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완선발 '에이스의 품격' 정민태
동산고 출신…1998년 첫 우승 주역
1999년 '20세기 최후 20승 투수'에
마운드 아래선 막대한 중압감 감내
▲좌완선발 '대한민국 에이스' 김광현
데뷔 이듬해 MVP…국가대표 활약
연고 선수 최초 메이저리그 진출도
인천과 동고동락 '현재진행형 전설'
프로야구 40년은 별들의 역사였다. '슈퍼스타즈'가 쏘아 올린 공은 인천에도 수많은 별들의 발자취를 남겼다.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통틀어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를 뽑았다. 이른바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다. 12명의 올스타를 선정한 설문조사는 세대별로 추린 인천 야구인 40명을 대상으로 했다. 인천일보는 '구도 인천' 2회부터 4회까지 매주 4명씩 인천 그라운드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냈던 전설들을 소환한다. 인천 야구팬이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법한 '드림팀'이다. 그리고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에서 '인천' 두 글자를 빼더라도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만한 라인업이다.
인천 야구의 대명사처럼 굳어진 '짠물 야구'는 마운드에서 버틴 투수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리그를 지배한 에이스들의 활약은 굴곡진 세월을 지나 영광의 세월도 누리게 만들었다. 인천 프로야구는 1998년을 시작으로 10년 주기로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바로 그때 정민태(52)와 김광현(34)이 있었다.
우완선발-'20세기 마지막 20승' 정민태
2003년 10월25일 한국시리즈 7차전 마운드에 정민태가 올랐다. 1998년 인천 연고팀 첫 우승 때처럼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달라진 건 경기장 분위기였다. 정민태가 공을 던질 때마다 관중석에선 환호가 아닌 탄식이 터져 나왔다. 현대 유니콘스가 수원으로 연고지를 옮긴 뒤였다.
'인천 SK'를 앞세웠던 SK 와이번스의 행진도 거기서 끝났다. 리그 역사상 유일무이한 한국시리즈 7차전 완봉승이었다. 1차전과 4차전에 이어 3승을 따낸 정민태는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1998년에 이어 두 번째였다. 1998년 우승 배터리였다가 5년 만에 정민태를 적으로 마주했던 박경완은 “다양한 구질에 공이 빨랐고, 제구력도 좋았다. 역대 우완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투수”라고 말했다.
정민태가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우완선발 부문 주인공으로 뽑혔다. 인천 야구인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정민태는 26표를 얻어 프로야구 초창기 불멸의 기록을 남긴 장명부(12표)를 제쳤다.
“인천을 대표하는 우완투수”라는 투표인단 선정 이유처럼 구도의 부활은 정민태의 전성기와 함께 시작했다. 고교야구가 침체기였던 1980년대 중반에는 황금사자기 4강, 전국체전 준우승을 이끌며 동산고 야구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동산고 감독이었던 김학용은 “공에 힘이 있었고, 사인 내면 그대로 던질 만큼 제구도 좋았다”고 떠올렸다.
국가대표 에이스로 성장한 정민태는 1992년 고향팀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했지만,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재활 끝에 정민태가 진면목을 보인 건 1994년이었다.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5이닝을 무안타로 틀어막은 정민태는 인천구장을 가득 메우고도 준우승에 아쉬워한 팬들에게 위안거리였다.
정민태는 1996년 15승, 평균자책점 2.44를 기록하며 리그를 지배한 에이스로 거듭났다. 정민태는 그해부터 현대 유니콘스가 인천을 떠나기 직전 시즌인 1999년까지 해마다 200이닝을 넘게 던졌고, 4년간 65승을 거뒀다. 1999년에는 '20승 투수' 반열에 올랐다.
통산 124승, 골든글러브 3회 수상 기록을 남긴 정민태는 위풍당당했던 풍모와 달리 마운드 아래에선 에이스의 중압감을 짊어진 투수이기도 했다. 박경완은 “등판하는 날이면 물만 마셔도 게워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학창 시절부터 프로 무대까지 인천 마운드 기둥이었던 정민태는 2008년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은퇴식은 이듬해 8월 목동구장에서 열렸다. 2000년 현대 유니콘스 연고지 이전으로 떠나보낸 그를 인천 야구팬들은 다시 마주하지 못했다. SSG 랜더스 코치 이대진은 “동시대에 활동했는데 구위와 성적이 월등했다. 정말 좋은 공을 가진 선수였다”고 말했다.
