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감독들의 희로애락]
7회초-근성과 감각, 명장의 조건

연안부두에 승리의 희망 싣고 왔다간 '특급 선장'

▲'인천 야구의 대부' 김진영
1983년 삼미 지휘봉 잡고 우승 경쟁
심판과 충돌 구속…동력 잃고 팀 부진
불같은 성격 '맹장' 제자들엔 '의리남'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
42세 때 유니콘스 창단 사령탑 부임
정석 추구 속 허를 찌르는 작전 귀재
1998년 연고팀 최초 우승 대업 달성

감독과 대행 체제를 오가며 어수선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명장' 김진영(1935∼2020)의 존재였다.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그가 더그아웃에 앉아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성적으로 직결됐다. 명장이 떠나고 부침했던 사령탑은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남다른 감각을 지닌 김재박(68)의 등장으로 마침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감독을 맡은 그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의 오류도 증명했다.

 

▲ 김진영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이 1983년 6월16일 인천구장에서 사복을 입은 채 MBC 청룡과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심판과의 충돌로 벌금형을 받았던 그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더그아웃에 앉지 못했고, 팀은 감독대행 체제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김진영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이 1983년 6월16일 인천구장에서 사복을 입은 채 MBC 청룡과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심판과의 충돌로 벌금형을 받았던 그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더그아웃에 앉지 못했고, 팀은 감독대행 체제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인천 야구의 대부' 김진영

“우승하고 싶은 팀은 내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다.”

1983년 시즌을 앞두고 삼미 슈퍼스타즈 지휘봉을 잡은 김진영 감독은 “우리는 작년의 삼미가 아니다”라며 출사표를 던졌다. 그의 엄포는 현실이 됐다. 프로야구 원년 1할대 승률로 꼴찌에 머물렀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초반부터 선두에 올라서며 6할대 승률을 기록했다. '삼미 우승 카운트다운' 기사가 나오고 이틀 뒤 운명의 그날이 찾아왔다.

▲ 김진영 감독이 심판과의 충돌로 구속된 직후였던 1983년 6월4일 삼미 슈퍼스타즈가 인천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경기하고 있다. 이날 삼미 슈퍼스타즈는 8대 3으로 승리했지만, 이후 패배를 거듭하며 선두 자리에서 내려왔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김진영 감독이 심판과의 충돌로 구속된 직후였던 1983년 6월4일 삼미 슈퍼스타즈가 인천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경기하고 있다. 이날 삼미 슈퍼스타즈는 8대 3으로 승리했지만, 이후 패배를 거듭하며 선두 자리에서 내려왔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그해 6월1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과의 경기에서 0대 1로 끌려가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8회초 2사 만루 기회를 맞았다. 적시타가 터지며 3루 주자에 이어 2루 주자 이선웅이 홈플레이트를 밟는 순간, 1루 주자 김진우가 3루에서 아웃됐다. 심판은 두 번째 득점을 인정하지 않았고, 1대 1로 이닝이 끝났다. 심판과 충돌한 김진영 감독은 이튿날 부산 경기 직후 더그아웃에서 구속됐다. 서슬 퍼런 신군부 시절, 하필이면 경기가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점도 악재였다.

열흘여 만에 풀려났지만 김진영 감독이 복귀한 건 그해 시즌이 끝나서였다. 선장을 잃은 삼미 슈퍼스타즈는 선두 다툼을 벌였던 해태 타이거즈와의 3연전을 모두 내주고 우승에서 멀어졌다.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 임호균은 “김진영 감독이 풀려난 뒤에도 지휘봉을 잡지 못했다. 구단에 항의하려고 선수단이 인천 경기를 보이콧한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며 “감독 공백으로 한국시리즈에 나가지 못했다. 인천 야구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는데 정말 아쉬웠던 순간”이라고 떠올렸다.

김진영은 1950년대 인천고 전성기를 이끌었고, 실업야구와 국가대표에서 활약하며 한국 야구 유격수 계보의 앞자리를 차지한 '슈퍼스타'였다. 은퇴 이후 국가대표 감독을 비롯해 18년간 아마야구 지도자 생활을 했다. 인하대 감독을 맡자마자 야구부 창단 5년 만인 1981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 패권을 차지했고, 이듬해 아마야구 정상을 가리는 백호기에서 대학팀 최초 우승을 이끈 '명장'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 시절에는 심판실로 가서 웃통을 벗고 항의할 만큼 불 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맹장'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였던 김재현은 “무서웠지만 뒤끝이 없고, 의리가 있었다. 연봉이 깎였을 때도 구단과 협의해서 성적 수당을 챙겨주셨을 정도”라고 기억했다.

