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심'으로 살던 시절]
쌀 없어 배곯던 60~70년대 이후
통일벼소비 강요정책 철폐되자
맛 좋은 경기미 가격 '30% 폭등'
'임금 진상쌀' 인증 힙입어 불티
국내외서 가짜경기미 소동까지
['쌀쌀맞은' 요즘 밥상]
인당 연 쌀 소비 10년새 14㎏↓
하루 즉석밥 한 개도 안 먹는 꼴
풍년 더해져 쌀값 '역대급 폭락'
작년 쌀도 다 못 팔아 적체 심화
정부 시장격리, 근본 해결 못해
지금은 남아도는 쌀, 60~70년대만 해도 쌀이 귀해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을 우린 기억한다. 지난날 영화를 누리던 '경기미'는 온데간데없고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우리 쌀. '경기미'의 어제와 오늘을 되짚어 본다.
▲가짜 경기미
경기미의 명성은 여전하다. 조선 초기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이라는 인식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면서다. 지금도 쌀 하면 경기미를 최고로 내세울 만큼 고급 쌀의 대명사로 불린다.
실제 경기미는 타 지역의 쌀과 비교해 약 25%보다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 비싼 가격에도 경기미가 각광받아 온 데는 단연 우수한 미질 덕분이다. 경기미가 품질이 뛰어난 것은 낟알이 여무는 결실기에 일조량이 많고 밤낮 기온 차가 커 벼의 생육조건이 좋기 때문이다. 또 찰흙과 모래가 적절히 혼합된 사양질 토양, 마그네슘 성분이 풍부한 경기지역 특유의 물도 쌀 생산에 좋은 환경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 다수확품종을 중심으로 벼를 심는 다른 지역과 달리 추청(아키바레)이나 고시히카리처럼 생산량은 적어도 미질이 뛰어난 품종만을 재배하게 된 점도 좋은 쌀 생산에 한 몫 거들었다.
1970년대 이후 경기미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통일벼의 소비를 강요하는 정부 정책이 철폐되자, 소득 수준이 높아진 대도시에서는 '경기미 열풍'이 불었다. 일부 부유층에서 기준 수매가보다 2배가 비싼 가격인데도 불구하고 계약재배를 해 먹는다는 기사가 보도될 정도였다.
1983년에는 일반미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경기미의 가격이 30% 가까이 급등하는 '일반미 파동'이 일어났다. 일반미에 대한 선호는 곧 추청(아키바레)에 대한 선호였고 추청은 경기지역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었다. 미질이 뛰어났던 추청의 선호는 경기미의 역사적 기록들과 접목돼 곧 '경기미 열풍'으로 이어졌다. 열풍은 단순히 우수한 품종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경기도가 조선시대부터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의 산지라는 역사적 기록이 덧씌워진 결과로 나타났다.
경기미는 '가짜 경기미' 사건으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일부 양곡상들은 호남지역에서 나는 쌀을 싸게 매입한 뒤 이천, 여주, 평택 등지에서 '경기특미'로 둔갑시켜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국내만이 아니다. 2000년대 초반 미국시장에 진출한 경기미가 날개 돋친 듯 팔리자 칼로스 쌀을 '이천 쌀'로 판매하는 등 소위 짝퉁 경기미가 등장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풍년의 역설
휘발유 가격 1897원(7월31일 기준). 밥 한 공기의 가격 250원.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 속에도 쌀값만큼은 예외다.
지난 17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산지 쌀값은 20㎏당 4만4851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5만5880만원이던것과 비교해 19.7%가 떨어진 수치다. 올해 쌀값은 데이터 축적 이후 45년 만에 최대 하락 폭을 기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호조를 보인 기후 여건으로 작황이 좋아 공급과잉이 된 것을 쌀값 폭락에 근본 요인으로 꼽고 있다.
실제 지난해 전체 쌀 생산량은 388만2000t으로 예측 수요량인 361만t보다 20만t가량이 증가했다. 경기지역도 마찬가지다. 경기도는 지난해 38만t을 생산했는데 전년보다 4만t가량을 더 생산했다. 여기에 쌀 소비량 감소 등 해묵은 과제들과 맞부딪치면서 우리 쌀은 수난을 겪고 있다.
연간 1인당 쌀 소비량은 2011년 71㎏에서 지난해 57㎏까지 줄어들어 10년 전과 비교해 10㎏ 이상을 덜 먹고 있다. 다시 말해 1인당 하루 쌀 소비량이 즉석밥(200g) 1개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쌀 재고는 산처럼 쌓여만 가고 쌀 물량의 적체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당장에 햅쌀 수확기가 두 달여 앞으로 다가왔지만 판매되지 못한 쌀 재고 때문에 혼돈이 우려되고 있다.
