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1883년 미국과 서구에 보빙사(報聘使)라는 외교사절단을 파견했다. 보빙사 일행은 서구 근대의 문물을 두루 돌아보았다. 미국 보스턴의 한 농장을 시찰한 보빙사는 조선의 전통 농업과 차원이 다른 농법과 농업경영에 큰 감명을 받았다. 홍영식은 귀국 뒤 고종에게 서구식 근대 농업 도입에 앞장 설 모범농장 설치를 건의했다. 그에 따라 1884년 농무목축시험장이라는 모범농장이 망우리에 설치되었다. 관리 책임은 보빙사를 수행했던 최경석이 맡았다. 농무목축시험장은 한국 근대농업의 효시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최경석이 1886년 병사하자 농무목축시험장은 3년 만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일본은 1906년 통감부 직할로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을 설치했다. 권업모범장은 조선의 '농사개량', 즉 일본식 근대 농업 도입을 진두지휘한 기관이다. 농무목축시험장은 이미 10년 전에 사라졌으므로, 권업모범장이 조선 농업의 '근대적 전환'을 지휘하는 최고 기관이 되었다. 권업모범장의 위치는 수원으로 결정되었다. 수원은 조선 정조 임금 이래 조선 농업의 중심이라는 상징성이 강했다. 위도나 기후 측면에서도 조선 농업 표준으로 삼기에 넉넉했다. 게다가 1905년 개통된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국치의 해인 1910년 수원농림학교(후일 서울농생대)가 권업모범장에 통합되었다. 모범장장이 교장을 겸임했다. 1929에는 이름을 농업시험장으로 바꾸었는데, 일제강점기 내내 종자와 종묘 개량, 농업 지도와 권장 사업을 관장했다. 지도·권장의 방식은 강압적인 강요가 기본이었다. 해방 후 미 군정청에 의해 중앙농사시험장으로 개편됐다. 한국 정부 수립 뒤에는 1957년 농사원을 거쳐 1962년 농촌진흥청이라는 국가 기관이 되었다. 농촌진흥청은 2014년 전북혁신도시로 옮겨 갈 때까지 52년 간 수원에 있었다. 권업모범장으로부터 기산하면 108년이다.
무려 한 세기 이상 한국 농업의 표준지였던 곳에 지난 주 국립농업박물관이 개관했다. 국립농업박물관은 옛 농촌진흥청 농업과학도서관이 있었던 장소 일대에 자리 잡았다. 전시동·식물원·교육동·체험존 등 전체 면적이 1만8000㎡ 규모다. 이제 수원에는 국립농업박물관과 산업도로 맞은 편 농업기술실용화재단이 농업도시의 빛나는 유산으로 남았다. 왕조시대 농업에서 근대 농업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이끌던 장소가 이제는 '6차산업'(농업 + 식품제조업 + 유통·판매, 문화, 체험, 관광, 서비스)의 산실로 거듭나야 할 차례다. 한국 농업의 과거-현재-미래를 배우고 느끼고 고민하고 상상하는 발길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양훈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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