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는 보름달의 발음을 따서 불리는 곳이다. 300명 남짓한 주민이 살고 있는 볼음도는 강화도 서쪽으로 7㎞, 황해도 연백군과 5.5㎞ 떨어진 서해 최북단에 위치한다. 강화 외포리에서 여객선으로 1시간 이상 걸린다. 하늘·바다·땅 모두 청정 지역이며, 무공해 천혜의 고장이다. 조선 인조 때 명나라로 가던 임경업 장군이 풍랑을 만나 여기에 체류하던 중 보름달을 보았다고 해서 한참동안 만월도(滿月島)라고 했다. 섬 북쪽에 봉화산(83m), 서쪽에 요옥산(103m)이 자리를 잡고 있다.

대부분의 볼음도 주민은 농업에 종사하며, 쌀·보리·마늘·고추 등을 생산한다. 어획량은 미미하고, 백합 양식이 널리 이뤄진다. 섬의 크기는 작지만, 농경지가 많아 넓은 들판을 자랑한다. 이 섬은 '새들의 낙원'으로도 유명하다. 천연기념물인 저어새와 노랑부리백로 등 20여종의 철새들이 먹이를 찾아 갯벌로 모여든다. 볼음도엔 또 유명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수령 800년에 달한다.

요즘 볼음도에선 조용히 휴식하러 찾는 이들을 위해 저어새 생태마을 조성사업을 진행한다. 희귀한 저어새를 볼 수 있는 섬에 생태 탐방로를 조성하고, 사람이 많이 찾는 은행나무 주변을 정비하는 등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고 있다. 뭍에서 찾아가긴 힘들지만 어느 곳보다 평화로운 쉼을 선사하기에 한번 와본 이들은 꼭 다시 찾는다고 한다.

이런 볼음도가 지난해 말 '친환경 여행지'에 뽑혀 관심을 모은다. 한국관광공사와 전국관광기관협의회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친환경 추천 여행지 발굴 및 선정 사업에 이름을 올렸다. 탄소중립 실천 여행지, 친환경 가치확산 여행지, 친환경 생태체험 여행지로 구분해 우수 여행지를 선정·홍보하는 일이다. 여행지 매력도, 친환경 여행 지속가능성, 친환경 여행 가치 확산 등을 평가한다. 볼음도는 때 묻지 않은 청정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호평을 받았다. 특히 세계적 희귀종이자 인천 5대 깃대종 중 하나인 저어새의 집단 서식지가 있는 갯벌이 한몫을 했다. 조개의 왕으로 불리는 백합 캐기 체험을 할 수 있는 등 생태관광자원이 풍부한 점도 기인했다. 볼음도는 지난해 옹진군 대이작도와 더불어 '생태관광마을'로 선정돼 관광 프로그램 개발, 주민역량 강화교육, 관광환경 개선 등 맞춤형 지원을 통해 인천 대표 생태관광지를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볼음도는 친환경·생태관광지로서 무궁한 잠재력을 지닌 섬이다. 생태관광마을 육성과 홍보를 더 강화해 앞으로도 많은 관광객이 찾을 수 있도록 했으면 싶다. 아울러 저어새의 '고향'으로서 그 진면목을 널리 알렸으면 한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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