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이주 1세대, 일찍부터 자리잡아
세계 최초로 미얀마 대표부 사무실 개설
만남 장소로 유명…주말마다 촛불집회
인천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다니는 부평역 앞. 주말마다 부평역 한쪽에서는 미얀마 청년들이 조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이들은 비록 한국에서 안전한 삶을 살고 있지만, 고국인 미얀마가 군부독재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 있는 미얀마인들의 단결을 촉구하고 한국국민에게 관심과 도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미얀마 이주 1세대들이 일찍부터 자리 잡은 부평역 일대는 한국에 거주하는 미얀마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하고 익숙한 만남의 장소로 통한다. 일주일 동안 전국의 공장이나 건설현장에서 힘들게 일하던 미얀마사람들이 주말이면 어김없이 부평역으로 모여 불교 사원을 찾고, 친구들을 만나 고국의 음식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그런 곳이었다.
지난해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대항하는 민주항쟁이 시작되면서 이제는 부평역 일대가 미얀마 민주항쟁의 성지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에 서울에 군부독재에 편입된 주대한민국 미얀마 대사관이 있는 반면 인천 부평에는 민주정부와 연계된 주대한민국 미얀마연방공화국 대표부가 자리 잡고 있다. 미얀마연방공화국은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에 대항해 민주정부와 소수민족이 힘을 합쳐 2021년 9월 4월 처음으로 구성됐고, 현재 대통령과 총리, 장·차관 등 37명의 대표가 활동하고 있다. 미얀마 각국 대표부는 한국과 일본, 중국, 호주, 프랑스 등 7개 나라에 설립돼 있다. 세계 최초로 한국에는 미얀마 대표부 사무실이 개설되기도 했다.
“탄압 피해 이국행…한국 살면서 계속 민주화운동”
미얀마 민주항쟁 1세대…작년 특사 임명
30년만에 귀향 계획 불구 쿠데타로 좌절
주대한민국 미얀마연방공화국 대표부 얀나이툰 특사를 부평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미얀마 민주항쟁 1세대로 1992년 한국에 들어왔다. 1988년 있었던 군부독재에 맞선 '88학생항쟁'의 주역으로 군부독재의 탄압을 피해 태국을 거쳐 어렵게 한국까지 온 것이다.
“저는 한국에 살면서 계속 민주화 운동을 해왔습니다. 이번 2021년 2월에 쿠데타가 일어난 후 저는 적극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2021년 8월 16일에 미얀마 대표부의 특사로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지금 미얀마 상황은 최악이라고 한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미얀마 국민들은 평화로운 시위로 쿠데타에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군부의 잔인한 탄압으로 인해서 국민들은 무장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상황은 미얀마 여러 지역에서는 군부 쿠데타에 대항해 이렇게 무장 투쟁으로 싸우고 있는 내전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군부쿠데타에 이어 코로나19가 닥쳤고, 최근에는 세계적인 경제 위기로 미얀마 국민들의 생활을 비참할 정도라고 한다.
“쿠데타가 일어나는 시기에는 미얀마가 코로나가 너무 심한 상황이었습니다. 군부 관계자들만 이런 어려운 상황에 잘 먹고 잘 살고 있지만, 대다수 미얀마 국민들은 아주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그는 평일에는 공장에서 생업에 몰두하고 주말이면 부평 사무실로 출근해 특사업무를 보고 있다.
“제가 대표적으로 하는 활동은 한국의 정부, 국회,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미얀마의 상황을 잘 알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한국에 와 있는 미얀마 국민들을 도와주고, 외교적으로는 한국과 미얀마의 민족통합정부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계속해온 그는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정부가 정권을 잡은 후 미얀마로 돌아가려고 준비했다가 이번 쿠데타로 좌절하고야 만다.
“한국에 온 지 30년 동안 아직 한 번도 미얀마에 가질 못했어요. 2020년 선거에 또다시 민주정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미얀마로 돌아가 여러 활동을 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지만 2021년 2월 군사쿠데타로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됐습니다.”
최근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미얀마 상황이 이슈에서 밀려나고 있지만 그는 미얀마 국민들에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함께 하자고 호소했다.
“저희 미얀마 국민들은 역사적으로 쿠데타를 네 번 정도 반복적으로 겪었습니다. 많은 학살과 탄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쿠데타는 마지막으로 생각합니다. 국내에 있는 저희 친구들도 쿠데타에 대항하고 있고, 외국에 나와 있는 분들도 국내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다 같이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 걱정돼…미얀마, 한국 배워야”
88항쟁 주역…얀나이툰 특사와 같이 한국행
부평서 음식점 운영…민주정부 지원에 열심
미얀마 88학생항쟁의 주역으로 군부정권의 탄압을 피해 얀나이툰 특사와 함께 한국에 온 윈라이 대표를 만났다. 그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수치여사의 민주정부를 지지하고, 군사정권을 반대하는 문구와 그림이 가득했다.
“한국 온 계기는 현재 미얀마처럼 1988년도에 쿠데타가 있었어요. 우리 반정부 운동 하다가 한국으로 오게 됐었어요. 지금 현재 식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얀나이툰 특사와 마찬가지로 2005년에야 난민인정을 받은 그의 한국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는 20살 청년에게는 너무나 버거웠다.
