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인천-야구도시의 뿌리]
9회말-아마야구 살아나려면

선수 수급 어려움 '전통 명문' 서림초 해체 아픔
진학시 피라미드 구조…결석 허용일수 걸림돌
고교팀 4개·대학팀 1개 불과 과열 경쟁 불가피
프로야구 드래프트 지명 '바늘구멍 뚫기' 수준
지도자·심판 자격증 취득 지원 등 진로 넓혀야

 


 

▲ 정정호(오른쪽) 서화초 야구부 감독과 선수단.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인천 서화초등학교 야구부원 14명 가운데 졸업은 앞둔 6학년은 9명이다. 초등야구의 고민은 '선수 모집'이다. 정정호(38) 서화초 감독은 “리틀·유소년 야구단 출신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몰리니까 중학교 정원은 꽉 차는데, 초등 야구부는 대회 출전이 어려울 정도로 학생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지역 중학교로는 26년 만에 입상한 동인천중 야구부원은 42명이다. 중학야구의 고민은 '진학'이다. 송순석(40) 동인천중 감독은 “학년당 10명이 넘는데, 중학야구 팀은 클럽을 포함해 7개이고, 고교 야구부는 4개뿐이다. 다른 지역으로 진학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지난 7월21일 서화초 야구부 선수가 수업을 마치고 훈련을 준비하고 있다.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지난 7월21일 서화초 야구부 선수가 수업을 마치고 훈련을 준비하고 있다.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지난해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인천지역 고교 졸업생은 4명만이 지명받았다. 고교야구의 고민은 '진로'다. 계기범(52) 인천고 감독은 “목표는 모두 프로지만, 문이 너무 좁다. 대학 가는 것도 경쟁이 치열하다. 지명을 못 받으면 실패한 인생처럼 좌절하는 제자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인천 아마야구가 지닌 고민의 결은 제각각이지만 '불확실성'으로 압축된다. 앞날을 내다보기 어려운 야구판은 꿈나무가 자라기엔 척박한 토양이다.

 

▲ 지난해 인천 네 번째 고교야구 팀으로 창단한 덕적고 야구부.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선수 수급 불균형, 결석 허용일수 '발목'

인천 서림초 야구부는 올 초 해체했다. 1964년 제1회 '전국국민학교 야구대회'를 시작으로 2년 연속 우승했던 전통 명문 서림초 야구부가 문을 닫은 건 선수가 부족해서였다. 서림초를 졸업한 장광호(56) 덕적고 감독은 “선수가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며 “예전에도 해체 수순을 밟았다가 역사가 깊은 서림 야구가 없어지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해서 다시 만들었는데 선수를 모으지 못했다”고 말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에 등록된 인천 13세 이하부 야구팀은 8개다. 동막초·상인천초·서화초·숭의초·창영초·축현초 등 6개 학교 야구부와 남동구베이스볼클럽(BC)·서구유소년 등 클럽 2개 팀이 있다. 앞서 서흥초·석천초 야구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소년 야구 위기를 저출생, 원도심 인구 감소와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로만 돌리기도 어렵다. 미추홀구 도화동에 있는 서화초는 주변 지역 개발로 전교생 수가 1395명으로 늘었지만, 선수난은 마찬가지다. 정정호 감독은 “야구부원이 모자라서 선수 모집이 감독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됐다”고 했다.

야구부 선수난은 '클럽화'라는 과도기와도 맞물려 있다. 꿈나무들에게 리틀·유소년 야구단도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됐다. 엘리트 체육은 전환점에 서 있는데, 클럽 또한 뿌리가 단단하지 않다. 김홍집(51) 부평구리틀야구단 감독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선수가 네다섯 명으로 줄어들고, 코치도 없이 겨우 버텼다”고 말했다.

