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지진(地震)은 정말 무섭다. 두려움의 대상이다. 많은 희생자를 내며 재앙으로 일컬어지는 지진의 역사는 길다. 역대 최악은 1556년 중국 산시성 대지진으로, 83만여명이 희생됐다고 알려진다. 일본에서도 1923년 9월1일 간토 대지진 때 13만여명이 숨졌다. 그 무렵 일본은 유언비어를 퍼뜨려 무고한 조선인을 마구잡이로 학살(6600여명)했다. 지금도 우리에겐 가슴 아픈 사건으로 기억된다.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 지방에선 규모 9.0의 지진이 발생해 2만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우리나라도 지진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한반도는 그동안 약한 규모의 지진으로 비교적 '안전지대'에 속했다. 그렇다고 “안심은 금물이다”라고 지진학자들은 지적한다. 조선시대에만 건물에 큰 피해를 준 지진이 40번이나 일어났을 만큼 매우 활발했다. 최근 한반도 지진 발생 횟수가 점차 많아지는 점만 봐도, 안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고 한다.

인천은 어떨까? 수도권에선 지진 발생이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미해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지진에 대한 지역의 관심도를 높였던 적이 있었다. 바로 정부가 1994년 옹진군 굴업도를 핵폐기장 부지로 선정하면서 불거졌다. 당시 덕적도 주민은 물론 인천시민과 환경단체 등이 나서 극렬하게 핵폐기장 건설에 반발했다. 결국 굴업도에서 지진 활성단층이 발견됐다는 사실이 핵폐기장 계획을 무산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제 인천시민들도 '지진 안전불감증'에서 벗어나야 할 듯싶다. 지난 9일 새벽 강화군 해역에서 지진이 발생해 시민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1시28분 강화군 서쪽 25㎞ 해역에서 규모 3.7의 지진이 일어났다. 관측 이후 즉시 지진속보를 발표했고, 진앙에서 반경 80㎞ 이내인 수도권에 긴급재난문자를 보냈다. 이번 지진은 1978년 이후 한반도에서 발생한 것 중 81번째로 큰 규모였다.

강화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인천 곳곳에선 재난 대비 점검을 하느라 분주했다. 특히 시교육청은 부랴부랴 학교의 내진 보강 등을 재빠르게 살폈다. 현재 인천시내 학교 3017동 중 내진 대상 시설은 1372동에 달한다. 당초 지진을 견디도록 설계된 건물은 800동(58.3%). 나머지 572동(41.7%)은 서둘러 보강을 해야 하는 상태로 밝혀졌다.

