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인천 개항 140주년을 맞았다. 1883년 1월 제물포를 개방한 지 한세기를 훌쩍 넘어 오늘에 이른다. 인천항은 1918년 갑문을 설치한 내항을 완성하는 등 시설을 확장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제물포는 개항 후 외국 무역선 왕래 항만으로 자리를 잡았다. 비록 일제가 벌인 강제 개항이었어도, 물밀듯 들어오는 서양 문물과 함께 대도시로 가는 물꼬를 텄다. 그야말로 '지각변동'을 경험한 인천이었다. 인천 개항은 부산(1876년)과 원산(1880년)보다는 늦었지만, 개항의 영향은 지대했다.
인천항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서양 문화·문물은 대개 인천을 거쳐 서울로 갔다. 새로운 물자들이 일단 인천에 머무르면서, 온갖 생활 방식을 서구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인천에 '전국 최초'를 자랑하는 게 많은 까닭도 여기서 비롯한다. 철도(경인선), 등대(팔미도), 근대식 공원(자유공원), 호텔(대불호텔), 염전(주안염전), 기상대 등은 인천이 보유한 국내 첫 기록들이다. 인천은 결국 우리나라 근대화를 선도한 도시로 거듭나면서 대내외에 그 이름을 알렸다.
이렇게 근대화를 이룬 인천은 그 시장성과 화려함 등을 과시하면서, 국내 8도인들을 끌어모은 곳으로 유명했다. 외국인과 더불어 전국에서 모여든 이들은 저마다 한몫을 잡으려고 애쓰거나 노동시장에 편입돼 일가를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인천에 한번 가보지 않은 사람을 '촌놈'으로 취급할 정도로, 이색적인 장소가 수두룩했다. 그만큼 인천엔 볼거리가 많아 수많은 여행객에게 성지로 일컬어졌다.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자연히 먹을거리도 풍성했다. 전국 최초의 짜장면을 비롯해 냉면과 해장국 등은 인천을 찾는 이들의 미각을 돋웠다고 알려진다.
일제가 물러나고 광복을 맞은 인천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동안 '냉전시대'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인천항이 침체되면서 줄어든 각국 물동량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1990년 한국(인천항)과 중국(웨이하이) 간 카페리호가 취항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는 1992년 한-중 수교를 맺는 도화선 구실을 톡톡히 했다. 지금은 인천과 중국 도시들을 오가는 항로가 잇따라 개설돼 교류를 활발하게 한다.
한반도의 중심인 인천 곳곳엔 다양한 도시의 틀을 지니고 있다. 해양을 끼고 있어 무역선이 수시로 드나들며, 2002년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오가는 내외국인이 한해 수천만명에 이른다. 이처럼 바다와 하늘 길을 활짝 열어 다채로운 문화를 공존하게끔 하는 도시가 인천인 셈이다. 인천항은 강압으로 개항됐어도, 근대화·서구화의 첨병 노릇을 한 이래 이제 그 영향력을 날로 확대하는 중이다.
송도에다가 모든 이권을 보내서 하인천은 옷가게 하나없는 동네가 됐지요. 공무원들도 하인천에는 안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