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때 첫 등장
태평소, 풍물사 한 획
▲ 악학궤범 중 태평소 설명 부문.

현행 풍물은 조선시대의 풍물과 차이가 있다. 현행 풍물은 무수한 과정을 거쳐서 현재의 모습을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풍물의 변천사를 살펴볼 때 가장 숙고해야 하는 부분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악기이다. 현행 풍물이 조선시대의 풍물과 현격하게 차이나는 악기는 바로 태평소(太平簫)와 북(鼓), 소금(小金)과 징(鉦)이다.

현행 풍물에는 매우 독특한 악기가 있다. 풍물에 속하는 악기인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악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태평소이다. 태평소는 고려 시대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악기이다. 고려시대 당악에는 방향(方響, 16매), 통소(洞蕭·8구멍), 적(笛·8구멍), 필률(觱篥·9구멍), 비파(4줄), 아쟁(7줄), 대쟁(15줄), 장고(杖鼓), 교방고(敎坊鼓), 박(拍)을 사용하였고, 속악에는 현금(玄琴·6줄), 비파(5줄), 가야금(12줄), 대금(12구멍), 장고, 아박(牙拍·6매), 무애(無㝵), 무고(舞鼓), 해금(2줄), 필률(7구멍), 중금(中笒 ·12구멍), 소금(7구멍), 박을 사용하였으며, 고취에는 금정(金鉦), 강고 (掆鼓), 도고(鼗鼓)를 사용하였을 뿐, 태평소를 사용한 적은 없었다.

태평소라는 악기는 그 유래를 찾기 힘든 악기이다. 중국의 악기 관련 서적에도 호적(胡笛)이라는 악기는 있지만, 태평소라는 악기를 찾아볼 수는 없으며, 호적과 태평소는 다른 악기이다. 조선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태평소라는 악기 명칭은 어디서 유래한 것이고, 언제 도입된 악기일까?

태평소라는 악기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조선 태조 때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인 1394년 10월 5일의 기사에 의하면, “서북면 도절제사 최영지(崔永沚)가 가족을 인솔하고 투화(投化)해 온 사람 한 명을 잡아서 보내 왔는데, 소(簫)를 잘 불었으므로 '대평소(大平簫)'라 하였다”는 것이다. 최영지(崔永沚)는 안주(安州)·의주(義州)·이성(泥城)·강계(江界) 등의 병마 도절제사 겸 안주 목사(兵馬都節制使兼安州牧使)였는데, 이때 소를 잘 부는 사람이 귀화하여 그를 '대평소'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으로부터 태평소는 북방 민족이 사용하였던 악기라고 할 수 있다. '대평소'는 '태평소'와 통한다.

태종 때부터 태평소를 익히기 시작하였다. 태종 16년인 1416년 7월 16일의 기사에 의하면, “태평소를 익히는 사람이 처음에는 29인이었는데 19명으로 줄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세종 8년인 1426년 3월 12일 중국에서 사신 윤봉(尹鳳)과 백언(白彦) 일행이 서울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이때 사신이 태평소를 가지고 왔다. 세종은 병조에 군기감에서 그 모양대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전습(傳習)시키라고 하였다.

