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모·대포수…現 풍물에 조선 흔적
풍물의미학
▲ 김준근 포수.
▲ 김준근 포수.

조선의 풍물은 현행 풍물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조선 풍물과 현행 풍물이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전혀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현행 풍물에는 조선 풍물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상모(象毛)이다. 정대업의 무무(武舞)를 출 때 사용되는 의물 중에 투구( )가 있는데, 이때 홍색 상모(象毛)를 얹었다. 또한 현행 열두 발 상모를 돌릴 때 사용한 것이 피변(皮弁)인데, 이 또한 무무(武舞) 정대업을 출 때 착용한 것이었다.

조선 풍물과 현행 풍물의 연관성을 알려주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대포수이다. 현행 풍물에서 대포수는 치배들의 동선에서 이탈하여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도 딱히 별도의 역할은 없는 듯하다. 현행 풍물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 같이 보이는 대포수는 어떤 이유로 조선 풍물에서 등장하게 되었을까?

조선의 빈례에 의하면, 중국의 칙사가 오기 직전에 성문을 나서서 연습하는 것이 관례였다. 순조 때 제작된 빈례총람(儐禮總覽)에 따르면, “칙사가 한양에 들어올 임시(臨時)하여 헌가(軒架)를 교외로 끌고 나가 의례를 사습(私習)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784년에는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책봉이 거행되어 청나라의 봉전칙사(封典勅使)가 11월에 오게 되었는데, 정조는 1738년(戊午年) 사도세자의 책봉을 위한 행사를 전례로 삼아 나례를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거의 50년 만에 정식으로 나례가 설행하게 된 것이다.

11월에는 칙사가 한양에 당도하기 때문에 영접을 위한 준비가 이전부터 바쁘게 진행되었다. 이번 칙사의 특별한 행차를 환영하기 위해 전무후무한 환영식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큰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1784년 정조 8년 11월 한밤중에 일어난 방포(放砲) 소동이다.

이번 나례에서 연희와 관련한 부분은 변수(邊首) 두 사람이 책임을 맡고 있었다. 도변수(都邊首), 즉 전체 책임자는 탁문한이었고, 변수는 심사득이었다. 탁문한은 산대의 조성을 책임진 장인변수였고, 심사득은 유희를 책임진 유희변수였다.

도변수(都邊首) 탁문한은 본인이 장인변수로서 산대의 조성을 담당하고 있는데, 처음 만든 산대가 무너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사습(私習)하는 장면을 보려고 양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난간에 올라가 구경하다가 이를 무너뜨린 것이다. 이에 탁문한은 사습하는 갖가지 유희를 모두 함께 문밖으로 내쫓았다. 그런데 다시 만든 산대를 검사하는 중에 세 방의 총성 소리가 도성을 뒤흔들었다.

금위영(禁衛營) 대년군(待年軍)으로서 나례도감의 변인(邊人)은 임광록이었다. 50년 만에 열리는 나례이기 때문에 그는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때 변수 심사득이 유희를 사습하기 전에 방포하고 취타하는 예가 있었다고 조언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11월 4일 밤, 총을 쏘면 좋은 구경거리가 되겠다고 생각한 임광록은 여러 사람과 상의한 후에 조총과 화약을 가져다가 쏘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총에다가 철환을 넣었어야 했으나 도리어 화약을 과도하게 넣은 후 세 차례나 방포하였다. 그런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동요하는 소동이 발생한 것이었다. 대체로 나례청은 예로부터 좌변(左邊)과 우변(右邊)으로 나뉘어 나례를 준비하였다. 그 때문에 갖가지 변괴의 일을 숱하게 만들어내고서는 기이한 구경거리로 삼아 서로 이기려는 고질병이 있었다. 변인(邊人) 임광록의 방포 사건도 좌우변 나례의 경쟁심 때문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칙사가 올 때 나례를 설행하던 관례가 이후부터 폐지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건은 차이나는 방식으로 반복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위장한 반복을 새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나례 때 행해지던 방포 역시 이번에는 놀이라는 형식으로 반복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냥놀이>였다.

1865년 대원군은 임진왜란 이후 폐허로 남아있던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때 일꾼들의 고된 노동을 위로하기 위하여 전국의 공연패들을 불러모아 대규모 공연을 펼쳤는데, 그때의 정황을 기록한 <기완별록>에 의하면, <사냥놀이>는 그중의 하나였다.

나례 때 행해지던 방포는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식의 하나였다. 그러한 방포가 정조 때의 사건에 의해 폐지되었다가, 대원군 때 <사냥놀이>라는 가면을 쓰고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사냥놀이>는 독자적인 명맥을 유지하고 못하고, 현행 풍물에서 대포수의 모습으로 초라하게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송성섭 풍물미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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