야구선수 길을 본격적으로 걷는 중학교부터는 경쟁이 시작된다. 초등 야구부와 리틀·유소년 선수들이 중학교에 진학하는 순간 피라미드 구조를 마주한다. 인천에서 야구부가 있는 4개 중학교(동산중·동인천중·상인천중·신흥중) 평균 인원은 42.5명이다. 3개 클럽까지 포함하면 해마다 80명 안팎의 졸업생이 4개뿐인 고등학교 야구부 진학에 뛰어든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야구부는 선수 수급에서 정반대 고민을 안고 있다. 불균형에 처한 아마야구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송순석 동인천중 야구부 감독.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야구부로 진학하려면 경쟁 끝에 실력을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 각종 대회에 참가해 실적을 내는 게 중요하지만, 출전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출석으로 인정되는 결석 허용일수 때문이다. 중학교 선수들의 결석 허용일수는 1년에 12일이다. 그 이상은 결석 처리된다. 송순석 동인천중 감독은 “제일 큰 걱정이 결석 허용일수”라고 했다. 승리와 상위 라운드 진출은 무단결석과 직결된다. 송 감독은 “대회가 방학 기간에만 열리지 않는다. 전반기에 결석 허용일수를 다 쓰면 여름방학 이후에는 대회도 참가할 수 없는데, 그마저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 인천 야구 한 세기 역사가 담긴 웃터골 운동장 자리에서 지난 7월9일 제물포고 야구부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다.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고교야구는 정체, 대학야구는 위기

지난해 덕적고 야구부가 창단하면서 인천 고교 야구부는 4개로 늘었다. 인천에서 고교 야구부 창단은 1982년 제물포고 이후 40년 만이었다. 장광호 덕적고 감독은 “제물포고 야구부가 생겼을 무렵 동산고를 다녔는데, 그때만 해도 경기도에는 고교 야구부가 심석종고 하나뿐이었다. 경기도에서 고교 야구부가 계속 늘어나는 동안 인천은 정체됐다. 인천 야구가 침체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소속 경기도 고교 야구부는 클럽을 포함해 총 21개다. 인천은 권역별로 조별 경기가 펼쳐지는 고교야구 주말리그에서 1개 조도 꾸리지 못해 '서울·인천권'에 포함된다. 계기범 인천고 감독은 “기량을 키울 수 있는 기회도 부족하다. 인천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회가 많이 열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야구부 학생들이 올라가는 피라미드 정점에는 졸업이 있다. 지난해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인천 고교 졸업생은 4명이 지명받았다. 최근 5년간으로 범위를 넓혀도 26명, 연평균 5.2명꼴이다. 해마다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10개 구단은 110명의 신인 선수를 선발한다. 강필선(51) 제물포고 감독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졸업생 등을 합쳐 신청자가 1000∼1200명 정도 된다. 전국 상위 5%에 드는 특출난 선수가 아니면 프로 진출이 어렵다”며 “그런 현실을 알면서도 신인 지명을 못 받으면 대학 진학도 접을 정도로 자포자기하는 학생이 많다”고 했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하는 선수들이 재도전하는 보편적 길은 대학 진학이다. 대학야구 선수로 뛰면 2년 또는 4년 뒤 신인 드래프트를 신청할 수 있다. 과거에는 대학으로 진학해 프로 무대를 밟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고교 졸업 후 프로에 직행하는 사례가 대세를 이룬다. 대학야구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대학 선수 의무 지명에 더해 올해부터 '얼리 드래프트(2학년 재학 중 드래프트 신청)' 제도가 시행되지만, 프로야구로 가는 문은 여전히 좁다.

