲ 지난해 11월16일 인천시장기 야구대회에 참가한 덕적고 야구부가 첫 번째 공식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 지난해 11월16일 인천시장기 야구대회에 참가한 덕적고 야구부가 첫 번째 공식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 지난해 11월16일 인천시장기 야구대회에 참가한 덕적고 야구부가 첫 번째 공식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 지난해 11월16일 인천시장기 야구대회에 참가한 덕적고 야구부가 첫 번째 공식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황금사자기 2회전이 열린 지난 5월22일 서울 신월야구공원, '섬마을 야구부'의 첫 승은 기적처럼 찾아왔다.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덕적고는 경민IT고를 상대로 2회초 2점을 먼저 내줬지만, 곧바로 3점을 뽑아내며 역전했다. 경기 초반 앞서다가 뒷심이 부족했던 징크스도 떨쳤다. 덕적고는 6회말과 8회말 추가점을 올리며 7대 2로 승리를 거뒀다. 공식 경기 첫 승, 그리고 창단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전국 대회 16강 진출을 이룬 순간이었다. 장광호(56) 감독은 “올해 목표를 16강으로 잡았는데, 처음 진출한 전국 대회에서 첫 승과 함께 16강에 올랐다”며 “천운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 장광호 덕적고 감독.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 장광호 덕적고 감독.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국내 유일 섬마을 야구부로 주목받은 덕적고는 전교생이 14명으로 줄어 폐교 위기에 몰린 학교였다. 지난해 야구부원들이 들어오면서 정상 수업이 가능해졌고, 학교는 활기를 되찾았다. 덕적도행 배에 몸을 실은 야구부 선수는 31명으로 늘었다.

덕적고 야구부가 창단하면서 인천 아마야구에도 숨통이 트였다. 인천에 고교 야구부가 생긴 건 1982년 제물포고 이후 40년 만이었다. 3개뿐인 고교 야구부에 자리가 없어서 다른 지역으로 진학해야 했던 중학생들 고민도 덜었다.

전학생과 신입생으로 출발했던 덕적고 야구부는 이제 '기적'이 아닌 '희망'을 이야기한다. 장 감독은 “덕적도에 아직 정식 야구장이 없고, 연습 경기를 하려면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은 있다”면서도 “내년에 입학할 12명 선발을 마쳤다. 선수들 만족도가 높고, 학교 응원 열기도 뜨겁기 때문에 내년부터는 달라진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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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를 신흥 명문 구단으로 도약시킨 좌타자들의 활약은 '인천 SK' 구호가 물결을 이룬 문학구장에서 한국시리즈의 첫 번째 페이지를 열었다. 외야수-'국민 우익수' 이진영2003년 10월19일 한국시리즈 3차전이 열린 문학구장은 3만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외야수-박재홍·김강민'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등장한 '괴물 신인' 박재홍(49)은 인천 연고팀은 물론, 프로야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 첫해 신인으로 지명한 김강민(40)은 공수주에서 꾸준한 기량을 과시하며 프로야구 최장 '원클럽맨'이 됐다. 두 선수가 한솥밥을 먹었던 시절, SK 와이번스는 '왕조'로 불렸다. 인천 야구장을 주름잡은 '괴물'과 '짐승'의 출현은 프로야구 판도마저 뒤흔들었다. 외야수-'호타준족' 박재홍1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2루수-정근우' '유격수-박진만' 2008년 여름 박진만(46)과 정근우(40)는 태극마크를 품에 안고 짐을 꾸렸다. 출발지는 달랐지만 목적지는 같았다. 결말은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이었다.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는 2011년 시즌부터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함께 입었다. 역대 최강 내야 수비진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2루수-'악마 2루수' 정근우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 캐나다와의 경기에 정근우가 2루수로 나섰다. 앞서 미국과의 경기에선 9회말 대타로 나와 2루타를 때렸고, 득점까지 기록하며 역전승의 디딤돌을 놨다. 캐나다전 1회부터 안타와 도루를 기록한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1루수-김경기' '3루수-최정' '짠물야구'는 점수를 적게 주는 투수진만을 가리키는 표현은 아니었다. '물방망이'는 인천 야구의 고민거리였다.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김경기(54)와 최정(35)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입단했다. 인천 야구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루수-'미스터 인천' 김경기1994년 인천 야구팬 눈길은 김경기가 쓴 헬멧으로 향했다. 팀타율 꼴찌 타선에서 그가 홈런을 칠 때마다 헬멧에는 하트 모양 스티커가 하나씩 늘었다. 그해 9월15일 플레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구원투수-조웅천' '포수-박경완' 태평양 돌핀스 돌풍과 현대 유니콘스 우승의 원동력은 '투수왕국'이었다. SK 와이번스는 '벌떼 마운드'로 왕조 시대를 열었다. 투수왕국과 벌떼 마운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20년간 '인천의 허리'로 마운드를 지탱한 조웅천(51)과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공수겸장' 박경완(50)이다. 구원투수-'인천의 허리' 조웅천1994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태평양 돌핀스는 이듬해 7위로 고꾸라졌다. 선발진이 무너질 때마다 중간계투로 나선 사이드암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우완선발-정민태' '좌완선발-김광현' 프로야구 40년은 별들의 역사였다. '슈퍼스타즈'가 쏘아 올린 공은 인천에도 수많은 별들의 발자취를 남겼다.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통틀어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를 뽑았다. 이른바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다. 12명의 올스타를 선정한 설문조사는 세대별로 추린 인천 야구인 40명을 대상으로 했다. 인천일보는 '구도 인천' 2회부터 4회까지 매주 4명씩 인천 그라운드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냈던 전설들을 소환한다. 인천 야구팬이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법한 '드림팀'이다. 그리고 & [구도 인천] 슈퍼스타 등장부터 랜더스까지…눈물·환희 뒤섞인 '굴곡의 세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2년 7월17일, 인천공설운동장(숭의종합운동장·도원구장)에서 프로야구 첫 경기가 열렸다. 그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야구장 보수 공사로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기리그 홈 경기를 춘천에서 치렀다. 인천시민 앞에 첫선을 보인 경기 상대는 서울 연고 MBC 청룡.결과는 4대 10으로 대패였다. 삼미 슈퍼스타즈 후기리그 성적은 0승6패가 됐다. '구도'라는 자부심을 가진 관중들에게 낯선 야구였다. 그때부터 인천 프로야구단에는 반복되는 꼴찌와 구단 매각이라는 비운이 계속됐다. 40년 세월은 야속 [구도 인천] 100년 전 웃터골의 열기, 100년 후 연안부두 함성으로 1982년 프로야구가 첫발을 내디뎠다. '삼미 슈퍼스타즈'로 출발한 인천 프로야구도 40년을 맞았다.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를 거쳐 'SSG 랜더스'에 이른 인천 연고팀은 유난히 부침을 겪었다. '왕조'의 시절도 누렸다. 인천사람들에게 프로야구는 눈물이자, 환희였다.인천은 일찍이 '야구도시'였다. 100여년 전 웃터골은 야구의 성지였고, '한용단'은 울분 [구도 인천] 구도의 산증인들…채병용 코치·배수현 치어리더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