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과 북, 군대 전진·후퇴 신호로
풍물의미학
▲ 대금과 소금(악학궤범)

조선시대 쟁(錚)을 만들던 쟁장(錚匠)과 북을 만들던 고장(鼓匠)은 병조와 군기감에서 관리하였다. 쟁과 북이 군악기였기 때문이다. 세종 때 쟁장은 2명에서 4명으로 증원되었고, 고장은 6명이었으며, 세조 때 쟁장과 고장은 각각 15인이었다. <세종실록·오례>에서는 쟁은 정(鉦)이라고 하였고, "현녀(玄女)가 황제(黃帝)에게 청하여, 정요(鉦 )를 주조(鑄造)하여 소리를 흉내내게 하였다. 지금의 동라(銅 )가 그 유제(遺制)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정은 어떤 악기일까? <세종실록·오례>의 군례서례·병기에서는 정이라는 악기를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같은 곳에서 설명하고 있는 금(金)과 생김새가 똑같다. 1474년(성종 5년)에 편찬된 국조오례서례에서는 금에 대해, “운회(韻會)에서 행군(行軍)할 때 정(鉦)과 탁(鐸)은 금(金)이라 한다. 석명(釋名)에서는 금(禁)이라 하는데, 전진과 후퇴의 금령을 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북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북은 움직이며, 정은 정지한다(鼓動鉦止)”고 설명하고 있는데, 북의 신호에 의해 전진하고, 정의 신호에 의해 정지하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군사 제도이다.

조칙을 맞이할 때와 사직과 종묘에 왕이 친히 제향할 때, 대가노부(大駕鹵簿)를 사용하였고, 임금이 선농(先農)에 친히 제향하고, 국학에 행차하여 석전례(釋奠禮)를 행하고, 사단에서 활쏘기를 할 때나 무과(武科)의 전시(殿試)에 사단에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할 때 법가노부(法駕鹵簿)를 행하였으며, 능에 참배하고 활 쏘는 것을 관람할 때나 평상시의 대궐 문밖에 거동할 때 소가 노부(小駕鹵簿)를 사용하였는데, 이때 나아가고 멈추는 신호를 금고(金鼓)로 하였다.

1493년(성종 24년)에 편찬된 <악학궤범>에서는 세종이 창제한 무무(武舞) 정대업(定大業) 정재의 의물 도설을 설명할 때, 대금(大金)과 소금(小金)을 소개하고 있는데, “대금은 놋쇠로 만들고 끈은 홍색 실을 쓰며, 대금을 치는 퇴(槌)는 사슴 가죽을 말아서 만든다”고 하였다. 소금은 “채색한 용두머리가 따로 붙어있다. 붉은 색을 칠한 자루를 쓰고, 소금을 때리는 퇴는 나무로 만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전진과 후퇴를 신호하는 금고(金鼓)가 왜 선조의 무공을 노래한 정대업의 반주에 쓰였던 것일까? 문덕을 노래한 문무(文舞)와 무공을 칭송한 무무(武舞)의 춤에는 각각 네 표(表)를 설치하였고, 표 사이의 거리를 4보(步)로 하였다.

악무(樂舞)의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는 법(樂舞進退之法)은 “표(表)를 일무(佾舞) 추는 위치에 세우고, 춤추는 사람이 남쪽 표로부터 둘째 표를 향하면 일성(一成)이 되고, 둘째 표로부터 셋째 표에 이르면 이성(二成)이 되고, 셋째 표로부터 북쪽 표에 이르면 삼성(三成)이 되며, 이에 돌아서 남쪽으로 오되 북쪽 표로부터 둘째 표에 이르면 사성(四成)이 되고, 둘째 표로부터 셋째 표에 이르면 오성(五成)이 되고, 셋째 표로부터 남쪽 표에 이르면 육성(六成)이 되는데, 음악도 또한 여섯 번 변하게 된다. 그러면 천신(天神)이 모두 내리게 되는데, 이것이 천신에게 제사하는 환종궁( 鍾宮)의 여섯 번 변하는 춤이다.

또 남쪽 표로부터 둘째 표에 다시 이르면 칠성(七成)이 되고, 둘째 표로부터 셋째 표에 이르면 팔성(八成)이 되는데, 음악도 또한 여덟 번 변하여 지기(地祇)가 모두 나오게 되는데, 이것은 지기(地祇)에게 제사하는 함종궁(函鍾宮)의 여덟 번 변하는 춤이다.

또 셋째 표로부터 북쪽 표에 다시 이르면 구성(九成)이 되는데, 음악도 또한 아홉 번 변하여 사람 귀신에게 예(禮)를 올릴 수 있으니, 이것은 사람 귀신에게 제향(祭享)하는 황종궁(黃鍾宮)의 아홉 번 변하는 춤이다.“(세종 12년, 1430년 2월 19일 박연의 상서 기사) 」 이 네 표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서는 절차가 곧 무무(武舞)의 법인데, 이때 나아가고 물러서는 반주를 금고(金鼓)로 하였다.

1787년인 정조 11년에 장용영(壯勇營)에서 간행한 <병학지남(兵學指南)>은 명나라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紀效新書)>에서 군대의 조련방법에 관한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병학지남>은 한문으로 기술하고 이를 한글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금은 '증'으로, 고는 '붑'으로 풀이하고 있다. 즉 금은 오늘날의 '징'에 해당하고, 고는 '북'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성섭 풍물미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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