좌완선발-'대한민국 에이스' 김광현
2007년 10월26일 한국시리즈 4차전 마운드에 김광현이 올랐다. 소년티가 남아 있던 그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번졌다. 누군가는 긴장으로, 누군가는 배짱으로 해석했을 미소였다. 한국시리즈 전적은 1승 2패로 SK 와이번스가 밀린 상황에서 상대 두산 베어스 선발은 다니엘 리오스. 그해 22승을 올렸고,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도 완봉승을 거둔 투수였다.
시즌 3승에 그쳤던 만 19세 투수는 150㎞가 넘는 직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로 상대 타선을 5회까지 노히트노런으로 막았다. 8회 원아웃까지 잡아내는 동안 피안타는 1개뿐이었고, 탈삼진 9개를 곁들였다. 한국시리즈 신인 최다 탈삼진 신기록이었다. 포수 마스크를 썼던 박경완은 “지금까지 받아봤던 김광현 공 가운데 베스트였다. 종속이 빨라서 공을 잡을 때 묵직함이 느껴졌고, 슬라이더를 던지면 방망이가 닿지 못할 만큼 꺾여 나갔다”고 떠올렸다. 감독 김성근은 당시 “SK에 큰 투수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에이스의 출현을 모두가 직감한 순간이었다.
김광현이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좌완선발 부문 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인천 야구인 40명 가운데 37명이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대표하는 좌완투수로 김광현을 택했다. “대한민국 에이스”, “비교 불가”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데뷔 이듬해인 2008년 김광현은 KBO 리그 MVP, 다승왕, 탈삼진왕을 석권했다. 2009년 평균자책점과 승률 1위를 차지했고, 2010년에도 다승왕에 올랐다. 스무살을 갓 넘긴 나이에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도 '일본 킬러'로 등극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인천 야구가 에이스라는 칭호와 김광현을 동일시하는 건 승승장구했던 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김광현은 2011년부터 어깨 부상에 시달리며 3년간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다시 10승 투수로 복귀했다. 2016년 시즌을 마치고 팔꿈치 수술로 재활을 거친 뒤에도, 다시 2점대 평균자책점과 함께 돌아왔다. 2018년 한국시리즈에선 150㎞ 중반에 이르는 강속구로 명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광현은 2020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인천 연고팀 선수로는 처음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시즌 단축과 부상 여파에도 2년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10승을 올렸다. 올해 SSG 랜더스 유니폼을 입고 국내 무대로 돌아온 그는 한층 노련해진 투구로 평균자책점 1위를 달리고 있다. 스무살의 나이에 리그를 들썩였을 때도, 산전수전을 겪고 리그를 호령하는 지금도 인천은 그를 '에이스'라고 부른다. SSG 랜더스 코치 조동화는 “현재진행형 대한민국 레전드 좌완”이라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어떻게 선정했나
인천일보는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과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를 선정했다. 투수 3명(우완·좌완·구원)과 포수, 내야수(4명), 외야수(3명), 지명타자 등 총 12명이다.
올스타 후보는 42명이 추려졌다. 인천 연고팀에서 3년 이상 활동한 선수 가운데 KBO 공식 시상식과 골든글러브 수상자, 올스타전 베스트 멤버를 기준으로 삼았다. 국가대표로 각종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도 목록에 올랐다. 2000년대 이전에는 프로 선수들의 국가대표 출전이 불가능했던 점을 고려해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구성됐던 한일 슈퍼게임 멤버도 반영했다. 2002년 SK 와이번스가 선정한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도 포함했다. 투수 포지션의 경우, 인천 연고팀에서 500이닝 이상 투구한 선수 가운데 선정 요건을 충족한 후보들로 올스타를 뽑았다.
5월18일부터 6월22일까지 진행된 투표에는 야구인 40명이 참여했다. 특정 시기에 몰리지 않도록 20대(5명), 30대(10명), 40대(10명), 50대(10명), 60대 이상(5명) 등 세대별로 배분했다. 20대는 SSG 랜더스 현역 가운데 인천 출신 선수로 한정했고, 30대는 인천 출신이거나 인천 연고팀 3년 이상 활동 선수로 추렸다. 공정한 투표를 기하기 위해 올스타 후보는 투표인단에서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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