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球都 仁川) 1회말 - 프로야구팀 변천사

▲'위대한 꼴찌' 삼미 슈퍼스타즈
1982년 창단 인천 연고 최초 프로야구팀
KBO리그 최저 승률·최다 연패 기록 비운

▲'짧았던 인연' 청보 핀토스
단일시즌 최저 팀타율 등 약체 이미지 여전
등장 2년 반 만에 매각…역대 최단명 구단

▲'돌고래의 꿈' 태평양 돌핀스
사상 첫 가을야구·한국시리즈 경험 선사
1994년 정명원·김경기 활약 속 정상 문턱

▲'애증의 이름' 현대 유니콘스
1998년 압도적 성적 인천팀 첫 우승 영광
서울행 조건 인천 등지며 연고 이전 '상처'

▲'왕조의 추억' SK 와이번스
2007·2008·2010·2018년 리그 챔피언
6년 연속 KS 진출 등 성적·흥행 '전성기'

▲'새로운 시작' SSG 랜더스
2021년 시작 2년차…인천구단 역사 계승
추신수·김광현 합류 등 적극 마케팅 눈길
▲ ① 1983년 8월 인천 홈경기에서 삼미 슈퍼스타즈가 득점하고 있다.② 1985년 11월 청보 핀토스 선수들이 체력단련장에서 훈련하고 있다.③ 1994년 시즌 홈런을 치고 들어오는 태평양 돌핀스 김경기를 윤덕규가 축하해주고 있다.④ 1994년 시즌 태평양 돌핀스 선수들이 잠실 OB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뒤 기쁨을 나누고 있다.⑤ 1998년 10월22일 인천공설운동장에 모인 현대 유니콘스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필승을 결의하고 있다.⑥ 1998년 10월23일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 몰린 인파.⑦ 2003년 10월12일 문학구장에서 플레이오프 3차전을 이긴 SK 와이번스 선수들이 우승을 다짐하고 있다.⑧ 2008년 10월31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재홍과 박경완.⑨ 2021년 4월4일 인천SSG랜더스필드에서 열린 개막전에 등장한 '구도 인천(球都 仁川)' 깃발.⑩ 2018년 11월12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승리, 우승을 차지한 SK 와이번스 김광현이 양팔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사진제공=인천일보 필름 자료·태평양 돌핀스 1995년 팬북·SSG 랜더스 유튜브 캡쳐·연합뉴스
▲ ① 1983년 8월 인천 홈경기에서 삼미 슈퍼스타즈가 득점하고 있다.② 1985년 11월 청보 핀토스 선수들이 체력단련장에서 훈련하고 있다.③ 1994년 시즌 홈런을 치고 들어오는 태평양 돌핀스 김경기를 윤덕규가 축하해주고 있다.④ 1994년 시즌 태평양 돌핀스 선수들이 잠실 OB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뒤 기쁨을 나누고 있다.⑤ 1998년 10월22일 인천공설운동장에 모인 현대 유니콘스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필승을 결의하고 있다.⑥ 1998년 10월23일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 몰린 인파.⑦ 2003년 10월12일 문학구장에서 플레이오프 3차전을 이긴 SK 와이번스 선수들이 우승을 다짐하고 있다.⑧ 2008년 10월31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재홍과 박경완.⑨ 2021년 4월4일 인천SSG랜더스필드에서 열린 개막전에 등장한 '구도 인천(球都 仁川)' 깃발.⑩ 2018년 11월12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승리, 우승을 차지한 SK 와이번스 김광현이 양팔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사진제공=인천일보 필름 자료·태평양 돌핀스 1995년 팬북·SSG 랜더스 유튜브 캡쳐·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2년 7월17일, 인천공설운동장(숭의종합운동장·도원구장)에서 프로야구 첫 경기가 열렸다. 그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야구장 보수 공사로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기리그 홈 경기를 춘천에서 치렀다. 인천시민 앞에 첫선을 보인 경기 상대는 서울 연고 MBC 청룡.

