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온 동네가 품앗이 농사 지었어
논일 힘내라고 한가락 뽑고, 끝나면 고생했다 두들겼지
모내기 끝나면 마을잔치 '대동회' 열고
가을걷이 뒤엔 '산신제'로 우애 다졌는데 …

지금은 재개발로 뿔뿔이 흩어져서 속상해
아파트는 옆집이랑 인사도 멋쩍더라고
농쌀직썰

쌀은 생명을 잇는 끼니였고 우리 문화는 쌀을 중심으로 피어났다. 서구화된 식단에 밀려 점차 우리 밥상에서 멀어지고 있는 '쌀'. 동시에 사라져 간 '쌀의 추억'. '천년밥상, 경기米이야기-농쌀직썰 2부'에서는 경기미의 옛이야기를 쫓아 쌀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경기인들의 쌀 문화, 쌀에 대한 '썰(設)'을 풀어본다.

 

▲ 심상곤 옹이 꽹과리 소리를 뽐내고 있다. /사진제공=임효례 사진작가
▲ 심상곤 옹이 꽹과리 소리를 뽐내고 있다. /사진제공=임효례 사진작가

# “도시 계획 때문에 나가야 하니깐 처음에는 속상하고 섭섭하고 그랬지.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하고 헤어져야 한다니깐.
지금은 아파트로 왔는데 옆집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옆집 사람에게 인사하는 일이 멋쩍다. 도시에선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낯설어졌다.

한바탕 김씨네 추수를 돕고 나면 옆 마을 심씨네 가서 농사일을 거들던 정겨운 마을 풍경은 아스라이 사라졌고, 대도시의 높디높은 담벼락만이 차갑게 솟아올랐다. 우리네도 옆집 개똥이네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군포 대야미 일대는 위풍당당 솟구친 마천루 사이를 비집고 우리의 마을 공동체를 지켜가던 자연마을이 자리했었다. 가마 타고 가다가도 인사를 드리던 지체 높은 대감이 살던 마을이라 해 대감마을이라 불리던 곳. 심상곤(92) 옹은 대감마을에서 나고 자라 군포시사(史)의 한 세기 가까이를 지켜봐 온 군포 백 년의 산증인이다.

“군포 대야미에는 6개 부락이 모여 살았었지. 우리 청송 심가가 살던 대감마을, 저기 갈치저수지에 사는 문화 유가마을 여기 안골마을에 사는 광산 김가네... 400년을 살았다고 했어. 개중에 우리 대감마을이 제일로 컸지.”

대감마을은 죽암천을 앞에 두고 수리산과 맞닿은 우래산의 한 자락에 자리를 잡았다. 마을의 지리는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배산임수 형태를 따랐다. 마을은 청송 심씨 찰방공파 자손들이 15대조 이전부터 터를 잡고 살던 곳이다.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대감들의 행차가 잦아서 대감마을이 됐다는 설이 있고 큰 바위가 있어서 '대암(大岩)'마을로 불리던 것이 대감마을이 됐다는 얘기들이 전해진다. 그런데 이 곳 대감마을에서 400년간 땅을 일구며 살아 온 사람들이 모두 마을을 떠났다. 마을이 자리한 곳에 5000여 가구,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다. 마을 사람들은 400년 넘게 터를 잡아온 마을이 해체되고 삶터를 옮겨야 한다는 상실감으로 헛헛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도시 계획 때문에 나가야 하니깐 처음에는 속상하고 섭섭하고 그랬지. 식구나 다름없는 사람들하고 헤어져야 한다니깐. 지금은 아파트로 왔는데 옆집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 심상곤 옹의 주름진 손과 꽹과리. 모진 세월이 느껴진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심상곤 옹의 주름진 손과 꽹과리. 모진 세월이 느껴진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하늘이 만들어 줬어야 했지.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들 고생했어. 손으로 모내고 밭 갈고.
여기 와서 농사짓고 옆 마을가서 농사짓고 품앗이해서 농사를 지었지. 부락 사람들 전체가 농사를 지어야 했어.”

가족 같은 이웃들은 이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심상곤 옹은 내 고향, 내 터전을 차마 벗어날 수 없어 여전히 대야미에 살고 있다. 대다수의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떠나지 못한 채 인근에서 새 둥지를 틀었다. 고향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재개발을 앞둔 마을 터에서 여전히 농사를 짓는 이유가 무엇보다 컸다.

대감마을 사람들은 대대로 대야미에서 농사를 지었다. 대감마을은 오래전부터 수리산 자락에서 발원한 죽암천과 비옥한 토지가 농사를 짓기에 좋은 여건들을 갖추면서 논밭을 일궈왔다. 1984년 죽암천 상류로 갈치저수지가 생겨나면서부터는 물 걱정을 하지 않는 수리 안전답으로써 역할을 해냈다.

