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을 대표하는 화교의 유산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장면이다. 인천에서 탄생해 전국으로 퍼져나간 히트상품이다.
100년 넘는 인천 화교의 역사 속에서 자장면과 함께 또 하나의 대표적인 화교 유산이 바로 중국 무술이다.
그중에서도 중국 청나라의 황실무술인 팔괘장은 인천으로 전래해 발전하면서 인천 노파 팔괘장이라는 유파를 새롭게 만들기도 했다.
인천의 대표적인 화교 유산인 자장면과 팔괘장, 그 속에 담긴 화교와 한국인의 공존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인천 대표 중국음식점 풍미 조지미 사장
고향 처럼~
전국민 사랑 맛집 중 손꼽히는 한 곳
자장면만 7종·오향장육 등 3대 풍미
“대부분 중국인과 구분 못해 좀 섭섭
다양한 즐길 거리 많았으면 새 바람”
“남편과 아들이 나고 자란 곳이 차이나타운이고, 장사를 열심히 해서 손님들도 많이 와주셨어요.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장사해 왔어요.”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의 맛집으로 손꼽히는 곳 중 한 곳이 바로 풍미(豊美)다.
오랜 시간 동안 차이나타운을 지키며 옛 맛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풍미 3대 사장 조지미(70)씨는 화교 2세다.
그가 차이나타운에서 음식점을 운영해 온 지는 40여년. 시부모님의 음식점 운영 경력까지 합치면 무려 70년의 역사를 가진 곳이 됐다.
전 국민의 사랑을 넘어 세계적인 음식이 된 짜장면이 시작된 인천에서 풍미 3대 사장으로 수준 높은 음식을 선보이는 것이 그의 첫 번째 목표다.
차이나타운 맛집답게 짜장면 메뉴만도 무려 7개. 짜장, 간짜장은 기본이고 백짜장, 삼선짜장, 고추간짜장 등 다양한 짜장을 풍미에서만 맛볼 수 있다.
조씨는 짜장 외에도 풍미 3대 음식으로 춘권, 오향장육, 소양동부를 꼽는다.
춘권은 채소를 볶아서 달걀 피를 말아서 튀기는 옛날식이 유지되고 있고 오향장육은 소고기 대신 돼지고기 사태를 써서 부드럽다. 소양동부는 표고버섯에 고기와 새우를 다져 넣어 튀긴 후 소소를 올리는 음식으로 인기가 높다. 시간이 흘렀지만, 옛 조리 방식을 이어가려는 그의 노력인 셈이다.
24살에 결혼한 뒤 생활을 시작한 차이나타운은 지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목욕탕, 이발소 등이 있는 그저 평범한 주택가였다.
그러나 일자리를 위해 서울이나 미국, 일본 등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동네가 확 바뀌었다. “제가 시집올 때는 이 동네에 어르신들도 많고 집안 식구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1980년대에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많이 이민을 가셨어요. 연세 많은 분만 남고 학생들도 줄고. 사람들이 차이나타운이라는 곳을 와보면 저녁에는 컴컴하고 그러니까 여기가 꼭 빈민촌 같다는 그런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반면 조씨는 터를 지키기로 결정했다.
“떠나신 분도 많다 보니 음식점을 하는 분이 그때 당시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손님들이 오면 차이나타운에 대해서 많이 홍보도 하면서 꾸준히 여기를 지켜왔어요. 우리 아들도 여기서 자랐고 열심히 해서 손님들도 와주셨고.”
수십년간 이어진 풍미의 역사를 이어주고 있는 것은 바로 단골손님들이다.
“풍미는 단골손님들이 많죠. 할아버지랑 손주랑 아드님이랑 대대로 오시는 손님들이 많아요. 옛날이야기도 하면서 식사하시고 가시는 손님들이 그립고 정도 있고 그래서 못 떠나요.”
분위기가 바뀐 건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다. 풍미를 필두로 사람들이 찾는 음식점이 하나둘 늘면서 방문객들이 늘어난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제 인천 차이나타운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관광명소로 변했다.
화교들이 대부분이던 거리는 중국인은 물론 한국인들까지 입주하며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방문객들로 넘쳐 나는 차이나타운이지만 조씨는 다양한 즐길 거리가 많은 새로운 차이나타운을 바라고 있다.
“전부 짜장면집보다는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식으로 차이나타운이 됐으면 좋겠어요. 무조건 먹거리라는 것이 좀 아쉽습니다.”
화교들로부터 시작된 차이나타운이지만 서운한 점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화교하고 중국 사람을 분리하지 못해요. 그런데 우리는 한국에서 태어난 2세 화교지만 다 중국에서 온 사람으로 봐요. 그게 좀 섭섭하죠. 사람들이 모르니까. 전 아직도 화교에요. 국적을 바꾸지 않았어요. 화교라는 자부심 때문에 손주들도 중국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조씨는 지난 2006년 처음으로 지방선거 투표권이 주어졌을 때 감격스러웠다고 전했다.
“한국에서 화교라는 건 자꾸 없어지고 있는데 투표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한 거죠.”
