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법의 시원은 고대 중국인들이 사냥할 때에 몰이꾼과 사냥꾼의 배치 방법을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문종 때 편찬된 <진법>의 서문에서 수양대군은 “연진(連陣) 중에서 외진(外陣)은 6,7,8,9의 수이고, 내진(內陣)은 5와 10의 수이며, 간진(間陣)은 1,2,3,4의 수이다. 이 법이 하도의 문(文)이다. 합진(合陣)의 중위가 내외를 포함하는 것은 5와 10이 내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4위가 방진에 붙어있는 것은 1과 6, 2와 7, 3과 8, 4와 9가 각각 그 방(方)에 붙어있기 때문이다. 이 법이 낙서의 변(變)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하도는 원(圓)으로 연진의 쓰임을 행하고, 낙서는 네모(方)로써 합진의 체를 지킨다”고 하였으며, “방으로써 지키고, 원으로써 행하는 이 법이 천지의 체이다. 외진은 네모이고, 내진은 원이며, 뜻은 밖에서 드러나고, 지혜는 안에 저장되니, 이 법이 음양의 쓰임이다. 각각 작음을 지키니 또한 부자(父子)의 친함이고, 하나를 따르니 또한 군신의 의리이며, 진(陳)에 암컷과 수컷(牝牡)이 있으니 부부의 구별이다. 대오(隊伍)가 서로 사랑하니 형제의 정(情)이고, 법령이 어그러지지 않으니 붕우의 믿음이다. 이 법이 인륜의 도(道)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의 진법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전기의 진법은 북방의 기마병에 대한 방비책으로써 진법 훈련이 시행되었다. 반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선조부터는 남방의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비하는 척계광의 절강 진법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진법 체제로의 전환이 모색되었다. 조선의 침략방어 대상이 북방에서 남방 왜구를 변화되었다는 점과 기존의 북방 기마병을 막는 전술인 오위진법 체제로는 수군과 보병 위주인 왜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진법 전환의 주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1592년 일본군이 침략하여 처음 진격하여 왔을 때 조선군이 일시적으로 후퇴한 것은 당시 조선 군대 편제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과 그 무기가 졸렬한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조총 및 기타 무기의 제조와 아울러 군대 편제 및 기예 단련에 많은 주의를 하게 되었다. 이때 영의정으로 있었던 유성룡은 금군 70여 명을 선발하여 명군에게 보내어 무예를 배우게 하였고, 이보다 먼저 선조는 명장 이여송을 평양에서 만났을 때, 자기 군대가 왜적에게 위력을 발휘한 것은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에 있는 ‘어왜지법(禦倭之法)’을 적용한 까닭이라는 말을 듣고, 명군에게서 이 <기효신서>를 얻어내어 이것을 조선에서 연구하게 하였다.
척계광은 중국 산동성에 있는 군인 가정의 출생으로서 절강 도사의 참장(參將)으로 남방 방비에 종사하였다. 당시 이 지방은 일본 해적이 출몰하여 명나라는 많은 곤란을 겪고 있던 때였다. 그는 1556년, 1560년에 새로 군사를 훈련하고 새 진법을 사용하며 전함과 화기 등을 개조하여 왜적과의 전투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척계광이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으로 만든 것이 바로 <기효신서>이다.
병학지남은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정리한 것으로써 지남은 지침서라는 의미이다. 병학지남의 서문은 정조가 썼다. “우리 조선의 수군, 육군의 정비와 경군과 향군의 훈련 등이 실로 <신서>에서 나오지 아니한 것이 없다. 남쪽 지방은 산과 물이 많으므로 나누고 합하는 것이 유리하고, 북쪽 지방은 평야가 많으므로 방진이 유리하다. 병학의 법은 바둑의 기보와 같다. 기보를 읽은 사람은 바둑을 잘 알게 된다. 바둑 두는 사람이 기보를 떠나서 두는 일은 거의 없다.”
<병학지남>은 다섯 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권은 기고정법과 기고총결에 관한 것이다. 기고정법에는 총통으로 하는 호령, 호적 부는 호령, 나팔 부는 호령, 바라 부는 호령, 명라하는 호령, 북치는 호령, 솔발하는 호령, 징치는 호령, 취타하는 호령, 기화하는 호령, 쇠북치는 호령 등의 신호 규정과 그 사용에 대한 것이 서술되어 있고, 기고총결에는 이상의 신호를 종합적으로 사용하여 이에 대한 실지 행동을 취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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