▶2편에서 계속

/송성섭 풍물미학연구소 소장



관련기사
[풍물의 미학] 17. 풍물과 군악(3-2) 태평소(太平簫)는 군대에서 사용하였던 악기였다. 세종 12년인 1430년 4월 22일의 기사에 의하면, 병조에서 강무(講武)로 거동할 때에 취라치(吹螺赤)와 함께 중군(中軍)에 속한 태평소는 붉은 표장을 등에 붙이게 하였으며, 좌군(左軍)에 속한 취라취·태평소는 푸른 표장을 왼쪽 어깨에 붙이게 하였고, 우군(右軍)에 속한 취라취·태평소는 흰 표장을 오른쪽 어깨에 붙이게 하였다.강무는 군막(軍幕)에서 군병을 훈련하고, 군사를 크게 사열(査閱)하며, 병법을 익히고, 싸우고 진(陣)치는 제도를 익히는 것을 말하는데, 사냥하는 법과 통하였 [풍물의 미학] 15. 풍물과 군악 (2) 풍물(風物)은 “무릇 거동하실 때에 어가(御駕)의 앞뒤에서 고취하거나 칙사를 환영하는 연향(宴享)할 때에 사용되는(凡擧動時, 駕前駕後鼓吹及, 迎勅宴享時所用)<인조 25년 1647년>” 악기를 일컫는다. <세종실록·오례>의 고취에 의하면, 풍물은 방향(方響), 화(和)와 생(笙), 노래(哥), 비파(琵琶), 필률(觱栗), 우(竽), 월금(月琴), 적(笛), 현금(玄琴), 가야금(伽倻琴), 아쟁(牙箏), 대쟁(大箏), 향필률(鄕觱栗), 퉁소(洞簫), 해금(奚琴), 대적(大笛), 장고(杖鼓)라 할 수 있으며, 영조 41년인 1765년 영 [풍물의 미학] 14. 풍물과 군악 (1) 인간은 전쟁과 더불어 살아왔다. 전쟁은 인간의 존립을 위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존립 기반이기도 하다. 생존의 지평인 대지를 확대하거나 수호하기 위한 전쟁은 인간에게는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타인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전쟁은 인간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전쟁이란 국가의 큰일이며, 삶과 죽음의 바탕이고, 존속과 멸망의 길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兵者,國之大事,死生之地,存亡之道,不可不察也).” <손 [풍물의 미학] 18. 풍물과 군악(4) 조선시대 쟁(錚)을 만들던 쟁장(錚匠)과 북을 만들던 고장(鼓匠)은 병조와 군기감에서 관리하였다. 쟁과 북이 군악기였기 때문이다. 세종 때 쟁장은 2명에서 4명으로 증원되었고, 고장은 6명이었으며, 세조 때 쟁장과 고장은 각각 15인이었다. <세종실록·오례>에서는 쟁은 정(鉦)이라고 하였고, "현녀(玄女)가 황제(黃帝)에게 청하여, 정요(鉦 )를 주조(鑄造)하여 소리를 흉내내게 하였다. 지금의 동라(銅 )가 그 유제(遺制)이다“라고 하였다.그렇다면 정은 어떤 악기일까? <세종실록·오례>의 군례서례·병기에서는 정이라는 악기를 그림으로 [풍물의 미학] 19. 풍물과 군악(5) 군사의 훈련에서 중요한 것이 형명(形名), 즉 깃발과 금고(金鼓)이다. 군사들이 앉고 일어서고 전진하고 후퇴하는 좌작진퇴(坐作進退)와 관련된 것이 금고다. 세종 3년인 1421년 7월 병조에서 진법과 그 운용에 관한 글에서 금(金)과 고(鼓)의 쓰임새를 밝힌 바 있는데, 현행 풍물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많다.우선 행진법(行陣法)에서는 중위(中衛)에서 각(角)을 한통(一通) 불고, 북(鼓)을 한통 치면, 각 위(衛)에서 이에 응하여 군사를 정돈하고, 중위에서 각을 불고 행진하라는 북을 진동하면, 우위(右衛), 전위(前衛), 중위( [풍물의 미학] 20. 풍물과 군악(6) 조선의 진법은 태조가 삼군부(三軍府)에 명령을 내려서 《수수도(蒐狩圖)》와 《진도(陣圖)》를 간행하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태조 때 정도전이 일찍이 《오진도(五陣圖)》와 사시의 사냥하는 것을 그린 그림인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를 만들어 바치었는데, 당시 정도전·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 등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에 나가기를 꾀하였기 때문이다.세종은 오례를 정비하였는데, 군례의 의식 중에는 해마다 9월과 10월 중에 도성 밖에서 십간(十干)의 갑(甲)·병(丙)·무(戊)·경(庚)·임(壬)에 해당하는 강일(剛日)에 대열하는 의식인 [풍물의 미학] 21. 풍물과 군악(7) 진법의 시원은 고대 중국인들이 사냥할 때에 몰이꾼과 사냥꾼의 배치 방법을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문종 때 편찬된 <진법>의 서문에서 수양대군은 “연진(連陣) 중에서 외진(外陣)은 6,7,8,9의 수이고, 내진(內陣)은 5와 10의 수이며, 간진(間陣)은 1,2,3,4의 수이다. 이 법이 하도의 문(文)이다. 합진(合陣)의 중위가 내외를 포함하는 것은 5와 10이 내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4위가 방진에 붙어있는 것은 1과 6, 2와 7, 3과 8, 4와 9가 각각 그 방(方)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