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부평구 부평2동엔 미쓰비시(三菱) 줄사택이 있다. 일제 강점기 징용 노동자가 사용하던 곳이다. 일제의 군수물자 공장인 미쓰비시 제강 인천제작소 노동자 1000여명이 거주했던 공장 합숙소다. 당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평가를 받는다. 1938년 만들었고 4년 뒤 미쓰비시 제강이 인수했는데, 집이 줄지어 있다고 해서 줄사택이라고 불렀다. 한때 16개동이 들어서 나름 북적거렸지만, 하나 둘 철거돼 지금은 6동만 남았다. 1동은 집 10여채로 이뤄진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미쓰비시의 강제동원 현장으로서, 높은 역사성과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다.

이런 미쓰비시 줄사택은 그간 '존치'와 '철거' 등을 놓고 논란을 빚어왔다. 주민들은 흉물이라며 철거를 요구하고, 학계에선 일제 강제노역의 흔적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평구는 급기야 2019년 4개 동을 철거해 주차장을 만들고 줄사택 흔적을 박물관에 전시하기로 했다. 주민과의 갈등이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얼마 전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등록을 검토해 역사적 장소로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는 공문을 보내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자문기구인 '미쓰비시 줄사택 민관협의회'에서도 '줄사택 전부 보존'으로 의견을 모았고, 구는 남은 줄사택을 보존하고 다른 곳에 공영주차장을 만드는 안 등을 내놓았다. 주민들은 결국 더 넓은 부지에 주차장을 조성하는 방향을 택했다. 엉켜 있던 실타래는 이렇게 해서 풀어졌다.

부평구가 최근 미쓰비시 줄사택 보존을 위해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구는 주민편의시설과 행정복지센터를 짓기 위해 2018∼2019년 두 차례에 걸쳐 미쓰비시 줄사택 9개동 중 3개동을 철거한 바 있다. 나머지 6개동 중 4개동도 추가로 없애 공영주차장을 만들려고 했으나, 마침내 역사적 장소로 보존·활용해야 한다는 권고안을 받아들였다.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띤 만큼, 보존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에 공감한 셈이다.

미쓰비시 줄사택은 지역유산이다. 인천시 자산으로서 가치 증진을 위해 힘을 쏟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줄사택의 문화재 등록과 그 활용과 관리엔 폭넓은 각계 의견을 들어야 한다. 역사·도시·건축 분야 등의 전문가가 참여해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이 바람직할 듯싶다. 아울러 장기간 줄사택으로 인한 주민들의 생활불편을 고려해야 함은 물론이다. 주민편의시설 등 주변 정주환경 개선 방안을 반영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참에 행정 당국에선 인천 곳곳에 남은 근대문화유산을 꼼꼼하게 전수조사해 보존·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으면 한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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