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사람들
脫식민지 재일·재중조선인
한국전쟁 실향민·이산가족
산업역군 재독 간호사·광부
70년대 남미 국가 경제이민
▲오는 사람들
中 화교, 근대 가장 먼저 이주
100년 이상 뿌리내리고 살아
中 조선족·러 고려인·탈북민
외국 노동자·유학생·난민도
▲“우린 인천인”
중구 차이나타운·공단 주변
부평역, 재한 미얀마인 '성지'
최근 고려인 마을 급속 확산
연수구 '함박마을' 명소 부상
인천일보는 올해 하와이 이민 120주년을 맞아 이주민에 대한 기획연재를 진행합니다. 많은 이주민이 인천에서 떠나고 인천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인천에 들어온 많은 이주민들을 주목했습니다. 이번 기획의 제목은 <디아스포라 도시, 인천에 온 이주민들>입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특정 민족이 자의적이나 타의적으로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는 것, 또는 그러한 집단을 일컫는 말입니다.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 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인천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많은 이주민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화교와 고려인, 조선족, 탈북인, 외국인 유학생과 노동자 등 다양합니다. 이들의 삶을 통해 디아스포라 도시 인천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 떠나는 사람들
특히 1902년 인천 제물포항에서는 하와이 떠나는 첫 이민자들이 있었습니다. 목숨을 건 항해 끝에 만난 건 파라다이스가 아닌 폭염이 몰아치는 하와이 사탕수수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난을 이겨내고 미국 시민이자 한국 국민으로 살아왔습니다.
올해는 그들이 떠난 하와이 이민 120주년을 맞이한 특별한 해이기도 합니다.
이후에도 이민역사는 계속됩니다. 식민지 조선을 떠난 재일조선인과 재중조선인, 그리고 고려인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실향민과 전쟁고아, 이산가족, 산업화 시기 독일로 떠난 재독한인 간호사와 광부, 70년대 남미 국가로의 경제이민까지 더 나은 삶을 위해 먼 이국땅으로 떠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한국인의 긍지를 지켜낸 수많은 이민자가 있습니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1883년에 개항을 하면서 인천에는 개항장이 들어서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인천 시민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빨리 신문물을 접할 수 있었고 또 신 종교를 수용할 수 있었고 근대 교육을 받게 돼요. 그래서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지역보다 없었던 거죠. 그래서 (일본) 나가사키에서 1903년 1월3일날 갤릭호라고 하는 이민선을 탔던 분은 102명인데 그중에 86명이 인천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인천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새로움을 찾으려는 그런 욕구가 그 갈망이 넘쳐났던 곳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또 광복 후에는 한반도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대한민국 전역에서 모여든 사람들과 함께 발전시켜 왔던 곳도 바로 인천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 들어온 사람들
떠난 사람들이 있다면 인천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근대 들어 가장 먼저 이주한 이들은 중국 화교였습니다. 구한말 청나라 군대를 따라 들어온 화교들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천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습니다.
70~80년대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남동공단, 주안공단, 부평공단 등 인천에 조성된 각종 산업단지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옵니다. 대부분 베트남과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 노동자들이 주를 이룹니다.
이들 중에는 우리 한민족의 후손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중국의 조선족과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이어서 북한탈출주민까지 인천에 정착하게 됩니다. 선진국 한국을 배우기 위해 온 외국인 유학생 숫자로 점차 늘어나면서 인천의 대표대학인 인하대와 인천대에는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별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 늘어난 결혼이민자 수천 명도 인천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나라별로 종교별로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며 서로서로 도와가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이유로 인천에 온 이주민들도 있습니다. 바로 전쟁과 군부독재를 피해 온 난민들입니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우크라이나 고려인 난민들이 천여명 넘게 한국으로 오고 있습니다. 인천에도 100여명이 넘는 전쟁난민이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조금 벗어나 있지만, 미얀마 상황도 현재진행형입니다. 88년 항쟁으로 고국을 떠나 한국으로 온 미얀마 이주민 1세대에 이어 지난해 군부가 또다시 쿠데타로 민주정부를 무너뜨리면서 이에 대항한 항쟁이 현재는 내전으로 확대되면서 그들의 고난의 삶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 인천에 사는 이주민들
수많은 이주민은 인천 곳곳에서 온·오프라인상에서 커뮤니티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화교들의 공간인 중구 차이나타운은 주말이면 관광객들로 붐비는 명소입니다. 최근에는 90년 이후 들어온 중국인들이 주안공단 인근에 새로운 차이나타운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남동공단 주변은 전통적인 외국인 노동자들의 공간입니다. 논현동 일대에는 여전히 수많은 외국인노동자가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북한 이탈 주민들도 터전을 꾸리며 살고 있고, 러시아 사할린 동포들의 둥지도 존재합니다.
최근 들어 고려인 마을로 알려진 연수구 함박마을은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문학산 자락에 자리 잡은 이곳에는 고려인 수천 명이 살고 있습니다. 단일마을로는 전국 최대 규모입니다.
부평역은 한국 미얀마인들의 성지입니다. 이들의 모든 약속은 부평에서 이뤄집니다. 그러기에 미얀마 군부정부에 대항해 조직된 '미얀마연방공화국'의 '주대한민국 대표부'가 부평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부평역 5번 출구 인근에는 미얀마 거리도 조성돼 있습니다. 지금도 부평역 앞에서는 주말마다 미얀마 청년들이 조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며 촛불시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중고차 수출단지로 부상하고 있는 송도유원지 일대에는 중동 출신 사업가와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거리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인천 곳곳에 들어선 이슬람 사원은 무슬림 커뮤니티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천에는 참 많은 다양한 이주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포용과 다양성을 표방하는 디아스포라 도시 인천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손정진 '너머' 인천고려인문화원 공동대표는 “인천이 이주의 도시고 사람들이 들고나던 관문의 도시죠. 그런 도시라면 당연히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다양성과 포용이라는 그 특성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에서는 외국에서 온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포용하면 고마운 일이죠”고 바람을 내비쳤습니다.
/글·사진 특별취재팀 남창섭·이은경·이아진·이재민 기자 csnam@incheonilbo.com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