결과는 4대 10으로 대패였다. 삼미 슈퍼스타즈 후기리그 성적은 0승6패가 됐다. '구도'라는 자부심을 가진 관중들에게 낯선 야구였다. 그때부터 인천 프로야구단에는 반복되는 꼴찌와 구단 매각이라는 비운이 계속됐다. 40년 세월은 야속하지만은 않았다. 썰물 뒤에는 밀물이 들이쳤다. 구도의 시대도 다시 찾아왔다.

▲'도깨비팀' 슈퍼스타즈, '기록의 팀' 핀토스

▲1983년 8월 인천 홈경기에서 삼미 슈퍼스타즈가 득점하고 있다. /인천일보DB

“감독을 빼놓고는 스타가 없습니다.” 1982년 개막을 앞두고 코치 이선덕이 한 말이다. 초대 감독은 '한국의 베이브 루스' 박현식. 유일한 스타였던 그마저도 성적 부진으로 개막 한 달 만에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최종 성적은 15승65패. 1할8푼8리의 승률은 KBO리그 역대 최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듬해 삼미 슈퍼스타즈는 급격한 상승 곡선을 그린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거물급 투수 장명부가 입단했고,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임호균이 합류했다. 타선에선 '3할 타자' 양승관과 국가대표 김진우·정구선이 매서운 방망이를 휘둘렀다. 감독은 박현식과 함께 인천 야구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김진영이었다.

▲1985년 11월 청보 핀토스 선수들이 체력단련장에서 훈련하고 있다. /인천일보DB

하지만 전기리그 우승 문턱에서 감독이 심판과 충돌하며 구속되는 악재를 만났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다. 이듬해 다시 꼴찌로 추락한 삼미 슈퍼스타즈는 1985년 KBO 최다 연패 기록인 18연패에 빠졌다. 그해 전반기가 끝나고 삼미 슈퍼스타즈는 60억원 매각 대금이 오간 끝에 청보 핀토스로 바뀌었다.

청보 핀토스도 기록의 팀이었다. 현재 KBO 총재인 허구연은 1986년 시즌을 맞아 35세 나이에 최연소로 청보 핀토스 감독이 됐지만, 1년도 되지 않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해 팀타율 2할1푼9리는 삼미 슈퍼스타즈도 해내지 못한, 시즌 최저 팀타율이다. 청보 핀토스는 1987년 4월23일부터 인천에서 14경기를 내리 지면서 역대 홈경기 최다 연패도 기록했다.

청보 핀토스는 1987년 10월4일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빙그레 이글스와 연장 끝에 5대 3으로 역전승을 거뒀다. 이튿날 태평양화학이 50억원에 청보핀토스를 인수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2년 반 만에 퇴장한 청보 핀토스는 KBO 프로야구단 가운데 역사도 가장 짧다.

 

▲'돌풍' 돌핀스, '애증' 유니콘스

▲1994년 10월9일 인천공설운동장(도원구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홈런을 친 김경기가 동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자료=태평양 돌핀스 1995년 팬북

하위권을 전전했던 태평양 돌핀스가 마스코트였던 돌고래처럼 어쩌다 점프하던 때가 있었으니, 바로 1989년과 1994년이다. 오대산 극기훈련으로 불기 시작한 돌풍은 1989년 내내 프로야구에 휘몰아쳤다. 감독은 김성근이었다. 62승 가운데 40승을 합작한 '삼총사' 박정현·최창호·정명원은 선동열에 이어 평균자책점 2·3·4위에 오르며 '짠물야구'를 선보였다. 태평양 돌핀스는 박정현의 14회 완투와 김동기의 끝내기 홈런 등에 힘입어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플레이오프까지 올랐다. 인천 연고팀 사상 첫 '가을야구'였다.

돌고래가 다시 뛰어오른 건 1994년이었다. 역대 최초 40세이브를 기록한 정명원, 막판까지 홈런왕 경쟁을 벌인 김경기 등이 투타에서 활약했다. 꼴찌였다가 1년 만에 한국시리즈 진출팀으로 거듭났지만, LG 트윈스에 4연패하며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이듬해 인천 야구팬들은 470억원이라는 금액이 걸린 매각 소식을 들었다. 인수 기업은 굴지의 재벌, 현대였다.

