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 보개면 기좌리에서도 정월이면 마을 민속놀이로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숫줄은 남자가 당기고 암줄은 여자가 당기는데 줄을 당기는 도중 여자 노인 중 몇 명이 남자들 쪽에 와서 줄을 못 당기게 회초리로 남자들의 손등을 때렸다고 한다. 그러면 대부분 여자 쪽에서 승리하였고 그해에는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자치안성신문>의 이 기사는 기좌리 마을지인 <적재울의 발자취>에 소개된 내용이라고 했다. 힘 센 편의 손등을 회초리로 친다는 발상이 웃음을 머금게 한다.
기좌리는 안성 한지(韓紙)의 고향이다. 조선 중기부터 안성 기좌리에서는 다양한 한지가 생산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면 새해 책력을 인쇄할 종이를 구하기 위해 관상감에서 안성으로 사람을 파견했고, 기좌리 사람들은 '돈방석'에 올라앉을 만큼 큰 수입을 올렸다. 원래 종이 만드는 일은 손이 많이 가는 고된 작업인데, 그 전통을 이어온 기좌리 사람들이 조선말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보답을 받은 셈이 아닐까 싶다.
'안성판 방각본'이 발간된 것도 기좌리 종이 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 들어 상인들이 사사로이 목판으로 찍어 내어 상업적으로 유통시킨 책인 방각본은 경판(서울)·완판(전주)·안성판으로 나뉜다. 기좌리에서는 박성칠(1856~1923)이 '북촌서포'와 '박성칠서점'(1917년)을 열었다 한다. 당시 안성판 방각본 <춘향전>은 한 권에 10전이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안성판 방각본은 32종이다.
기좌리 한지의 맥은 1907년 큰 시련에 직면했다. 정미의병 부대가 기좌리에 잠시 묵었을 때 일본군과 일진회가 공격을 해왔다. 일본군은 기좌리 마을 3분의 1 이상을 불태웠는데, 종이 만들던 집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다. 그리고 서양 종이가 밀려들어왔다. 기좌리 사람들은 1920년대에 제지조합을 만들고 마분지 생산으로 재기를 노렸다. 하지만 마분지는 한지가 아니었고, 결국 1970년대 중반 기좌리 한지의 맥은 끊겼다. 마을 뒷산 지암산에서는 금광이 발견되어 1940년 경기도내 최고의 금 생산지로 기록되기도 했다. 지암산 금광은 1960년대 초 폐광되었다.
기좌리는 한국전쟁 시기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1950년 7월 경찰과 우익 청년단이 장재울에서 보도연맹원 40여명을 집단학살했다. 희생자가 100명이 넘는다는 설도 있다. 2008년에 마을에 '안성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지'라는 안내판이 세워졌다. 2기 진실화해위는 올해 기좌리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벌일 계획이다. 계묘년에는 기좌리 한지의 맥도 이어지고, 원혼들의 억울함도 풀어지기를 감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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