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야수 '리틀쿠바' 박재홍
데뷔하자마자 프로야구판 뒤집은 '괴물 신인'
최초 30-30·만장일치 신인왕 등 숱한 업적
유니콘스·와이번스 맹활약 수차례 우승컵
▲외야수 '짐승수비' 김강민
인천에서만 22년째 역대 최장기 '원클럽맨'
빠른 판단·강한 어깨 최고수준 수비력 과시
대기만성형 선수…올해도 나이 잊은 영향력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창단과 동시에 등장한 '괴물 신인' 박재홍(49)은 인천 연고팀은 물론, 프로야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 첫해 신인으로 지명한 김강민(40)은 공수주에서 꾸준한 기량을 과시하며 프로야구 최장 '원클럽맨'이 됐다. 두 선수가 한솥밥을 먹었던 시절, SK 와이번스는 '왕조'로 불렸다. 인천 야구장을 주름잡은 '괴물'과 '짐승'의 출현은 프로야구 판도마저 뒤흔들었다.
외야수-'호타준족' 박재홍
1996년 4월16일 현대 유니콘스 박재홍은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2회 첫 타석 홈런에 이어 5회 3루타, 6회 2루타를 쳤다. 사이클링히트까지 단타 하나만 남겨놓은 8회 마지막 타석에서 투수는 볼만 네 개를 던졌다. 대기록은 날아갔지만, 상대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기엔 충분했다. 프로에 데뷔한 지 고작 세 경기만이었다.
1996년 야구계는 박재홍의 일거수일투족으로 들썩였다. 75경기 만에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했고, 신인으로 처음 올스타 최다 득표 주인공이 됐다. 그해 9월3일 잠실구장 담장을 넘기며 프로야구 최초로 30홈런과 30도루를 동시에 달성했다. 데뷔 시즌 '30·30 클럽'에 가입한 선수는 미국에도, 일본에도 없었다. 전인미답의 고지에 오르며 홈런왕·타점왕을 차지한 박재홍은 역사상 유일한 만장일치 신인왕에 올랐다. 골든글러브 최다 득표도 그의 몫이었다.
프로야구 40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에서 박재홍은 외야수 후보 8명 가운데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총 3명(중복투표)을 선정한 외야수 부문에서 박재홍은 33표를 얻었다. “KBO 리그 최고 수준”, “공수주 겸비”, “최고의 공격력” 등의 설명은 그가 걸어온 길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신인 시절 활약은 서막에 불과했다. 박재홍은 이듬해 부상으로 한 달 넘게 결장하고도 3할2푼6리 타율에 27홈런·22도루로 골든글러브를 품에 안았다. 현대 유니콘스 코치였던 양승관은 “노림수가 워낙 좋았다. 악력도 대단한 선수였다”고 말했다.
1998년 30홈런·43도루를 기록한 박재홍은 한국시리즈 이틀 전 연습경기에서 발목을 접질렸지만, 진통제를 맞고 출장해 6경기 동안 안타 9개를 몰아쳤다. 2차전에선 한국시리즈 사상 최초 연속타자(백투백) 홈런 주인공이 됐고, 3차전에서도 쐐기포를 터뜨렸다. 인천 연고팀 첫 우승 주역이었다.
2000년 연고지를 옮긴 현대 유니콘스에서 3할대 타율에 32홈런·30도루·115타점·101득점으로 정점을 찍은 박재홍은 5년 뒤 인천으로 돌아왔다. SK 와이번스 톱타자를 맡아 여전한 존재감도 입증했다. 2005년 박재홍의 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WAR, 스탯티즈 기준)는 5.51로, 전체 국내 타자 가운데 가장 높았다. 2008년에도 3할대 타율(6위)과 4할대 출루율(2위), 5할대 장타율(3위)로 최정상급 기록을 남겼다.
프로야구에서 '호타'와 '준족'으로 이름을 떨친 선수들은 많았지만, 그에 필적할 만한 '호타준족'은 없었다. 2000년 박재홍 이후 20년 넘게 국내 타자 가운데 30·30 클럽 가입자는 나오지 않았다. 허구연 KBO 총재는 지난해 저서 '그라운드는 패배를 모른다'에서 “KBO리그가 메이저리그처럼 162경기였다면 리그 최초 40-40 클럽도 가능했던 선수가 박재홍”이라고 했다.
외야수-'짐승수비' 김강민
2018년 11월2일 플레이오프 5차전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연장으로 넘어갔다. 9대 10으로 SK 와이번스가 역전당한 10회말, 선두타자로 타격한 김강민은 공을 쳐다보며 방망이를 집어던졌다. 맞는 순간 홈런을 직감할 수 있는 타구였다.
김강민은 플레이오프 내내 1번타자·중견수를 맡았다. 1차전에선 경기 흐름을 가져오는 2점 홈런을 터뜨렸다. 2차전에서도 동점 적시타에 이어 역전 홈런을 때렸다. 프로야구 역사에 명승부로 남은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MVP는 김강민에게 돌아갔다. 한국시리즈 우승의 발판이 된 활약이었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인생 최고의 경기”라고 말했다.
인천 야구인 40명이 선정한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외야수 부문의 한 자리는 22년간 인천 외야를 물샐틈없이 지킨 김강민에게 돌아갔다. 김강민은 17표를 얻어 SSG 랜더스를 대표하는 '거포' 한유섬(15표), 삼미 슈퍼스타즈 간판타자이자 '강견'으로 명성을 떨친 양승관(9표)을 앞섰다. 입단 동기인 SSG 랜더스 코치 정상호는 “팀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주축 멤버”라고 말했다.