▲1998년 10월22일 인천공설운동장(도원구장)에 모인 현대 유니콘스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필승을 결의하고 있다. /인천일보DB
▲1998년 10월22일 인천공설운동장(도원구장)에 모인 현대 유니콘스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필승을 결의하고 있다. /인천일보DB

'태풍 태평양, 돌풍 돌핀스'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로 바뀌었다. 현대 유니콘스는 1996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이어 1998년 압도적 성적으로 정규 시즌 1위에 올랐다. 선발투수 5명 모두 1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왕국'은 막강했고, 박경완·박재홍 등이 가세한 타선도 최강이었다. 김경기·최원호·박진만·김수경(인천고), 장광호·정민태·위재영(동산고) 등 인천 출신 선수들도 활약했다.

그해 10월30일 한국시리즈 6차전이 열린 인천구장, 9회초 관중석에선 '연안부두' 노래가 울려퍼졌다. 중견수 이숭용이 마지막 공을 잡은 순간, 에이스 정민태는 마운드에서 껑충껑충 뛰며 동료들을 끌어안았다. 인천 야구의 한이 풀린 순간이었다.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안긴 현대 유니콘스는 2000년 시즌을 앞두고 인천을 등졌다. '2년 뒤 서울 입성'을 조건으로 수원을 임시 연고지로 삼았다. 인천 야구팬들에겐 앞선 세 차례 매각보다도 갑작스러웠고, 상처도 큰 이별이었다.

▲1998년 10월23일 인천공설운동장(도원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 몰린 인파. /인천일보DB

▲'왕조' 와이번스, 랜더스 '새로운 시작'

▲2003년 10월12일 문학구장에서 플레이오프 3차전을 이긴 SK 와이번스 선수들이 “구도 인천의 명예를 빛내겠다”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다짐하고 있다. /인천일보DB

현대 유니콘스가 떠난 인천에는 SK 와이번스가 들어왔다. 해체한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들을 주축으로 창단한 팀이었다. 2002년 문학구장 개장으로 관중 수는 2000년 8만4563명의 5배에 가까운 40만2732명으로 늘었고, 2003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했지만 열기는 예전같지 않았다. 응원 구호로 '인천 SK'를 내걸고, 김경기·박경완·박재홍을 잇따라 영입했던 배경이다.

SK 와이번스는 2007년 정점에 올랐다. '태평양 돌풍'을 이끌었던 감독 김성근이 돌아왔고, 선수단은 신구 조화를 이루며 1위를 차지했다. '왕조'로 불리며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 3회 우승하는 위업을 이뤘다. 2012년 인천 프로야구단 사상 처음 시즌 관중 수 100만명도 돌파했다.

한국시리즈 2연패를 달성한 SK 와이번스가 2008년 11월8일 터미널사거리에서 오픈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인천일보DB
▲한국시리즈 2연패를 달성한 SK 와이번스가 2008년 11월8일 터미널사거리에서 오픈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인천일보DB

SK 와이번스는 2018년에도 극적인 승부를 연출하며 정상에 올랐지만, 지난해 1월 인천에는 또다시 야구단 매각 소식이 전해졌다. 신세계 이마트가 1352억8000만원에 인수하며 SSG 랜더스로 바뀌었다. 인천 야구 역사를 계승한 SSG 랜더스에는 메이저리거 추신수·김광현도 합류했다. 올시즌 SSG 랜더스는 1위를 달리며 가장 많은 관중 수를 기록하고 있다. 해설위원 박재홍은 “아픔이 많고, 팬들에게도 희비가 엇갈린 역사였다”며 “지역사회에서 구도에 걸맞은 분위기를 형성하면 인천 야구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2021년 4월4일 인천SSG랜더스필드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관중이 ‘구도 인천(球都 仁川)’이 적힌 깃발을 흔들고 있다. /인천일보DB

 

 


 

 

