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1939년 4월 5년제 안성공립농업학교가 개교했다.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곳곳에서 중등교육 기관 설립을 열망했지만, 조선총독부는 학교 인가에 매우 인색했다. 조선인들은 최소한의 교육만 필요하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후반까지도 농업학교 설립이 가능했던 지역은 많지 않았다. 안성에서는 지역민들의 열망이 워낙 컸고, 독지가 박필병(朴弼秉·1884~1949)이 거액의 설립자금을 댔기에 설립이 가능했다.

박필병은 소유 토지가 1억3000만평이나 되는 안성의 거부였다. 학교설립 후 교정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영귀축(米英鬼畜)을 몰아내는 어뢰'를 만드는 용도로 동상이 헌납되었다. 동상까지 떼어 바치던 시기였다. 안성의 대표적 친일 기업인이었던 박필병이 그 일로 웃었는지, 울었는지 기록은 없다.

안성공립농업학교는 그 후 7번이나 교명을 바꾸었다. 안성공립농업학교(1939)-안성농업중학교(1949)-안성농업고등학교+안성농업중학교(1950)-안성농업고등전문학교(1965)-안성농업전문학교(1970)-안성농업전문대학(1979)-안성산업대학(1991)-국립한경대학교(1999). 계산해 보면, 농업학교였던 기간이 52년쯤 되고, 산업대학 시절이 8년, 국립대학 시기가 23년이다. 농업학교 시절 '안농'은 안성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었고, 한경대는 상당 기간 동안 경기도 유일의 국립대학이었다. 안성의 내로라하는 유지 가운데 '안농' 출신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개교 당시 '안농'은 넓은 터에 자리 잡은 학교였다. 56만㎡(17만평)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런데, 해방 이후 교직원 봉급 줄 돈이 없어 학교 땅을 야금야금 팔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애초에 관립학교로 출발했으므로 해방 후 학교의 관리 주체는 경기도였다. 안성의 일부 관공서가 '안농' 부지에 건물을 짓고 들어왔다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부지를 돌려준 사례도 있다. 현재 한경대 캠퍼스는 16만㎡여서, 초창기의 3분의 1이 채 되지 않는다. 그래도 대학 본부 건물 앞 아름드리나무들이 '안농'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 1940년대부터 심은 나무들이다.

한경대가 2003년 새 학기부터 역시 국립인 평택의 한국복지대와 통합한다. 학교이름도 국립한경대학교에서 한경국립대학교로 바뀐다. 8번째 교명 변경이다. 안성캠퍼스는 정보통신, 반도체, 농업 에너지 분야를 활성화시키고, 평택캠퍼스는 사회적 배려계층의 고등교육 터전으로 더욱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이질적인 교육목표들을 추구해야 하는 과제가 만만치 않다. 83년 연륜의 저력에 기대를 걸어 본다.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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