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밝아오는 아침은 우리에게 희망을 얘기한다. “닭 목아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말이 있듯, 찬란하게 비출 여명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미래다. 빛은 어두운 곳을 밝히므로 광명(光明)을 상징하기도 한다. 칠흑 같은 암울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빛은 홀로 처연하기까지 하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어둠은 곧 사그러들기 마련이다.

요즘엔 인위적으로 전기를 얻어 어두운 밤에도 빛을 밝힌다. 그 덕분에 우리는 밤에도 자유롭게 나다니면서 갖가지 활동을 벌인다. 그렇게 된 데엔 불과 한세기도 걸리지 않았다. 그 전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저녁 땅꺼미가 지면, 모든 일을 중지하고 등불에 의존해 생활해야 했다. 지금은 자치단체마다 밤 활동을 이용해 새로운 관광의 물꼬를 트려고 애를 쓴다. '야간관광'을 통해 관광객 소비지출 확대를 꾀하고자 함이다. 한국관광공사는 야간관광을 침체된 관광산업 회복과 경기부양을 위한 신규 핵심사업 중 하나로 추진하고 있다.

야간관광은 세계 주요 국가에서도 대세다. '절대 잠들지 않는 도시(city that never sleeps)' 뉴욕시의 2019년 보고에 따르면, 야간관광을 통해 190억여달러의 경제효과와 19만여명의 고용창출 효과를 거뒀다고 한다. 일본관광청에서도 올해부터 약 10억엔에 달하는 예산을 야간관광 사업 기반 육성 등에 투입하고 있다. 영국 런던 야간경제위원회는 관광객 지출 증대 효과와 더불어 유동인구 증가·우범지대 감소 등으로 인해 심야시간대 위험요소·범죄율 감소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분석했다.

인천시가 인천관광공사와 지난 9일 '대한민국 제1호 야간관광 특화도시 선정'을 기념하는 선포식을 개최했다. '백년의 밤'이 공존하는 빛의 도시로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 앞서 시는 지난 9월 문화관광체육부 주관 야간관광 특화도시 공모에 선정된 바 있다. 당시 시는 '인천백야(仁川白夜)-인천 100년의 밤(仁川百夜)'를 테마로, 19세기 대한민국 문을 열었던 '개항도시 인천'에서 100년 후 다시 찾게 하는 '빛의 도시 인천'으로 도약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시는 2025년까지 국·시비 총 56억원을 투입해 '올 나이츠 인천(all nights INCHEON)'을 슬로건으로 사업을 벌일 방침이다.

시는 이에 만족하지 말고 새로운 관광 트렌드를 선도해야 한다. 인천이 우리나라 야간관광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다. 아름다운 야경과 함께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 조성에 힘을 쏟아 '잠들지 않는 도시'로 변모시켜 나갔으면 한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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