생명·인연·감사…전설들이 말하는 인천야구

▲1994년 시즌에서 홈런을 치고 들어오는 태평양 돌핀스 김경기를 윤덕규가 축하해주고 있다. /자료=태평양 돌핀스 1995년 팬북

'미스터 인천' 김경기(54)에게 인천 야구는 '생명'이다. '인천 야구의 대부'로 불리는 부친 김진영(1935~2020)이 일군 '구도 인천'은 그를 태어나게 했고, 태평양 돌핀스 4번 타자로서의 활약은 그를 살아 있게 했다. 김경기는 “인천에서 야구를 하지 않았으면 오늘날 내가 됐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라운드를 누볐던 선수들에게 인천 야구의 의미를 물었다. 포지션과 세대는 달라도 야구인들은 인천 야구를 마음속에 새겼다.

'호타준족'의 대명사인 박재홍(49)에게 인천 야구는 '같이 성장한 존재'다. 그는 “인천에서 젊을 때는 거침없이, 나이 들어선 편안하게 야구를 했다. 인천 프로야구도 만년 하위권이었다가 강팀으로 발돋움했다”고 말했다.

인천과 야구로 맺은 '인연'을 품고 살아가기도 한다. 태평양 돌핀스 좌완 에이스였던 최창호(56)는 “경북고를 졸업하고 연습생 테스트를 받으러 왔던 제물포고에서 코치를 하고 있다. 야구 선수로 사랑받은 인천과 인연이 많다”고 떠올렸다.

인천 프로야구단 유일 영구결번 주인공인 박경완(50)을 야구 선수로 '완성'시킨 곳도 인천이었다. 그는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인천에서 나의 모든 야구가 완성이 됐다”고 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국가대표이자, 프로야구 초창기 명투수였던 임호균(66)은 “아직까지도 야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인생이 야구에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런 인천 야구를 포수 김동기(59)는 '감사'하며 살아간다. 인천의 안방을 책임졌던 그는 “아직도 알아보는 분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도원구장 추억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라고 했다.

