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함' 박정현
전형적 언더핸드 투수…1989년 신인왕 차지
'첫 가을야구' 준PO 1차전 14이닝 완봉승 역투
2000년 인천 복귀…와이번스 홈 첫 승리투수
▲'닥터K' 최창호
연습생 신분·작은 체구 한계 극복한 좌완투수
1989년 탈삼진 2위·준PO 2차전 위력적 투구
1996년 유니콘스 시절 PO MVP 선정되기도
▲'수호신' 정명원
1989년 2점대 평균자책·준PO 3차전 기선제압
KBO 최초 40세이브…선발·마무리 만능카드
전무후무 '한국시리즈 노히트노런' 기록 달성
▲'안방마님' 김동기
인천 토박이…공격·수비 겸장 '투수왕국' 지휘
1989년 준PO 1차전서 연장 끝내기 3점 홈런
프로야구 최초 포수 전 경기 출장 기록 주인공
1989년 인천 연고팀이 처음 가을야구에 등장했다. 잠자고 있던 구도의 야성도 깨어났다.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도원구장)은 1만3000석이 일찌감치 매진됐고, 입장하지 못한 극성팬들이 철탑에 오르는 소동도 벌어졌다. 2000원짜리 입장권이 2만원에 팔린 암표는 기승을 부렸다.
준플레이오프 3경기 선발투수는 박정현·최창호·정명원이 차례로 나섰다. 나란히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그해 태평양 돌핀스가 올린 62승 가운데 40승을 책임진 삼총사였다. 프로야구 최초로 포수 전 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김동기도 변함없이 마스크를 썼다. 돌풍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삼총사' 정명원·최창호·박정현
삼성 라이온즈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은 연장 14회로 흘러갔다. 1회부터 마운드를 지켰던 박정현은 경기가 끝난 뒤에야 글러브를 벗었다. 박정현은 1987년 말 태평양 돌핀스가 창단 직후 처음 계약한 신인 선수였다. 입단 첫해 1패만을 떠안았지만, 1989년 4월14일 완투로 첫 승을 따냈다. 190㎝가 넘는 장신으로 마운드를 훑으며 던지는 공은 영락없는 잠수함 미사일이었다. 19승을 따내 선동열(21승)에 이어 다승 2위였던 박정현은 신인왕까지 차지했다.
대구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2차전도 접전이었다. 태평양 돌핀스는 3대 4로 아쉽게 승리를 내줬지만, 선발로 나선 좌완 최창호는 5회까지 삼진 8개를 잡았다. 연습생(육성선수)으로 입단해 2년간 2패가 기록의 전부였던 그는 1989년 5월2일 처음으로 완투하며 탈삼진 13개를 기록했고, 나흘 뒤 첫 승을 맛봤다. 투수로선 작은 체구였지만 몸을 웅크렸다가 멈춘 뒤 힘을 모아 던지는 공은 위력적이었다. 최창호는 탈삼진 191개로, 그해 선동열(198개)에 이어 2위에 올랐다.
3차전도 박빙의 투수전이었다. 연장 10회말 태평양 돌핀스는 곽권희의 적시타로 끝내기 승리를 거뒀다. 정명원은 양팀이 총력전을 펼친 마지막 경기에서 3회까지 무실점으로 초반 기세를 주도했다. 우완 정통파 정명원이 내리꽂는 직구는 타자들을 움츠러들게 했다. 정명원은 그해 2점대 평균자책점에 11승, 그리고 팀에서 가장 많은 6세이브를 올렸다.
삼총사는 부상과 재활을 반복하면서도 1990년대 내내 '투수왕국' 기둥으로 활약했다. '잠수함' 박정현은 1992년까지 4년간 780이닝을 넘게 던지며 55승을 기록했다. 1998년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됐지만, 2000년 창단한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고 인천구장으로 돌아와 첫 번째 홈경기 승리투수가 됐다.