초창기 화교들이 모두 떠났지만, 여전히 인천인으로 살고 있는 그는 앞으로도 대를 이어 이 터가 지켜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인천은 제 고향이죠. 빵 장사할 때부터 자기 자식처럼, 친구처럼 대해주는 단골손님들 때문에 고향 같고 형제 같아요. 아들도 아빠가 열심히 해서 살아온 그 길을 그대로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이은경 기자 lotto@incheonilbo.com
인천의 대표 무술 노파 팔괘장 전수자 노세준 관장
친구 처럼~
中서 전래한 부드럽고 강력한 무술
원 모양 치고 빠지는 게릴라 스타일
“고수는 됐지만 여전히 갈 길 어려움
후배·제자 양성은 큰 책무이자 소망”
가장 아름다운 중국 무술영화로 꼽히는 '일대종사'에서 영춘권의 고수 엽문으로 나오는 양조위와 막상막하의 숨 막히는 무술 대결을 벌이는 무림 고수 양쯔이의 부드럽고 강력한 동작이 바로 팔괘장이라고 불리는 중국 무술이다.
팔괘장은 다른 중국 무술과는 달리 자유롭고 부드러운 보법을 이용해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드는 강력한 무술이다. 이렇게 강력한 중국 무술 팔괘장이 화교와 함께 인천으로 전래해 한층 업그레이드된 인천노파팔괘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중구 신포동에서 인천노파팔괘장을 가르치고 있는 노세준 관장은 “팔괘장은 중국에서 전래한 무술로 청나라 황궁 무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면서 “팔괘장은 보법, 흔히들 스텝이라고 하는데 상대방 주위를 돈다든지 사이드로 빠져나간다든지 하는 방식들이 다른 중국 무술과 다른 점이며, 이 같은 보법 노하우가 굉장히 깊게 쌓여 있는 그런 무술”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중국이나 일본 무술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무술도 보통 품새라고 하는 연무선이 대개 직선형이죠. 잘해야 삼각형 정도인데 팔괘장은 이렇게 둥근 모양으로 상대방 주변을 돈다든지, 아니면 원을 그리고 원안에 또 작은 원을 통해서 빠져나온다든지, 그래서 좀 게릴라 스타일의 전술이라고 할 수가 있죠. 붙었다 빠졌다 하며 상대방을 교란시키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각도로 가서 상대방을 통제한다든지 제어하는 게 팔괘장의 특징입니다”고 팔괘장의 특징을 설명했다.
팔괘장의 한국 전래는 화교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인천에 전래한 팔괘장은 일제 강점기 시절 중국 산둥에 살던 노수전(盧水田)이라는 무술가가 인천으로 넘어오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국 전쟁 이후 인천에 다시 정착한 노수전 무술가는 중구 차이나타운 내 중국사찰인 의선당에서 화교들과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가르침을 펼쳤다.
노 관장은 “우리는 노수전 조사님이라 부르기도 하고, 노수전 할아버지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분이 한국에 오셔서 화교 분들과 한국 분들을 고루 가르치셨죠. 대부분 중국무술이 화교를 통해서만 전수되는 경우가 꽤 있었는데 노수전 조사님은 화교와 한국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골고루 가르치셨어요”
노수전 조사를 통해 내려오는 인천 팔괘장의 계보는 크게 화교와 한국인으로 갈린다.
화교 제자로는 노수전-유순화-필서신으로 이어져 필서신 사범은 의선당에서 유일하게 체육관을 열고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국인 제자로는 노수전-김상호-장정근-노세준으로 이어 내려오고 있다.
노 관장은 “노수전 조사님의 한국인 제자 중에 김상호 선생님이 제일 나이가 어린 편이었어요. 60년대 중·고등학생 때 화교촌에서 운동을 시작해 군대 가기 전에 벌써 몇몇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군대 안에서도 무술을 가르쳤어요. 그다음 제자가 장정근 선생님인데 평생 무술의 맥을 이어야겠다며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현재까지 제자를 가르치고 계시죠”
이 같은 계보로 내려오는 무술이 바로 인천 노파팔괘장으로 불린다. 사실상 인천화된 인천 무술인 셈이다.
노파팔괘장에 대해 “무술의 기술적인 순결성, 즉 조사님의 기술은 그대로 보존하되 스스로 개발해낸 기술들도 시대에 맞게 같이 접합돼 있거든요. 우리는 노파를 계승하는 거에 그치지 않고 더 나가 발전시킨다는 의미에서 인천노파팔괘장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노 관장도 어린 시절 이소룡과 성룡의 영화를 보며 무술 고수의 로망을 키우다 80년대 후반 지금의 장정근 스승을 만나 팔괘장 무술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지금은 인천에서 내로라하는 무술 고수가 됐지만, 여전히 무술의 길은 어렵다고 털어놓는다.
“어렸을 때는 무술을 이 정도 하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자만심이 좀 있었는데, 한 삼십년 넘게 무술을 하다 보니까 진짜 잘하는 사람을 여럿 보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내가 왜 무술을 해야 하는지 철학적인 문제와 부딪치게 것 같아요”
그에게도 후배와 제자 양성은 큰 책무이자 소망이다. 최근 유튜브 등을 통해 각종 격투기가 성행하면서 2~3년 안에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운동이 각광을 받는 반면, 중국 무술은 오랜 수련 기간이 필요한 만큼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저변확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자장면이 인천의 대표 음식이 된 것처럼 팔괘장도 인천의 대표 무술이 될 날만을 그는 학수고대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제대로 시스템을 갖춰놓지 못하면 인천노파팔괘장이 없어지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굉장한 위기감을 가지고 있어요. 인천 무술로 정착한 지 80~90년이 된 이 무술의 가치를 깨닫고 더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 같아요”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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