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창영초등학교 개교일은 1907년으로 되어 있지만, 잘못됐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승정원일기를 비롯해 각 칙령, 독립신문 등에 따르면 인천 최초로 소학교(현 초등학교)가 세워진 때는 18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7월19일 공포된 소학교령(칙령145호)엔 '인천부공립소학교' 설치를 발표했고, 이듬해 9월22일자 독립신문에도 같은 내용이 실렸다.

창영초교 개교의 오류는 1933년 일본인이 발행한 '인천부사'(1883∼1933년)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진다. 여기엔 창영초교와 관련해 “1907년 4월1일 관립 일어학교 교실을 임시로 개교해 부윤·면·동장에 알려 학생을 모집했다”라고 명시했다. 이를 의심 없이 창영초교 역사로 받아들인 게 문제다. 모든 걸 고려하면,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인 창영초교는 1896년 2월 문을 열었다고 봐야 맞다.

이렇게 한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창영초교의 역사를 무시한 채 이전을 추진하는 인천시교육청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커진다. '인천 창영학교 이전 사태를 우려하는 시민모임'의 얘기를 먼저 들어보자. “근대 교육사의 서막을 연 인천공립보통학교는 인천 교육의 산실이자 정신의 뿌리이다. 인천의 첫 공립학교를 재개발구역으로 이전하는 계획은 애초부터 역사의식이 결여된 개발 우선주의다. 창영초교 이전은 구시대적 발상이자, 우리 역사에 역행하는 처사이다.”

반면 시교육청은 재개발로 인한 학생 수 증가를 이전 사유로 내세운다. 창영초 학생 수는 지난해 5월 기준 181명인데, 금송구역과 또 다른 재개발 사업지인 전도관구역 입주가 본격화하는 2026년엔 980여명까지 늘어난다는 게 시교육청의 예측이다. 아울러 창영초 건물이 인천시 지정문화재라서 증·개축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든다. 시교육청은 교육부 중앙투자심사에 창영초 이전 안건이 상정됐다고 밝혔는데, 이 계획대로라면 창영초교는 인근 금송구역 터에 2026년 옮겨진다. 현 학교 자리엔 여중을 신설한다는 구상이다.

이 같은 시교육청의 주장은 한편으론 일리 있어 보이지만,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 잘못은 바로 '역사적 장소성'을 도외시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역사를 떠올릴 때, '6하 원칙'을 따져 사실을 밝히는 걸 중차대하게 생각한다. 언제·어디서·무엇 등이 일어났는지 살피는 일은 기본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영초교의 역사성과 장소성은 매우 귀중하다. 인천의 첫 공립학교임은 물론 인천 3·1운동 발상지로 역사에 남았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점 등을 외면해선 결코 안 된다. 시교육청은 창영초교 이전을 반대하는 여론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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