▲ 정원배 인하대 야구부 감독. /사진제공=인하대

인천에서 대학 야구부도 인하대가 유일하다. 정원배(50) 인하대 감독은 “대학야구가 죽으면 야구 기반이 흔들린다”고 단언했다. 정 감독은 “프로 진출이 힘들다고 생각해 야구를 그만두는 학생이 계속 나온다”며 “대학에 진학해서 다양한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프로야구가 아니더라도 지도자·심판 자격증 취득 등을 통해 다른 진로를 열어주려고 독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늘구멍 같은 프로 도전이 학생들에게 야구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경로'일 때, 야구를 통한 선택지가 많아질 때 꿈나무가 늘어난다고 야구계는 공감한다. 일단 숨통을 트는 방안으로 독립야구가 주목받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지난해 독립야구단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던 이양기(42) 동산고 감독은 “신인 지명을 받지 못해도 계속 도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들이 설 자리가 없다”며 “실업야구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독립야구가 절실하다. 결론은 지원”이라고 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프라·지원 턱없이 부족…인천 독립야구 설 자리는

지선 기간 활성화 바람…선거 후 감감무소식
리그 운영·조례 제정 경기도와 상반된 행보
“인재 육성에 도움…지자체 나서는 방법 필요”

 

▲ 지난 7월21일 동산고 야구부 선수들이 연습 경기를 마치고 마무리 훈련을 하고 있다.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 지난 7월21일 동산고 야구부 선수들이 연습 경기를 마치고 마무리 훈련을 하고 있다.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

“야구는 인기 종목이지만, 독립야구는 비인기 종목이잖아요.”

임호균 한국독립야구위원회 대외협력위원장은 지자체와 독립야구 지원 문제를 협의할 때마다 이런 말을 되풀이한다. 실업야구가 실종된 야구계에서 독립야구는 프로야구 신인 지명을 받지 못한 학생들의 희망이나 다름없다. 임 위원장은 “야구부 졸업생들이 사회에 나와서 무엇을 할지를 그동안 기성세대는 고민하지 않았다”며 “특정 기업에 기대는 실업야구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축구 사례처럼 지자체가 지원하면서 다른 기회를 열어주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도는 2019년부터 청년들에게 재도전 기회를 주는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를 열고 있다. 6개 팀이 참여하는 리그 운영비와 출전 수당, 감독·코치 수당을 지원한다. 지난해 '경기도 독립야구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 제정으로 법적 근거도 마련했다. 올해까지 17명이 프로야구 선수가 됐다. 양승관 파주 챌린저스 단장은 “리그 비용을 지원받아도 구단 운영은 어려운 형편”이라면서도 “해마다 프로야구 선수를 배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시는 지난 7월11일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부산시체육회와 실업형 '시민야구단' 창단을 발표했다. KBSA는 야구단 창단, 부산시는 행정 지원, 부산시체육회는 기업 후원을 협력한다. 부산시 실업 야구단은 내년부터 KBSA리그에 참가할 예정이다.