“옛날에는 저수지가 없었어. 하늘이(기후 여건을) 만들어 줬어야 했지.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들 고생했어. 손으로 모내고 밭 갈고. 여기 와서 농사짓고 옆 마을가서 농사짓고 품앗이해서 농사를 지었지. 부락 사람들 전체가 농사를 지어야 했어.”

대감마을은 공동체 문화가 발달한 마을이었다. 모내기가 끝나면 '대동회'를 열었고 가을걷이 뒤엔 어김없이 '산신제'를 열어 우애를 다졌다. 마을 어르신이 돌아가신 날엔 주민들은 힘을 모아 상여를 지었다. 산본 신도시와 마주하고도 상반된 공동체 문화가 여전히 대감마을에는 존재했었다.

“여름에 대동회를 열었어. 대동회는 마을잔치 같은 거야. 모내기하느라 힘들었으니까 먹고 마시며 한 바탕 놀자는 거지. 시월 초하루에는 산신제를 열어. 한 해 농사 감사하다며 제를 지내는 거지. 산신제를 하기 전 제관을 맡아야 했는데 아무나 못 했어. 동네에서 무고하고 우환이 없는 집에서만 맡았지. 초상이 났어도 산신제 앞두고는 가면 안 됐어. 오죽하면 비린 음식이나 고기도 못 먹었다니깐.”

 

 

▲ 심상곤 옹이 자신의 꽹과리를 들어 웃어보이고 있다.
▲ 심상곤 옹이 자신의 꽹과리를 들어 웃어보이고 있다.

# “마을 사람들은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오고 벽돌을 찍으면서 마을회관을 지었지.”

마을에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때면 대감마을 고유의 공동체 문화가 빛을 발했다. 대감마을에서 안골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 마루엔 종이 있었다. 불이 나거나 마을에 큰일이 일어나면 종을 쳐서 사람들을 모았다.

“불이 나면 다 같이 달려들었어. 대부분이 초가집이다 보니 불도 뻔질나게 났었지. 이틀이고 나흘이고 불이 꺼질 때까지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불을 꺼댔어.”

해방 직후 터진 6·25 전쟁으로 서울에 살던 사람들이 대감마을까지 피란을 온 적이 있었다. 서로가 굶주린 배를 움켜쥐던 이때도 마을 사람들은 피란민들의 배고픔을 달랬다.

“서울 사람들이 여기까지 피란을 왔었지. 마을 사람들 모두 힘을 합쳐 피란민들을 도왔어. 먹을 거라곤 호박이나 감자나 고구마같은거 밖에 없으니깐 죽을 쒀서 나눠 먹었지.”

마을에 일이라면 마을 사람들 누구하나 빠짐없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땐 직접 마을회관을 짓기도 했으며 십 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다녀야 했던 마을 아이들을 위해 학교터를 기꺼이 내놓기도 했다. 6·25 전쟁으로 수리사가 전부 소실됐을 때도 마을 사람들은 전부 나서 재건 사업을 도왔다고 한다.

“마을회관을 만드는데 나라에서 시멘트랑 철근을 줬었어. 마을 사람들은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오고 벽돌을 찍으면서 마을회관을 지었지. 학교는 반월국민학교까지 걸어서 댕겼는데 멀다 보니깐 학교를 짓자고 얘기가 나왔지. 그때 우리 일가 땅이 제일로 컸는데 학교 짓자며 내놨어.”

심상곤 옹은 마을 제일의 상쇠였다. 밤이나 낮이나 논일이 끝난 뒤엔 신명나게 가락 솜씨를 부려댔다. 그가 수십 년 동안 쳐 온 꽹과리 소리는 '둔대 농악'의 뿌리이기도 했다.

“어깨너머로 배운 거지. 내가 17살 때부터 농사지었어. 집안 어른들 따라댕기면서 맨 본 게 그거니깐. 옆에서 보고 배운 거지.” 일할 때는 농요를 불렀고 일이 끝나면 농악부락패들과 꽹과리를 두들겼다.

그의 곁엔 손 때 묻은 꽹과리와 농요의 노랫말을 빼곡히 적어둔 수첩이 놓여있다.

꽹과리를 쥐자마자 빠르게 손을 놀려보는 심상곤 옹. 둔대 농악패 제일의 상쇠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방아타령이며 지경소리며 옛날에 하던 거야. 이제는 잠깐만 뒤돌아서도 잊어먹어. 그래서 기억날 때 미리 적어두었지. 지금은 걷는 게 불편해서 뭔들 못하지만, 부락이 무고하고 자식덜 건강하면 된 거야.”

 


 

[경기인의 밥상] 조라술

▲ 한 해 가을걷이가 끝난 뒤 산신제를 지냈던 군포 대감마을은 그해 햅쌀로 빚은 조라술과 방풍나물전을 즐겨 먹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한 해 가을걷이가 끝난 뒤 산신제를 지냈던 군포 대감마을은 그해 햅쌀로 빚은 조라술과 방풍나물전을 즐겨 먹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군포 대감마을에서는 음력 10월 초하루가 되면 산신제를 지냈다.