인천 야구는 누군가를 야구선수로 태어나게 했고, 누군가와는 같이 성장했으며, 또 누군가의 야구 인생을 꽃피우는 인연이 됐다. SK 와이번스 '왕조'의 주역이었던 박정권(41)은 “인천 야구의 일원이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고 말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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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기록' 장명부1985년 6월21일 인천구장은 4914명의 관중들로 채워졌다. 그해에도 어김없이 꼴찌에 머문 삼미 슈퍼스타즈 고별 경기였다. 마운드에 오른 장명부는 1회부터 8실 [구도 인천] 돌핀스 돌풍의 주역…정명원·최창호·박정현·김동기 1989년 인천 연고팀이 처음 가을야구에 등장했다. 잠자고 있던 구도의 야성도 깨어났다.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도원구장)은 1만3000석이 일찌감치 매진됐고, 입장하지 못한 극성팬들이 철탑에 오르는 소동도 벌어졌다. 2000원짜리 입장권이 2만원에 팔린 암표는 기승을 부렸다.준플레이오프 3경기 선발투수는 박정현·최창호·정명원이 차례로 나섰다. 나란히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그해 태평양 돌핀스가 올린 62승 가운데 40승을 책임진 삼총사였다. 프로야구 최초로 포수 전 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김동기도 변함없이 마스크를 썼다. 돌풍은 멈출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만년 꼴찌, 한을 풀다 20세기 인천 프로야구는 영욕의 시간들을 보냈다. 드물었던 기쁨 뒤에는 어김없이 슬픔이 찾아왔다. 연패에서 탈출하자마자 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환호한 순간 끝내기 패배를 마주했다. 인천 야구의 한을 푼 한국시리즈 우승 끝에는 또 다른 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5년 18연패와 청보 등장장명부의 초인적 활약에 힘입어 1983년 우승 후보로 떠올랐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듬해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도깨비팀'이라는 별명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였다.도깨비팀은 1985년 시즌 개막과 동시에 [구도 인천] 결정적 장면들…왕조의 탄생과 부활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응원가 '연안부두' 가사처럼 인천은 연고팀과 이별을 반복했다. 그래도 마음마다 설레게 하는 야구는 계속됐다. 오랜 기다림 끝에 환희의 순간도 마주했다. 가을의 이야기도 다시 시작됐다. 2000년 현대 연고지 이전2000년 3월16일 시범경기가 치러진 인천구장 분위기는 심상찮았다. 원정팀이 안타를 치면 환호가 터졌고, 현대 유니콘스에는 야유가 쏟아졌다. 그날 신문에는 현대 유니콘스는 서울, 신생 SK 야구단은 인천으로 연고지가 결정됐다는 기 [구도 인천] 근성과 감각, 명장의 조건…김진영·김재박 감독 감독과 대행 체제를 오가며 어수선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명장' 김진영(1935∼2020)의 존재였다.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그가 더그아웃에 앉아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성적으로 직결됐다. 명장이 떠나고 부침했던 사령탑은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남다른 감각을 지닌 김재박(68)의 등장으로 마침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감독을 맡은 그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의 오류도 증명했다. '인천 야구의 [구도 인천] 이기는 리더십, 우승의 조건…김성근·힐만·김원형 감독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연승과 연패를 거듭한다. 중요한 건 승패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선수단을 통솔하는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때도 바로 이 순간이다.22연승 신기록도 모자라 16연승을 내달린 팀이 있었다. 수염을 깎지 않은 감독의 징크스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 이면에는 “승리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여기며 안간힘을 쓴 집념이 있었다. 개막하자마자 6연패에 빠진 팀도 있었다. 야심차게 영입한 외국인 감독은 변함없이 운동장에 먼저 나와 ‘파이팅’을 외쳤다. 정답은 없었다. 두 [구도 인천] 웃터골에서 도원까지…인천야구 애환 품은 운동장 야구의 역사는 곧 운동장의 역사였다. 그라운드를 따라 이야기가 쌓였다. 인천 야구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웃터골과 인천야구장의 길은 엇갈렸다. 명맥이 끊겼던 웃터골에는 고교야구가 다시 숨을 불어넣었고, '구도 인천'을 일군 인천구장은 자취를 감췄다. 그라운드가 없으면 야구도 없었다. '100년 야구 역사의 발상지' 웃터골1921년 4월17일 인천 학생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한용단(漢勇團)'은 일본인 야구팀 '실업단'을 5대 1로 꺾었다. 같은 날 '미가도&# [구도 인천] 문학에서 랜필까지…인천팬 웃고 울린 ‘꿈의 극장’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 자락에 '꿈의 구장'이 터를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때는 2002년이었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는 축구를 비췄지만,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이라는 두 글자는 인천 야구와 동의어가 됐다. 또 다른 꿈의 구장은 '구도'의 기억도 소환했다. '꿈의 구장' 문학, '랜필'로 진화2002년 4월9일 인천 연고팀 역사상 한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이 세워졌다.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 경기에 입장한 관중 수는 2만7044명. [구도 인천] 구도의 영광 이끈 어린 영웅들, 인천야구 '주춧돌로 성장' 야구도시의 뿌리는 학생 야구였다.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용단’ 야구는 시대를 대변했다. 해방 이후 도시 대항 야구와 학생 야구가 전부였던 시절, 인천고와 동산고는 야구의 대명사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는 1950년대 인천을 떠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구도는 인천으로 통했고, 인천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고교야구 왕중왕' 인천고2005년 4월1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인천고와 부산고가 맞붙었다. '한국야구 100 [구도 인천] 구도의 미래 짊어진 새싹들, 마음껏 치고 던질 수 있어야 인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원 14명 가운데 졸업은 앞둔 6학년은 9명이다. 초등야구의 고민은 '선수 모집'이다. 정정호(38) 서화초 감독은 “리틀·유소년 야구단 출신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몰리니까 중학교 정원은 꽉 차는데, 초등 야구부는 대회 출전이 어려울 정도로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지난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지역 중학교로는 26년 만에 입상한 동인천중 야구부원은 42명이다. 중학야구의 고민은 '진학'이다. 송순석(40) 동인천중 감독은 “학년당 10명이 넘는데, 중학야구 팀은 클럽을 포함해 7 [구도 인천] 구도의 산증인들…채병용 코치·배수현 치어리더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