'닥터K' 최창호는 1990년부터 2년 연속 탈삼진 3위로 위력적인 구위를 과시했고, 1991년 15승을 올렸다. 1998년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되기까지 두 시즌을 제외하고 100이닝을 넘게 소화했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플레이오프 MVP도 받았다.
'수호신' 정명원은 1994년 프로야구 사상 첫 40세이브로 골든글러브와 올스타전 MVP를 수상했다. 3년 연속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마무리 투수였다. 선발로 변신한 1996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선 노히트노런의 주인공이 됐고, 1998년에는 14승과 동시에 1.86으로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했다.
11년간 포수 마스크를 썼던 김동기에게도 삼총사는 각별했다. 그는 “전지훈련에서 하루에 수백개씩 공을 주고받았다. 1989년 시작과 끝에는 3명의 투수가 있었다”고 말했다.
'무관의 명포수' 김동기
1989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이 끝난 뒤 인천 야구장에선 때아닌 농성이 벌어졌다. 관중들은 출입문을 에워쌌다. 그들이 연호한 이름은 연장 14회말 2사에서 끝내기 3점 홈런을 터뜨린 김동기. “우리 손으로 헹가래를 쳐야 한다”며 아우성이었다.
청보 핀토스 주전 포수로 도약한 김동기의 방망이는 꼴찌팀에서 독보적이었다. 태평양 돌핀스로 팀이 바뀐 1988년 전기리그에선 3할7푼9리로 타율 1위였고 장타율 1위, 출루율 2위에 올랐다. 후기리그 개막 직후 발목을 다친 그가 결장하는 동안 팀은 12연패에 빠졌다. 한 달여 만에 복귀한 김동기가 2점 홈런과 적시타를 터뜨린 7월28일 인천 경기에서 태평양 돌핀스는 연패 터널을 벗어났다. 부상 악재는 다시 찾아왔다. 그해 8월12일 번트를 대고 전력질주하다가 1루를 밟는 순간 부상으로 쓰러졌다.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해 3할5푼8리로 '장외 타격왕'에 만족해야 했다.
김동기는 역대 최고 투수로 꼽히는 선동열을 가장 괴롭힌 타자였다. 1990년 9월25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선동열을 상대로 3점 홈런을 쳤다. 그해 평균자책점 1.13에 22승을 올린 선동열의 유일한 피홈런이었다. 1993년 4월29일에는 0대 4로 끌려가던 8회초, 승리를 굳히려고 마운드에 오른 선동열의 공을 받아쳐 만루홈런을 터뜨렸다. 당시 선동열은 1991년 8월 태평양 돌핀스 김경기 이후 1년 8개월간 누구에게도 홈런을 맞지 않은 투수였다.
공수에서 꾸준했던 김동기는 유난히 상복이 없었다. 1987년부터 1994년까지 골든글러브 후보에 일곱 차례나 오르고도 수상의 기쁨을 맛보지 못했다. 김경기와 'KK 쌍포'로 활약하며 태평양 돌핀스를 인천 연고팀 첫 한국시리즈 무대로 올려놓은 1994년 골든글러브 투표에선 2표 차로 밀렸다.
1996년 시즌 도중 김동기는 허리 부상으로 주저앉았다. 서른 다섯까지 선수로 뛰겠다며 등번호도 '35번'을 달았던 그의 나이 서른 둘이었다. 최창호는 “볼 배합을 전적으로 따랐고, 경기 운영에서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투수를 편안하게 이끌어준 포수였다”고 말했다.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최창호 인터뷰] “스무살에 올라온 인천, 이제는 특별한 인연”
“1989년, 정명원·박정현과 재미있게 야구해”
“파울볼 놓치길 바랐을 정도로 탈삼진 자신감”
스무 살 청년은 대구에서 인천으로 올라왔다. 제물포고에서 청보 핀토스 연습생 테스트를 받았고, 배팅볼을 던져주며 선수단을 따라다녔다. 최창호(56)는 올해 코치로 제물포고에 돌아왔다. 지난 6월9일 훈련 도중 만난 그는 “특별한 인연”이라고 말했다. 프로 무대에서 이름을 알린 1989년 시즌을 앞두고 '특별 과외'를 받은 곳도 제물포고였다.