1983년 이후에도 삼미 슈퍼스타즈와 김진영의 야구는 계속됐다. 꼴찌 추락과 구단 매각이라는 서글픈 운명도 함께했다. 청보 핀토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4위에 오른 1985년 후기리그를 끝으로 그는 인천 야구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김진영 감독의 아들로 대를 이은 인천 야구인 김경기는 “겉으로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유지하셨지만, 야구인들에겐 뭐든지 내주고 후배들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을 가졌던 정이 많은 분이었다”고 말했다.

 

▲ 1998년 10월30일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김재박 현대 유니콘스 감독이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8년 10월30일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김재박 현대 유니콘스 감독이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

1996년 10월1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1차전 마운드에는 현대 유니콘스 정민태와 한화 이글스 정민철이 올랐다. 에이스 맞대결 결과는 15대 0으로, 4위 현대 유니콘스의 완승이었다. 점수 차는 크게 벌어졌지만, 승부는 미묘하게 엇갈렸다. 1회초 1사 1·3루에서 1루 주자 박재홍이 도루를 시도하고, 포수가 2루로 송구하는 순간 3루 주자 김인호가 홈으로 파고들었다. 가을야구 첫 경기, 상대 에이스를 흔든 선취점이었다. 1대 0으로 살얼음판 승부가 계속되던 5회초 2사 3루에선 9번 타순에 윤덕규가 대타로 나왔고, 적시 2루타를 쳤다.

사흘 뒤 인천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초보 감독 김재박의 작전과 용병술은 빛을 발했다. 현대 유니콘스는 3회말 1사 1·3루에서 정규시즌 MVP 구대성이 등판하자 허를 찌른 하득인의 초구 스퀴즈 번트로 동점을 만들었다. 7회말 2사 1·2루에선 대타 윤덕규가 또다시 적시타를 터뜨리며 4대 2로 승리를 거뒀다.

▲ 1998년 10월30일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김재박(앞줄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현대 유니콘스 감독이 선수들과 기뻐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8년 10월30일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김재박(앞줄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현대 유니콘스 감독이 선수들과 기뻐하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선수 시절 야구 센스가 뛰어나 '그라운드의 여우'로 불린 김재박의 '감각야구'는 거침없었다. 그해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도 신들린 대타 작전으로 포스트시즌 최초 2패 후 3연승을 이끌어냈다. 1승 2패로 몰린 해태 타이거즈와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선 마무리 투수 정명원을 선발로 올리는 강수를 뒀다. 정명원은 KBO 역사상 유일한 포스트시즌 노히트노런 대기록을 수립했다. 인천 출신의 '영원한 야구기자' 이종남(1953∼2006)은 저서 '종횡무진 인천야구'(2005)에서 “김재박 감독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식으로 절대 정석을 존중했고, 필요한 상황에서는 상대방이 야비하고 잔인하다고 느낄 정도로 작전 구사와 선수 기용에 빈틈이 없었다”고 썼다.

김재박은 42세 나이로 현대 유니콘스 초대 감독에 올랐다. 창단 첫해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올린 배경에는 그의 통솔력이 있었다. 그해 '괴물신인'으로 데뷔했던 해설위원 박재홍은 “선수들이 편하게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 감독이었다”고 말했다.

▲ 1996년 3월27일 현대 유니콘스 초대 사령탑을 맡은 김재박(오른쪽) 감독이 인천구장에서 고사를 지내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 1996년 3월27일 현대 유니콘스 초대 사령탑을 맡은 김재박(오른쪽) 감독이 인천구장에서 고사를 지내고 있다. /인천일보 필름 자료

1992년 시즌을 끝으로 태평양 돌핀스에서 은퇴한 김재박은 수석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현대 유니콘스 지휘봉을 잡은 1996년부터 1999년까지 4년간 한국시리즈에 두 차례 진출했다. 1998년 인천 연고팀 첫 우승이라는 대업도 이뤘다. 현대 유니콘스는 2000년 연고지를 옮겼고, 김재박과 인천의 인연도 거기까지였다. 투수코치로 호흡을 맞췄던 김시진 KBO 경기운영위원은 “정석을 추구하면서도, 남들이 상상도 못하는 묘수를 끄집어내는 지도자였다”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40년간 20명…마무리는 조금씩 아쉬움

[구도를 거쳐간 감독들]

1980년대 성적 부진 → 자진사퇴 악순환

1990년대 박영길 - 정동진 - 김재박 계보

2000년 이후 호성적에도 대행체제 반복

인천 프로야구 40년 동안 감독대행을 합쳐 무려 20명이 지휘봉을 잡았다. 201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기고 떠난 트레이 힐만을 빼면 이별은 하나같이 쓸쓸했다.