어디에서도 지진으로부터 안전할 수는 없다. 어쩌지 못하는 자연재해라고 해도, 지진에서 최대한 견딜 수 있는 예방 조치는 필수적이다. 그렇게 해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최소화할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없도록 유비무환을 견지하는 자세가 절실하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관련기사
[썰물밀물] 인천 개항 140년 올해로 인천 개항 140주년을 맞았다. 1883년 1월 제물포를 개방한 지 한세기를 훌쩍 넘어 오늘에 이른다. 인천항은 1918년 갑문을 설치한 내항을 완성하는 등 시설을 확장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제물포는 개항 후 외국 무역선 왕래 항만으로 자리를 잡았다. 비록 일제가 벌인 강제 개항이었어도, 물밀듯 들어오는 서양 문물과 함께 대도시로 가는 물꼬를 텄다. 그야말로 '지각변동'을 경험한 인천이었다. 인천 개항은 부산(1876년)과 원산(1880년)보다는 늦었지만, 개항의 영향은 지대했다.인천항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썰물밀물] 부평 미쓰비시 줄사택 보존을 환영하며 부평구 부평2동엔 미쓰비시(三菱) 줄사택이 있다. 일제 강점기 징용 노동자가 사용하던 곳이다. 일제의 군수물자 공장인 미쓰비시 제강 인천제작소 노동자 1000여명이 거주했던 공장 합숙소다. 당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평가를 받는다. 1938년 만들었고 4년 뒤 미쓰비시 제강이 인수했는데, 집이 줄지어 있다고 해서 줄사택이라고 불렀다. 한때 16개동이 들어서 나름 북적거렸지만, 하나 둘 철거돼 지금은 6동만 남았다. 1동은 집 10여채로 이뤄진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미쓰비시의 강제동원 현 [썰물밀물] 새해부터 '내 고향 인천'을 잇다 개항(1883년) 이후 인천엔 조선 팔도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만큼 먹고살기 위한 직업을 찾기 쉬워서였다. 너도나도 인천에 와서 한몫을 잡으려는 의지도 작용했으리라. 외국 문물이 물밀듯 들어오고, 각종 공장과 업소 등이 즐비한 덕분에 각지 사람을 엄청나게 끌어모은 곳이 인천이다. 본토박이보다 외지인들이 훨씬 많이 살았던 이유다.한국전쟁을 겪은 후엔 수많은 이북 피란민이 인천에서 자리를 잡았다. 북한과 가까워서인지 언젠가 빨리 고향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열망에서였다. 그런가 하면 한동안 육로보다 뱃길이 더 잘 발달된 덕에 수많은 충청인 [썰물밀물] 세 밑에 서서 “시시비비도불관(是是非非都不關) 산산수수임자한(山山水水任自閑) 막문서천안양국(莫問西天安養國) 백운단처유청산(白雲斷處有靑山) - 옳거니 그르거니 상관하지 말아라.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 두라. 서쪽 하늘에 극락이 있냐고 묻지 말라. 흰 구름 걷힌 곳에 청산이 있을지니.”문득 임제(臨濟) 선사(?~867)의 시가 생각나는 연말이다.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라. 그러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되리라.(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란 어록으로 유명한 당 시대 고승이다.어김없이 한 해가 저문다. 올해는 또 무슨 시비를 하며 끓탕 [썰물밀물] 하와이 교민들의 '인천 사랑' 인천은 세계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관문도시다. 인천국제공항은 오늘도 세계 곳곳의 인종을 싣고 내리면서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얼굴'로 자리잡았다. 인천은 그만큼 다양한 민족과 교포 등을 수용하면서 더 큰 도시로 나아가려고 힘을 쏟고 있다. 그런 생각과 의지를 품은 지는 아주 오래됐다. 이젠 제물포에서 출발(1902년 12월22일)한 한인 최초 이민단의 후손을 비롯해 각국에서 오가는 이들을 포용하는 곳으로 성장을 거듭한다.인천시는 인천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간 교민들을 하나로 잇는 '재외동포청 유치'를 추진 [썰물밀물] 강화 볼음도의 매력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는 보름달의 발음을 따서 불리는 곳이다. 300명 남짓한 주민이 살고 있는 볼음도는 강화도 서쪽으로 7㎞, 황해도 연백군과 5.5㎞ 떨어진 서해 최북단에 위치한다. 강화 외포리에서 여객선으로 1시간 이상 걸린다. 하늘·바다·땅 모두 청정 지역이며, 무공해 천혜의 고장이다. 조선 인조 때 명나라로 가던 임경업 장군이 풍랑을 만나 여기에 체류하던 중 보름달을 보았다고 해서 한참동안 만월도(滿月島)라고 했다. 섬 북쪽에 봉화산(83m), 서쪽에 요옥산(103m)이 자리를 잡고 있다.대부분의 볼음도 주민은 농업에 종사하 [썰물밀물] 대중 목욕탕의 기억 '목욕 문화'는 인류 문명 초창기부터 함께했다고 전해진다. 고대 그리스에선 기원전 4세기쯤 공중 목욕탕 성행 기록이 보인다. 주로 냇가나 강에서 목욕을 하던 고대 로마인들은 이를 보고 시설을 개선해 전국으로 확산시켰다고 한다. 전성기 로마 제국 목욕탕엔 마사지는 물론 식당·운동·상점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췄다고 알려진다.우리나라에서 목욕은 몸과 마음을 씻는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여겨진다. 불교 영향의 하나이지 싶다. 경주 안압지에선 신라시대 목욕탕 터가 발견돼 주목을 받기도 했다. 조선시대엔 왕실이나 민간에서 온천 [썰물밀물] 전국 '제2 도시' 앞둔 인천의 과제 인천은 1981년 7월1일 경기도로부터 독립했다. 직할시로 승격해 독자적으로 행정·재정 등을 운영했다. 인천시민들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강화한 계기였다. 도시 발전을 거듭한 인천은 공항·항만·산단·경제자유구역 등을 아우르며 국내 산업화와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해 왔다. 5·3 인천 민주항쟁과 노동운동 등을 벌이며 민주화를 이끈 도시로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이런 거침 없는 발전 속에서 인천은 이제 전국 '제2 도시'를 앞두고 채비를 서두른다. 2035년쯤이면 인구가 부산시를 앞지른다는 예상이 발빠른 행보를 보이게 한다. [썰물밀물] 창영초교의 역사성과 장소성 창영초등학교 개교일은 1907년으로 되어 있지만, 잘못됐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승정원일기를 비롯해 각 칙령, 독립신문 등에 따르면 인천 최초로 소학교(현 초등학교)가 세워진 때는 18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7월19일 공포된 소학교령(칙령145호)엔 '인천부공립소학교' 설치를 발표했고, 이듬해 9월22일자 독립신문에도 같은 내용이 실렸다.창영초교 개교의 오류는 1933년 일본인이 발행한 '인천부사'(1883∼1933년)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진다. 여기엔 창영초교와 관련해 “1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