고육지책으로 각 지자체 RPC나 유통업체들은 할인 판매에 나서고 있지만, 적체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쌀 산지인 이천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이천의 경우 지난해 6월 수매한 쌀을 모두 소진했던 것과 달리 약 6200~6700t이 적체된 상황이다.
좀처럼 쌀값 대란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정부는 시장 격리에 나섰다. 정부가 쌀 재고량을 직접 사들여 생산분을 줄이겠다는 방침이다. 작년산 쌀 과잉생산분 27만t을 매입한 것에 이어 지난 19일 10만t을 추가 매입했다. 그런데도 해소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난항을 겪고 있다.
이에 정부는 쌀 과잉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질미'를 활용한 쌀 가공산업지원방안을 마련했다. 오는 2027년까지 20만t 규모의 분질미를 생산한다는 것이 목표다. 분질미 재배면적도 2021년 25㏊였던 것을 100㏊까지 늘린다.
그러나 쌀의 가공 적합성과 비싼 가공비 등의 문제가 반복되면서 업계 관계자들은 근본적인 해결책 강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석재현 이천라이스센터 대표이사는 “올해 수매 가격이 하락하면서 농가소득이 줄어들어 걱정이 크다”며 “3차 시장 격리가 이뤄졌지만 시기가 한참 늦어졌다. 올해도 풍년이 들 것으로 보여 과잉공급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인터뷰] 문제열 국립한경대 연구교수
“쌀 생산량을 줄이는 것만이 해답.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연일 고공행진 중인 '밥상 물가', 아이러니하게도 쌀값은 끝도 없이 추락 중이다. 문제열 국립한경대 교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 교수는 “이미 서구화된 식생활이 익숙한 사람들에게 단순히 밀가루 음식보다 밥을 많이 먹자고 감정에 호소하는 캠페인은 궁색할 뿐”이라며 “쌀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쌀값 하락의 주된 요인으로 쌀 소비의 감소와 국내 생산량과는 무관하게 수입하고 있는 쌀을 꼽았다. 여기에 다른 작물과 비교해 벼농사가 유리한 시스템으로 운영되면서 농민들 역시 벼 재배면적을 계속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생산은 늘고 수입은 계속되고 있다. 매년 40만8700t을 수입해야 하는 이유로 쌀의 재고가 늘어나는 상황이다”며 “벼농사는 대부분 기계화가 이뤄지면서 고령화가 진행된 농가에 유리한 시스템이다. 자가 노동 시간이 1㏊당 약 90여 시간으로 콩과 같은 작물이 150여 시간이 걸리는 것에 비해 시간당 소득이 높아 농민들은 벼농사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쌀값 안정을 위한 대책으로 논에 다른 작물을 재배하거나 친환경 저탄소 농법을 확산하고 수입에 의존하는 사료용 곡물을 쌀로 대체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는 “시장격리 정책만으로는 가격지지에 한계가 있다. 근본적으로 쌀값 안정을 하기 위해 생산을 줄이는 것이 핵심이다”며 “밀이나 콩 등 다른 작물들의 수매가격을 높이거나 직불금을 추가 지급하는 방식으로 벼를 대체할 필요가 있다. 또 저탄소 농법을 확산해 단수를 낮추는 방법도 벼의 생산량을 줄이는 방법이다. 아울러 사료용으로 수입하는 곡물의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국내 쌀을 사료로 공급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공급원가의 조율이 필요하다. 향후 5조원까지 늘어나는 공익직불금을 쌀 대체 작목이나 친환경 저탄소 농법에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쌀 가공식품의 확대와 어린이 대상으로 하는 식생활 교육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 교수는 “밥쌀용 쌀 소비가 지속해서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가공용 쌀 소비는 늘고 있다. 쌀 가공식품이 새로운 쌀 소비 창구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상황에서 즉석밥이나 컵떡볶이, 쌀막걸리와 같은 다양한 쌀 활용 식품의 개발이 필요하다. 또한 쌀 요리전문점을 프랜차이즈화하거나 전문타운을 조성해 쌀 소비를 이끌어야 한다. 특히 우리 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고 어릴 때부터 식생활 교육을 활성화해 '밥 먹는 습관'을 갖도록 어린이 대상 쌀 홍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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