구도 인천에서도 지방선거 국면을 통해 야구단 창단 논의가 활기를 띠었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후보 신분이던 지난 5월14일 인천야구발전위원회·한국독립야구위원회와 '인천 야구 발전을 위한 정책 협약'을 맺었다. 협약서에는 실업형 독립야구단 창단 촉진, 야구장 확충과 시설 개선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인천야구발전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학용 전 동산고 감독은 “프로야구밖에 없으니 야구 발전이 더디다. 야구단 창단은 인재 육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고 인천 야구 활성화 정책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시 체육진흥과 관계자는 “인천시장직 인수위원회 차원에서 독립야구단 지원 체계를 검토했지만 제도적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났다. 현재로선 야구단 창단이나 지원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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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망이'는 인천 야구의 고민거리였다.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김경기(54)와 최정(35)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입단했다. 인천 야구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루수-'미스터 인천' 김경기1994년 인천 야구팬 눈길은 김경기가 쓴 헬멧으로 향했다. 팀타율 꼴찌 타선에서 그가 홈런을 칠 때마다 헬멧에는 하트 모양 스티커가 하나씩 늘었다. 그해 9월15일 플레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구원투수-조웅천' '포수-박경완' 태평양 돌핀스 돌풍과 현대 유니콘스 우승의 원동력은 '투수왕국'이었다. SK 와이번스는 '벌떼 마운드'로 왕조 시대를 열었다. 투수왕국과 벌떼 마운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20년간 '인천의 허리'로 마운드를 지탱한 조웅천(51)과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공수겸장' 박경완(50)이다. 구원투수-'인천의 허리' 조웅천1994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태평양 돌핀스는 이듬해 7위로 고꾸라졌다. 선발진이 무너질 때마다 중간계투로 나선 사이드암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우완선발-정민태' '좌완선발-김광현' 프로야구 40년은 별들의 역사였다. '슈퍼스타즈'가 쏘아 올린 공은 인천에도 수많은 별들의 발자취를 남겼다.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통틀어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를 뽑았다. 이른바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다. 12명의 올스타를 선정한 설문조사는 세대별로 추린 인천 야구인 40명을 대상으로 했다. 인천일보는 '구도 인천' 2회부터 4회까지 매주 4명씩 인천 그라운드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냈던 전설들을 소환한다. 인천 야구팬이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법한 '드림팀'이다. 그리고 & [구도 인천] 슈퍼스타 등장부터 랜더스까지…눈물·환희 뒤섞인 '굴곡의 세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2년 7월17일, 인천공설운동장(숭의종합운동장·도원구장)에서 프로야구 첫 경기가 열렸다. 그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야구장 보수 공사로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기리그 홈 경기를 춘천에서 치렀다. 인천시민 앞에 첫선을 보인 경기 상대는 서울 연고 MBC 청룡.결과는 4대 10으로 대패였다. 삼미 슈퍼스타즈 후기리그 성적은 0승6패가 됐다. '구도'라는 자부심을 가진 관중들에게 낯선 야구였다. 그때부터 인천 프로야구단에는 반복되는 꼴찌와 구단 매각이라는 비운이 계속됐다. 40년 세월은 야속 [구도 인천] 100년 전 웃터골의 열기, 100년 후 연안부두 함성으로 1982년 프로야구가 첫발을 내디뎠다. '삼미 슈퍼스타즈'로 출발한 인천 프로야구도 40년을 맞았다.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를 거쳐 'SSG 랜더스'에 이른 인천 연고팀은 유난히 부침을 겪었다. '왕조'의 시절도 누렸다. 인천사람들에게 프로야구는 눈물이자, 환희였다.인천은 일찍이 '야구도시'였다. 100여년 전 웃터골은 야구의 성지였고, '한용단'은 울분 [구도 인천] 구도의 산증인들…채병용 코치·배수현 치어리더 오르는 일이 고되지 않을 리가 없다. 높은 위치에 서면 그만큼 책임감도 뒤따른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해 통산 451경기에 등판한 채병용(41)은 1336이닝 동안 마운드에 올랐다. 치어리더 배수현(39)은 20년간, 그러니까 인천 프로야구 역사에서 절반의 시간 동안 응원 단상에 올랐다. 전천후 보직을 자처한 채병용에게 야구는 '생존'이었고, 야구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배수현에게 야구는 '청춘'이었다.'구도 인천' 9회 연재를 마치고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야구에서 [구도 인천] 구도의 기록자들…김노천 사진가·김은식 작가 야구를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동안 공 하나하나가 쌓여 순위가 줄 세워지고, 각종 비율이 계산된다.숫자가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야구 서적을 펴낸 작가 김은식(50)이 야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돌핀스 유민'이 가진 추억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천 프로야구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김노천(57)에게 매일 천 번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야구장은 '평생직장'이었다.추억을 써내려간 김은식의 문장과 [구도 인천] 김광현 이전, 인천 마운드 지배했던 '원조 왼손 에이스' 퍼펙트 게임. 야구에서 투수가 9회까지 모든 타자를 아웃시키며 끝내는 경기다. 안타와 사사구는 물론 실책으로도 타자가 1루에 나가면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다. 퍼펙트 게임의 희소성은 숫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동안 투수 한 명이 안타와 점수를 내주지 않는 '노히트 노런'은 열네 차례 나왔지만, 퍼펙트 게임은 한 번도 없었다.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리그에서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이룬 투수가 있었다. 동산고 출신으로 1950년대 '구도 인천'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던 고순선(83)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