▲1989년 '삼총사' 활약이 대단했다.
-김성근 감독님으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았다. 방위병 전역을 앞두고 박상열 코치님과 제물포고에서 훈련했다. 개막하고 한 달 내내 1승도 올리지 못했는데, 계속 기회를 얻어서 5월부터 승수를 쌓았다. 정명원·박정현과 재밌게 야구를 했다.
▲투구 이닝이 엄청났는데.
-마운드에서 던지는 것 자체로 좋았다. 고등학생 때 팔꿈치를 다친 적이 있어서 팔을 관리하는 나만의 트레이닝 방법이 있었다. 그렇게 많이 던지고도 수술을 안 했다.
▲삼진을 많이 잡아서 별명도 '닥터K'였다.
-타자와의 승부를 즐겼다. 파울볼이 뜨면 속으로 공을 놓치라고 기도했다. 삼진 잡을 수 있으니까.(웃음) 필살기는 커브였는데, 두 가지로 구사했다. 삼진을 노린 순간에는 일반적인 커브와 다른 드롭볼을 던졌다. 고등학생 때 책을 보고 연마한 공이다.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LG 트윈스 더그아웃에 있었는데 기분이 어땠는지.
-참담했다. 시상식에도 못 나가고 그냥 앉아 있었다. 1994년에도 우승 기회가 있었지만 한국시리즈 4차전 선발로 시합 들어가기 직전 근육이 마비되듯이 굳었다. 결국 경기도 졌다. 그때 아쉬움이 잊히질 않는다.
/글·사진 이은경·이순민·이아진 기자 smlee@incheonilbo.com
[김동기 인터뷰] “인천 관중들 내 이름 연호해주면 눈이 반짝”
“고교시절 하루 3000번씩 방망이 휘두르며 노력”
“홈 성적 유독 좋아 … 지금도 사회인 야구는 계속”
신흥초·동인천중·인천고·인하대 그리고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로 유니폼을 갈아입으면서 김동기(59)는 한순간도 인천을 떠나지 않았다. 우승 반지도, 수상 트로피도 없지만 잊지 못할 홈런들을 남긴 간판타자였고, '투수왕국'을 이끈 포수였다. 지난 5월31일 미추홀구 관교동에서 만난 그는 “야구장 밖에서 노는 건 일등이었다”며 웃었다.
▲노는 걸 좋아했으면 노력형보다 천재형에 가까워 보이는데.
-남들이 안 볼 때 노력을 많이 했다. 고등학생 때도 밤늦게까지 교실에서 방망이를 3000번씩 휘두르고, 새벽에 혼자 뛰었다. 조용한 밤에 스윙하면 바람 스치는 소리가 너무 좋았다.
▲은퇴 이후 야구 경력이 거의 없다.
-은퇴 직후 넥타이 매고 직장 다니다가 안산 중앙중학교에서 유일하게 3년 정도 감독을 했다. 그때 마지막으로 스카우트했던 선수가 김광현이다. 지금은 건설 현장 관리하는 일을 한다. 스트레스 풀려고 사회인 야구는 계속한다.
▲1989년 준플레이오프 연장 끝내기 홈런 기억은.
-경기 끝나고 버스 타러 가는데, 김성근 감독님이 “역시 인천 스타 맞구나”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인천 경기 성적이 유독 좋았다. 관중들이 이름을 연호해주면 눈이 저절로 반짝였다.
▲선동열 천적으로 유명했는데 비결이 있었나.
-비디오를 보며 상대 투수 분석을 했다. 글러브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팔 근육이 변하는지를 유심히 봤다. 습관을 찾아내면 구종 하나만 노렸다. 선동열 상대로 만루홈런 쳤을 때는 잘 맞아서 공이 빨랫줄처럼 날아갔다. 유격수 이종범이 잡으려고 점프했을 정도였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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