김강민은 대기만성의 전형이다. 20대 초반에는 주목받지 못한 선수였다. 2005년까지 49경기 출장에 그쳤고, 안타도 14개뿐이었다. 수비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2007년 전 경기에 가까운 124경기에 나섰다. 메이저리그 명예의전당에 오른 야구전문기자 레너드 코페트는 1991년에 펴낸 책 '야구란 무엇인가'에서 “외야 수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타트'다. 이것은 직감, 반사 신경,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예측, 그리고 연습의 소산”이라고 했다. 스타트의 중요성을 보여준 선수가 김강민이었다. 빠른 타구 판단을 바탕으로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하며 다른 선수들이 다이빙해야 겨우 닿을 법한 공을 여유 있게 잡아냈다. 외야에서 홈까지 노바운드로 도달하는 송구로 주자를 묶었고, 홈런성 타구는 담장에 기대며 동물적 감각으로 걷어냈다. 외야를 누비는 그에겐 '짐승수비'라는 별칭도 붙었다.
2010년 김강민은 처음 3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2013년과 2014년에도 2년 연속 3할 타자로 이름을 새겼고, 두 자릿수 홈런과 도루를 기록했다. 김강민은 데뷔 이후 22년간 '원클럽맨'으로 뛰었다. 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그보다 오래 한 팀에서 활약한 선수는 없다. 올해에도 김강민은 중견수로, 결정적 순간에는 대수비·대주자로 나선다. 김강민과 철벽 외야를 구축했던 SSG 랜더스 코치 조동화는 “철저한 관리로 나이가 무색하게 '짐승수비'가 살아 있다”며 “원클럽맨으로 네 번의 우승을 이룬 선수”라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외야수 박재홍 “1996년, 인천팬들에겐 최종병기 같지 않았을까”
10년째 해설위원 활동…“아직도 해설 어려워”
“'괴물' 타이틀 영광…신인들에 동기부여되길”
“30홈런-30도루 세 차례 달성, 가장 큰 자부심”
2013년 5월18일 은퇴식에서 박재홍은 빗속에도 가득 들어찬 문학구장 1루 관중석을 향해 “못다 한 도루는 해설을 하면서 여러분 마음을 훔치는 걸로 대신 채우겠다”고 말했다. 프로야구 최초 300홈런·300도루 대기록 달성에 도루 33개만을 남기고 그라운드를 떠난 그는 올해로 해설위원 10년 차를 맞았다. 지난 5월14일 중계를 위해 문학을 다시 찾은 박재홍은 “아직도 해설이 어렵다”고 말했다.
▲'괴물 신인'으로 첫해부터 주목받았다.
-'괴물'이라는 타이틀은 양준혁·이종범 선배가 먼저 가졌다. 그 대열에 같이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신인 선수들에게 동기 부여가 된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가장 자부심을 갖는 기록은.
-누적 기록은 후배들이 뛰어넘을 거라고 본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은 '30(홈런)·30(도루) 클럽'에 세 번 가입했던 거다. 한 번씩 달성했던 선수들은 있지만 당분간 세 번은 어렵지 않을까.(웃음)
▲데뷔 시즌 인천 연고팀에서 처음으로 리그 홈런왕에 올랐는데.
-그런 기록은 몰랐다. 만년 하위권으로 설움을 당했던 인천 야구팬들에겐 최종 병기가 생긴 느낌이 아니었을까.(웃음) 현대 유니콘스가 강팀으로 도약하면서 입단 첫해 센세이셔널하지 않았나 싶다.
▲'국제용 선수'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해외 진출이 활발해진 지금 시점에서 보면 때를 잘못 만났다는 생각도 든다.
-시대적 흐름이라는 게 있다. 그래도 그때 활약으로 중년 야구팬 기억에 남아 있다. '92학번'에 좋은 선수들이 많아서 아마추어 국가대표로 많은 경기를 뛰었던 노하우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은퇴 이후 줄곧 해설위원 길을 걸었다. 지도자로 그라운드에 돌아오고 싶진 않은지.
-선수 시절 언론과 별로 안 친했는데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다.(웃음) 언젠가 기회가 올지 모르겠지만, 지금 하는 일이나 똑바로 해야겠다는 마음이다. 야구판에 계속 몸담고 있으니까 다른 욕심은 없다.
/글·사진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어떻게 선정했나
인천일보는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과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를 선정했다. 투수 3명(우완·좌완·구원)과 포수, 내야수(4명), 외야수(3명), 지명타자 등 총 12명이다.
올스타 후보는 42명이 추려졌다. 인천 연고팀에서 3년 이상 활동한 선수 가운데 KBO 공식 시상식과 골든글러브 수상자, 올스타전 베스트 멤버를 기준으로 삼았다. 국가대표로 각종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도 목록에 올랐다. 2000년대 이전에는 프로 선수들의 국가대표 출전이 불가능했던 점을 고려해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구성됐던 한일 슈퍼게임 멤버도 반영했다. 2002년 SK 와이번스가 선정한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도 포함했다. 투수 포지션의 경우, 인천 연고팀에서 500이닝 이상 투구한 선수 가운데 선정 요건을 충족한 후보들로 올스타를 뽑았다.
5월18일부터 6월22일까지 진행된 투표에는 야구인 40명이 참여했다. 특정 시기에 몰리지 않도록 20대(5명), 30대(10명), 40대(10명), 50대(10명), 60대 이상(5명) 등 세대별로 배분했다. 20대는 SSG 랜더스 현역 가운데 인천 출신 선수로 한정했고, 30대는 인천 출신이거나 인천 연고팀 3년 이상 활동 선수로 추렸다. 공정한 투표를 기하기 위해 올스타 후보는 투표인단에서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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