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소(太平簫)는 군대에서 사용하였던 악기였다. 세종 12년인 1430년 4월 22일의 기사에 의하면, 병조에서 강무(講武)로 거동할 때에 취라치(吹螺赤)와 함께 중군(中軍)에 속한 태평소는 붉은 표장을 등에 붙이게 하였으며, 좌군(左軍)에 속한 취라취·태평소는 푸른 표장을 왼쪽 어깨에 붙이게 하였고, 우군(右軍)에 속한 취라취·태평소는 흰 표장을 오른쪽 어깨에 붙이게 하였다.
강무는 군막(軍幕)에서 군병을 훈련하고, 군사를 크게 사열(査閱)하며, 병법을 익히고, 싸우고 진(陣)치는 제도를 익히는 것을 말하는데, 사냥하는 법과 통하였다. <세종실록> 부록에 수록된 <강무의>에 의하면 병조에서 사냥하는 영[田令]을 나누어 알려서, 드디어 에워싸서 사냥하게 하였다. 그 양익(兩翼)의 장수가 모두 기를 세우고 그 앞은 빠뜨린 채 에워싸면 몰이하는 기병을 설치하였다. 유사가 이에 짐승을 세 번째 몰이하여 지나갈 때 임금이 그제야 짐승을 따라 왼편에서 이를 쏘았다. 몰이할 적마다 반드시 짐승 세 마리 이상으로 하였는데, 임금이 화살을 쏜 뒤에야 여러 군(君)들이 화살을 쏘고,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차례로 이를 쏘았으며, 이를 마치고 몰이하는 기병이 그친 뒤에야 백성들에게 사냥하도록 허락하였다.
조선 때의 음악은 크게 등가(登歌)와 헌가(軒架)로 나뉘어진다. 등가는 당상에 올라 연주되는 음악인데, 이에 맞추어 당하에서 문무(文舞)를 춘다. 뜰 아래에서 배치하고 연주하는 것이 헌가인데, 이에 맞추어 무무(武舞)를 춘다. 세종 때 헌가에서 태평소가 사용되었는지는 자료가 미비하여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세조 때 편찬된 악보 중에 헌가의 그림을 보면, 노래하는 이와 함께 월금, 가야금, 당비파, 방향, 필율, 장고 등과 더불어 태평소 둘을 배치하여 연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그림이 성종 5년인 1474년에 펴낸 바 있는 <국조오례의·서례>의 속부악현도설에서는 종묘나 영녕전 헌가 때 태평소 둘을 배치하였고 전정헌가도설에서도 태평소 둘을 배치하고 있다. 적어도 세조 때부터 헌가에서 무무를 출 때 태평소가 연주되었던 것이다.
세종이 창제한 신악(新樂) 문무 보태평(保太平)과 무무 정대업(定大業)은 세조 때 간략하게 새로 정해지게 된다. 이때 종묘 제사의 초헌에서는 보태평을 연주하였으며, 아헌에서 정대업을 연주하였다.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에서 태평소를 설명할 때, 정대업 중 첫 번째 악장인 소무(昭武), 여섯 번째 악장인 분웅(奮雄), 마지막 악장인 영관(永觀)에서 태평소를 겸용하였다고 하였다. 태평소는 문무와 달리 무공(武功)을 드러낸 악장에서만 사용하였던 것이다.
태평소는 마상병(馬上兵), 즉 군인이었다. 성종 6년인 1475년에 취라치(吹螺赤)가 640명이었고, 태평소는 60명이었으며, <대전>에 의하면, 취라치·태평소는 5번으로 나누어 4삭(朔)마다 상체(相遞)하였다. 네 달마다 서로 임무를 교대한 것이다. 취라치와 대평소는 종5품에 거관(去官)하였다. 태평소는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전국에서 동원되어 행사를 마친 뒤에나 급료를 받았던 재인(才人)들과는 처지가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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