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지금까지 군악은 반드시 전쟁과 관련되어 쓰였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군악대가 각종 행사 때 위문공연을 하듯이, 옛날에도 군악이 각종 연향에 사용되었다. <통전>에 의하면, 중국에서도 천자가 군신들과의 향연에서 고취를 사용하였는데, 이를 황문고취라 하였다. 신라 때 고취악에 쓰였던 가(茄)라는 악기가 연향인 가무(茄舞)에 쓰인 적이 있고, 백제에서도 정월에 하늘과 땅에 제사지낼 때 고취를 사용하였는데, 그때에는 반드시 춤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조선에서도 군악과 연향악을 동시에 연주한 이들이 있었는데, 이를 특별히 세악수(細樂手)라 하였다.
세악수라는 직책은 조선 전기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승정원 일기>의 숙종 23년인 1697년 11월 13일 기사에 의하면, 우참찬 민진장이 “군문의 세악수는 근년 이래에 비로소 창립하였으나, 상시 별도로 절박하게 사용할 데가 없습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때 비로소 세악수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숙종 29년인 1703년 2월 18일의 기사를 보면, 총융사 이우항이 과거에 오른 자와 혼인을 맺어 친척이 된 집안에 그 군문의 세악수를 친히 거느리고 모여서 종일토록 잔치를 벌렸으니 그를 추고해야 한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국가의 녹봉을 받는 세악수를 사적인 집안 잔치에 동원하여 각종 악기를 연주하게 한 직권을 남용하였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악수는 과연 어떤 악기를 연주했을까? 1785년(을사년) 악산헌의 아버지가 안릉(평안도 안주목)의 목민관으로 부임했을 때, 그 행렬의 성대함을 보고 약산헌이 1786년(병오년) 화공 김사능(김홍도)에게 그리게 했다는 <안릉신영도>를 보면, 세악수라는 표기와 함께 여섯 명의 악사가 등장하는데, 이때 악사가 연주한 악기는 북, 장고, 대금, 필률 2, 해금의 여섯 가지였다.
세악수가 연주한 여섯 가지의 악기를 흔히 삼현이라고 한다. 1843년(계묘년) 유만공이 편찬한 <세시풍요>는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그믐까지 다양한 세시풍속이 월별로 기록되어 있는데, 유만공은 19세기 세시기를 지은 <경도잡지>의 저자 유득공의 손위 사촌간이며, 당대 진보적 문장가인 연암 박지원과도 교우했던 사람이다. 유만공은 <세시풍요>의 원석(元夕), 즉 정월 보름날 밤에 “중촌 사람들이 밤에 모여서 노는 것을 촉유라고 하고, 세악은 삼현이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세악수는 초기에는 국가의 녹봉을 받고 있었으므로 사가에 나가 연주할 수는 없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사가에서 연주활동을 하게 되었다. 국가에서 더 이상 급여를 책임질 수 없게 되어 반관반민의 처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활동을 묘사한 그림이 바로 김홍도가 그린 <무동>과 신윤복이 그린 <쌍검대무>이다.
김홍도가 그린 <무동>에도 여섯 명의 악사가 등장하여 북과 장고, 필률 2, 대금, 해금을 연주하고 있는데, 피리를 부는 악사와 해금을 연주하는 악사는 군복을 입고 있으며, 나머지 네 명은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있다. 반면에 혜원이 그린 <쌍검대무>에서는 북을 치는 악사만이 군복을 입고 있고, 나머지 악사는 도포에 갓을 쓰고 있다.
1867년 고종 4년에 반포한 육조 각 관아의 사무 처리에 필요한 행정법규와 사례를 편집한 법제서인 <육전조례>를 보면 각 군문 중에서 금위영의 취고수가 100명, 세악수가 35명이었으며, 어영청의 취고수 117명, 세악수가 25명이었고, 용호영의 취고수가 39명, 세악수 15명, 겸내취 10명이었으며, 훈련도감의 취고수 196명, 세악수는 25명, 겸내취 12명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22년 10월 19일의 기사를 보면, 용인, 진위, 안산, 시흥, 과천의 군액 총수를 나열하고 있는데, 용인에는 장악원 악생보 12명, 안산에는 내취보가 1명, 장악원 악생보 3명, 세악수 4명이었으며, 시흥에는 장악원 악생보가 4명이었고, 과천에는 세악수가 20명이었다. 또한 <승정원일기> 정조 4년(1780년) 9월 4일의 기록을 보면, 총융청에서 계하기를 파주의 취고수가 36명, 세악수가 6명이었으며, 1832년 임효헌이 편찬한 개성의 향토지리지인 송경광고(松京廣攷)를 보면, 취고수가(吹鼓手)가 50명, 세악수(細樂手)가 30명이었다.
<비변사등록> 고종 12년인 1875년 9월의 기록에서는 인천 방어영에 세악수가 6명이었고, 1871년 <경기읍지> 중의 인천부읍지에 의하면, 본읍인 인천읍의 세악수보가 18명이었고, 훈국에서 보내온 기물 중에는 호적이 2, 나팔이 2, 목대각이 2, 나 1, 솔발 1, 행고 2좌였다. 또한 대한 광무3년인 1899년 부평군읍지에 의하면 취고수가 49인이었는데, 전국 각지에 세악수가 배치되어 각종 연행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성섭 풍물미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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