산신제는 한 해 가을걷이를 한 뒤 마을의 무고를 빌고 감사의 인사를 지내는 제였다. 산신제에서는 그해 햅쌀로 빚은 조라술을 올렸다. 집집마다 쌀을 한 되씩 걷고 어려운 집과 수고로운 집은 제외 시켰다.

1일부터 7일 전 제관을 맡은 이가 정갈한 몸 상태에서 술을 빚고 제당 근처에 술독을 묻는다. 술은 3일 이상 지나야 맛이 들지만, 조라술은 하룻밤만 지나도 잘 익기 때문에 맛이 좋은 편이라고 한다.

방풍나물은 군포 대야미 사람들이 즐겨먹던 봄나물이다.

먹거리가 귀하던 시절 지천으로 널린 푸성귀는 좋은 반찬거리가 돼 주었고 주로 해안가 주변으로 났던 방풍나물은 군포 대야미에서는 제법 귀한 푸성귀였다고 한다.

“며칠 땅에 묻어놓았다가 산신제에 정성으로 올렸지. 그해 지은 쌀로 만들어서 아주 맛도 좋았어.”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관련기사
[천년밥상 경기米이야기, 농쌀직썰] 제 17화 '쌀에 미치다.' 나종석씨 쌀은 생명을 잇는 끼니였고 우리 문화는 쌀을 중심으로 피어났다. 서구화된 식단에 밀려 점차 우리 밥상에서 멀어지고 있는 '쌀'. 동시에 사라져 간 '쌀의 추억'. <천년밥상, 경기米이야기 농쌀직썰 2부>에서는 경기미의 옛이야기를 쫓아 쌀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경기인들의 쌀 문화, 쌀에 대한 '썰(設)'을 풀어본다.#“땅이 있으니 내가 있고 내가 있으니 농사를 짓는 거지요. 신토불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닙니다.우리 땅, 우리 물, 우리 고장에서 나는 곡식, 농부가 흘린 땀 만큼 [천년밥상 경기米이야기, 농쌀직썰] 제 16화 '반백년 농사일기' 조팽기 옹 쌀은 생명을 잇는 끼니였고 우리 문화는 쌀을 중심으로 피어났다. 서구화 된 식단에 밀려 점차 우리 밥상에서 멀어지고 있는 '쌀'. 동시에 사라져간 '쌀의 추억'. <천년밥상, 경기米이야기 농쌀직썰 2부>에서는 경기미의 옛 이야기를 쫓아 쌀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경기인들의 쌀 문화, 쌀에 대한 썰(說)을 풀어본다.# “지금도 쓰고 있지. 눈이 안 보여도 써 오던 습관이 있어서 펜을 놓칠 못해. 애초에 40년 쓰기로 마음먹었으니 채워야겠더라고. 내년이 딱 일기 써 온지 40년 째야.”기억은 짧고 기록 [천년밥상 경기米이야기, 농쌀직썰] 제 15화 경기미 어제와 오늘 지금은 남아도는 쌀, 60~70년대만 해도 쌀이 귀해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을 우린 기억한다. 지난날 영화를 누리던 '경기미'는 온데간데없고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우리 쌀. '경기미'의 어제와 오늘을 되짚어 본다.▲가짜 경기미경기미의 명성은 여전하다. 조선 초기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이라는 인식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면서다. 지금도 쌀 하면 경기미를 최고로 내세울 만큼 고급 쌀의 대명사로 불린다.실제 경기미는 타 지역의 쌀과 비교해 약 25%보다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 비싼 가격에도 [천년밥상 경기米이야기, 농쌀직썰] 제 19화 신토불이 100년 고집, 배다리도가 박관원 옹 쌀은 생명을 잇는 끼니였고 우리 문화는 쌀을 중심으로 피어났다. 서구화된 식단에 밀려 점차 우리 밥상에서 멀어지고 있는 '쌀'. 동시에 사라져 간 '쌀의 추억'. '천년밥상, 경기米이야기-농쌀직썰 2부'에서는 경기미의 옛이야기를 쫓아 쌀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경기인들의 쌀 문화, 쌀에 대한 '썰(設)'을 풀어본다.# “내가 열 네살에 배다리도가 사장이 됐어. 아버지가 마흔 살에 돌아가셨거든.한 날은 어떤 무당이 찾아와서 그러더라고 3대를 넘기지 못하니 양조장을 팔으라고 [천년밥상 경기米이야기, 농쌀직썰] 제 22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청주 소로리 볍씨 쌀은 오랜 세월 우리의 삶과 역사를 지켜온 고마운 존재다. 또한 인류를 배불리 먹여야 할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더욱이 세계 인구의 절반은 이 쌀을 주식으로 삼고 있다. 쌀에 관한 놀라운 사실 한 가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바로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생명의 씨앗2001년, 전 세계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는 일이 이 땅,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충북 청주시(당시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일대로 발견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밝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