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전 세계 인구의 15% 가량이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국내 장애 인구는 6% 정도이며, 여기에 노인이 15% 이상을 차지한다. 전체 인구의 20%를 훌쩍 넘는다. 장애인과 노인을 위한 정책적 배려는 그래서 빼놓을 수 없다. 장애·노인이 전 지구적으로 많아지면서 관광분야에서도 이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고객으로 통한다.

한국관광공사가 관광진흥법을 내세워 '무장애 관광지'를 개발하는 일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까지 100곳을 무장애 관광지로 탈바꿈시켰다. 무장애 관광이란 누구나 자유롭게 여행하는 일이다. 독립성·공평성·존엄성·연결성을 바탕으로 한다. 누구나 가고싶은 곳을 주체적으로 여행하는 방식이다. 실례로 시력 저하 노인과 발달장애 어린이 등이 활용할 수 있는 관광 프로그램을 설계한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 증진에 관한 법률'은 무장애 관광지를 개발할 때 주로 통용되는 법령이다. 관광지 인프라와 건물 규격의 기준으로 삼는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은 실제 관광지로 이동하는 문제, 주변 편의시설 정보, 관광지로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의 내용을 담았다. '관광진흥법'에도 장애인 관광 활동의 지원과 관련한 내용이 실렸다. 이런 법을 기반으로 자치단체마다 관광 약자를 위한 관광 환경 조성 등의 조례를 제정했다.

인천 만수산 일대에 국내에서 가장 긴 '무장애 나눔길'이 조성된 이후 방문객이 크게 늘어 눈길을 끈다. 지난해에만 찾은 방문객이 180만명을 넘어섰다. 하루 평균 5000여명이 다녀간 셈이다. 6년 전 한 곳에 불과했던 인천 무장애 나눔길은 이처럼 시민들 호응에 힘입어 9곳까지 늘었다. 만수산(해발 201m)의 경우 당초 등반 환경이 열악하고 산세가 가팔라 하루 방문객이 100명 안팎에 불과했지만, 2021년 12월 무장애 나눔길을 만든 후 이용자 수는 10배 늘었다.

무장애 나눔길은 장애인을 비롯해 노약자와 영유아 등 보행 약자도 산 정상까지 쉽고 안전하게 오를 수 있도록 경사도를 대폭 낮춘 등산로이다. 산책하듯 산 정상까지 무리 없이 다다른다. 전망대에선 탁 트인 시야와 함께 일몰·일출도 감상할 수 있다. 남동구는 전 구간에 걸쳐 등산로 폭을 2m로 설계해 휠체어도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이동 약자를 위한 사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싶다. 특히 가뜩이나 코로나19로 바깥 나들이가 시원치 않은 이들에게 무장애 나눔길은 마치 단비와도 같으리라. 이제 만수산이 산책 겸 운동 삼아 오르기 좋은 산으로 시민들에게 인식됐으면 한다. 아울러 인천에 이런 무장애 길이 더 많이 조성되길 바란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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