“직장 다닐 때 처음에는 나이도 어리고 혼자 너무 힘들어서 여러 번 그냥 화장실에 가서 울었었던 것 같아요.”
그는 고생끝에 일찍이 부평에 미얀마 전문 음식점인 밍그라바를 열고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부평에 자리 잡은 것은 한국에 들어온 3만 여명 정도의 미얀마사람들이 주말이면 미얀마 음식점과 사찰이 있는 부평으로 몰려들기 때문이다.
“부평은 미얀마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부평에 처음 미얀마 가게가 생겼고, 이후 미얀마 불교 사원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부평에 생겼어요. 미얀마 사람들은 대부분 행사들이 불교와 관련된 경우가 많아서 사람들이 이곳에 모이게 됐죠. 이후 하나 둘 미얀마 가게들이 모여들었고 가게가 많아지니까 또 사람들도 많이 오고 계속 그런 식으로 돼서 지금은 부평역 일대가 미얀마 거리 비슷하게 된 거죠.”
현재 이 일대에는 미얀마 불교 사찰 5곳에, 미얀마 가게만 30여 곳이 성업 중이다.
그는 지난 2015년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30년 만에 미얀마를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랜 한국생활 탓일까 외국을 나가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해 쿠데타 이후 또다시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항상 얘기할 때마다 조심하라고 얘기해요. 왜냐하면 요즘 미얀마 상황이 어떻게 보면 인간들이 하는 짓이 아니니까 그냥 아무 죄 없는 관련 없는 사람들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부모를 못 잡으니까 그런 정도로 그냥 잔인한 사람들이니까.”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얀마 뉴스가 묻혔지만 현재도 국민들의 무장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다른 이슈에 밀려 미얀마가 잠잠해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지 않아요. 게릴라 작전이 도시까지 들어왔어요. 특히 요즘 10대, 20대 젊은 친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무장투쟁을 하고 있어요. 우리는 민주주의를 뜻을 정확히 모르면서 외쳤지만 지금 친구들은 몸으로 경험했기에 군부정권은 절대 용납 못한다는 그런 의지가 더 강해요.”
그렇기에 그는 미얀마 민주정부 지원활동에 열심이다.
“우리가 해외에서 할 수 있는 건 미얀마 사태를 정확히 알리고 그들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한 달에 하루 임금이라도 미얀마를 지원하자고 운동을 벌이고 있고 참여하는 친구들이 꽤 많아요.”
지금 그의 바람은 민주화된 미얀마를 보는 것 하나뿐이다.
“미얀마는 원래 나라는 부잔데 국민들이 가난하고, 한국은 아무도 없는 데에서 성장해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만큼 미얀마 발전을 위해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일부터 하나하나 모두가 실천해간다면 우리도 멀지 않아 한국처럼 쿠데타가 무너지고 민주주의 국가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군부 쿠데타 소식에 마음 아파…한국은 제2의 고향”
인천대 졸업·서울대국제대학원 입학
“한국·미얀마 정치, 비슷한 점 많아”
이번에 인천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제대학원에 입학한 묘헤인씨는 10년 전 한국에 온 미얀마 유학생이자 외국인노동자이다. 그는 미얀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공부에 관심이 없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2006년부터 한국에서의 외국인 노동자 생활은 그의 인식을 바꿨다.
“미얀마에서는 청년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꿈이 무엇인지 이렇게 스스로 파악할 기회가 없어요. 저도 스스로 많은 시간 동안 힘들게 생각해보고 꼭 정치외교학과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미얀마에서의 대학생활을 인정받아 3학년에 편입했지만, 인천대에서의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편입해서 2년만 더 다니면 졸업할 수 있다고 좋아했는데 실제로는 너무 힘들었어요. 첫 학기부터 전공을 다섯 과목이나 들어야 했거든요. 그때 너무 지치고 힘들어 학과 사무실에 가서 그만두고 싶다. 아니면 전과를 하고 싶다고 물어보기도 했어요.”
전공과목별로 수많은 과제와 발표, 각종 시험이 그에게 닥쳐왔지만, 기숙사와 학교만 오가며 공부에 매달린 결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과 미얀마 정치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한다.
“한국도 1960년대에 쿠데타가 있었고 또 군사독재를 오랫동안 경험해 봤잖아요. 미얀마에서도 마찬가지로 쿠데타와 군부독재가 있었고요. 양국 모두 민주주의 국가로 출발했는데 미얀마는 점점 나빠지고, 한국은 점점 좋아지는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 유학한 온 이후 발생한 미얀마 군사쿠데타에 대해서도 솔직한 심정을 얘기했다.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제가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절망적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리고 미얀마에서 시위가 많이 있었는데 군부탄압으로 인해 죽어가는 국민들의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묘헤인씨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한국은 저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죠. 한국에서 대학 졸업하고 또 대학원도 다니니까요.”
그는 미얀마가 정상화되면 한국과 미얀마를 오가며 생활하고 싶다고 했다.
“봄·가을은 한국에서, 여름·겨울은 미얀마에서 생활하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양국을 오가며 사업을 할 수 있으면 더 좋고요.”
/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사진 이재민 기자 leejm@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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