1980년대 인천 프로야구 감독은 '독이 든 성배'가 아니라 '독배' 그 자체였다. 삼미 슈퍼스타즈 초대 감독 박현식이 시작이었다. '한국의 베이브 루스'로 불리며 국가대표 중심타자로 12년간 활약한 그는 인천 야구의 대명사였지만, 프로야구 원년 개막 한 달 만에 성적 부진으로 지휘봉을 내려놨다.

초대 감독이 연패로 사퇴하는 '평행이론'은 1980년대 내내 되풀이됐다. 1985년 시즌 도중 창단하면서 그해 나머지 경기를 김진영 감독이 이끌었던 청보 핀토스는 이듬해 해설위원 허구연을 최연소(34세) 감독으로 발탁했다. 당시 신기록인 개막 7연패에 이은 꼴찌 다툼 속에 강태정 수석코치가 감독직을 대행했다. 태평양 돌핀스 초대 감독으로 취임한 강태정 역시 1988년 시즌 개막 20일 만에 연패로 낙마했다.

1990년대는 혼란을 딛고 안정적 정권 교체를 이룬 시기였다. 1991년 태평양 돌핀스 사령탑에 오른 박영길 감독이 1년 만에 중도 하차했지만, 이듬해 취임한 정동진 감독은 1995년까지 4년간 지휘봉을 잡았다. 1994년 인천 연고팀 최초 한국시리즈 진출까지 이룬 그도 하위권 추락을 막지 못했고, 태평양 돌핀스와 함께 퇴장했다. 초대 사령탑의 사퇴 징크스를 끊은 김재박 감독은 현대 유니콘스 창단 이후 장기 집권했지만, 2000년 연고지 이전으로 악연을 피하지 못했다.

SK 와이번스 20년 역사에선 7명이 정식 감독으로 사령탑에 올랐다. 초대 감독 강병철에 이어 2003년부터 지휘봉을 잡은 조범현 감독은 4년 동안 두 차례 포스트시즌 진출로 팀이 신흥 명문으로 도약하는 데 초석을 다졌다.

'왕조' 시대를 구가한 SK 와이번스에서도 감독대행의 역사는 반복됐다. 2007년부터 팀을 이끈 김성근 감독이 2011년 8월 경질되면서 이만수 2군감독이 감독대행을 맡았다. 2020년 염경엽 감독은 건강 문제로 더그아웃을 비웠고, 박경완 수석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시즌이 마무리됐다.

김성근 감독 이후에는 재계약 사례도 없었다. 이만수(3년)·김용희(2년) 감독 모두 계약 기간을 채운 뒤 곧바로 지휘봉을 넘겼다. SK 와이번스 마지막 해를 보내고 염경엽 감독은 자진 사퇴했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야구기자 레너드 코페트는 저서 '야구란 무엇인가'에서 “대부분의 감독은 팀 승수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당장 대단한 극약 처방 효과를 가져오는 감독은 극히 드물다”고 썼다. 야구는 선수들이 했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감독들이 짊어진 40년이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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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망이'는 인천 야구의 고민거리였다.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김경기(54)와 최정(35)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입단했다. 인천 야구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루수-'미스터 인천' 김경기1994년 인천 야구팬 눈길은 김경기가 쓴 헬멧으로 향했다. 팀타율 꼴찌 타선에서 그가 홈런을 칠 때마다 헬멧에는 하트 모양 스티커가 하나씩 늘었다. 그해 9월15일 플레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구원투수-조웅천' '포수-박경완' 태평양 돌핀스 돌풍과 현대 유니콘스 우승의 원동력은 '투수왕국'이었다. SK 와이번스는 '벌떼 마운드'로 왕조 시대를 열었다. 투수왕국과 벌떼 마운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20년간 '인천의 허리'로 마운드를 지탱한 조웅천(51)과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공수겸장' 박경완(50)이다. 구원투수-'인천의 허리' 조웅천1994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태평양 돌핀스는 이듬해 7위로 고꾸라졌다. 선발진이 무너질 때마다 중간계투로 나선 사이드암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우완선발-정민태' '좌완선발-김광현' 프로야구 40년은 별들의 역사였다. '슈퍼스타즈'가 쏘아 올린 공은 인천에도 수많은 별들의 발자취를 남겼다.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통틀어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를 뽑았다. 이른바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다. 12명의 올스타를 선정한 설문조사는 세대별로 추린 인천 야구인 40명을 대상으로 했다. 인천일보는 '구도 인천' 2회부터 4회까지 매주 4명씩 인천 그라운드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냈던 전설들을 소환한다. 인천 야구팬이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법한 '드림팀'이다. 그리고 & [구도 인천] 슈퍼스타 등장부터 랜더스까지…눈물·환희 뒤섞인 '굴곡의 세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2년 7월17일, 인천공설운동장(숭의종합운동장·도원구장)에서 프로야구 첫 경기가 열렸다. 그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야구장 보수 공사로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기리그 홈 경기를 춘천에서 치렀다. 인천시민 앞에 첫선을 보인 경기 상대는 서울 연고 MBC 청룡.결과는 4대 10으로 대패였다. 삼미 슈퍼스타즈 후기리그 성적은 0승6패가 됐다. '구도'라는 자부심을 가진 관중들에게 낯선 야구였다. 그때부터 인천 프로야구단에는 반복되는 꼴찌와 구단 매각이라는 비운이 계속됐다. 40년 세월은 야속 [구도 인천] 100년 전 웃터골의 열기, 100년 후 연안부두 함성으로 1982년 프로야구가 첫발을 내디뎠다. '삼미 슈퍼스타즈'로 출발한 인천 프로야구도 40년을 맞았다.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를 거쳐 'SSG 랜더스'에 이른 인천 연고팀은 유난히 부침을 겪었다. '왕조'의 시절도 누렸다. 인천사람들에게 프로야구는 눈물이자, 환희였다.인천은 일찍이 '야구도시'였다. 100여년 전 웃터골은 야구의 성지였고, '한용단'은 울분 [구도 인천] 웃터골에서 도원까지…인천야구 애환 품은 운동장 야구의 역사는 곧 운동장의 역사였다. 그라운드를 따라 이야기가 쌓였다. 인천 야구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웃터골과 인천야구장의 길은 엇갈렸다. 명맥이 끊겼던 웃터골에는 고교야구가 다시 숨을 불어넣었고, '구도 인천'을 일군 인천구장은 자취를 감췄다. 그라운드가 없으면 야구도 없었다. '100년 야구 역사의 발상지' 웃터골1921년 4월17일 인천 학생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한용단(漢勇團)'은 일본인 야구팀 '실업단'을 5대 1로 꺾었다. 같은 날 '미가도&# [구도 인천] 문학에서 랜필까지…인천팬 웃고 울린 ‘꿈의 극장’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 자락에 '꿈의 구장'이 터를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때는 2002년이었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는 축구를 비췄지만,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문학'이라는 두 글자는 인천 야구와 동의어가 됐다. 또 다른 꿈의 구장은 '구도'의 기억도 소환했다. '꿈의 구장' 문학, '랜필'로 진화2002년 4월9일 인천 연고팀 역사상 한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이 세워졌다.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 경기에 입장한 관중 수는 2만7044명. [구도 인천] 구도의 영광 이끈 어린 영웅들, 인천야구 '주춧돌로 성장' 야구도시의 뿌리는 학생 야구였다. 일제강점기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용단’ 야구는 시대를 대변했다. 해방 이후 도시 대항 야구와 학생 야구가 전부였던 시절, 인천고와 동산고는 야구의 대명사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는 1950년대 인천을 떠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구도는 인천으로 통했고, 인천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고교야구 왕중왕' 인천고2005년 4월1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인천고와 부산고가 맞붙었다. '한국야구 100 [구도 인천] 구도의 미래 짊어진 새싹들, 마음껏 치고 던질 수 있어야 인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원 14명 가운데 졸업은 앞둔 6학년은 9명이다. 초등야구의 고민은 '선수 모집'이다. 정정호(38) 서화초 감독은 “리틀·유소년 야구단 출신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몰리니까 중학교 정원은 꽉 차는데, 초등 야구부는 대회 출전이 어려울 정도로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지난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지역 중학교로는 26년 만에 입상한 동인천중 야구부원은 42명이다. 중학야구의 고민은 '진학'이다. 송순석(40) 동인천중 감독은 “학년당 10명이 넘는데, 중학야구 팀은 클럽을 포함해 7 [구도 인천] 구도의 산증인들…채병용 코치·배수현 치어리더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