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주이민 100주년 맞아 설립
4개 전시실,출발~귀환 스토리 텔링
재독 한인선박기술자·사진신부 등
감춰져 있던 또 따른 이야기 발굴도
1902년 12월22일 월요일 아침 8시, 121명이 동서개발 회사를 출발했다. 이들이 인천세관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출국심사를 끝낸 이들은 작은 배를 나눠타고 월미도 해상에 떠 있던 일본 우선회사 소속 기선인 현해탄(겐카이마루)에 올라탔다.
오후 2시 드디어 이들은 미지의 세계인 미국 하와이로 떠나게 됐다. 이들은 이틀간의 항해를 거쳐 12월24일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해 신체검사 등을 받았다. 이때 19명이 탈락, 102명만이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 향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첫 공식 이민이다.
1903년 1월13일 도착한 이들은 하와이 호놀룰루 열차를 타고 오하우 섬 와이알루아농장 모쿨레이아에서 본격적인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05년 8월8일 마지막 공식 이민이 끝날 때까지 약 7415명의 선조가 인천을 통해 하와이로 떠났다.
우리나라 첫 이민자들이 마지막으로 밟은 고국 땅 인천. 이런 이유로 이민자들을 떠나보냈던 인천에 세워진 한국이민사박물관의 의미는 크다. 우리나라 유일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이런 여정을 기억하고자 지난 2008년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설립됐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은 한국 이민사에 있어 인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인천은 진출 이민과 유입 이민이 교차하는 디아스포라 도시입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이민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죠.”
▲인천이 기억하는 도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도전이라는 단어가 교차하는 것이 바로 이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첫 이민자 중 인천지역 출신들이 많았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민자 거주지 분포에 따르면 제물포 67명, 부평 10명, 강화(교동 포함) 9명으로 84%에 달했다. 이어 서울 7명, 경기도 3명, 나머지 6명이다.
당시 인천 내리교회 존스목사가 지역 교인들에게 이민을 적극 권유한 탓도 있었지만 지역 특성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김 관장은 개항도시이자 국제도시인 인천에 살던 조상들은 그만큼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새로움을 갈구하는 욕망이 넘쳐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는 우리나라 이민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모두 4개 전시실로 구성돼 이민의 어제와 오늘을 담았다.
가장 먼저 우리나라 이민의 시작을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 여권이라고 불리는 집조, 하와이 이민자 모집공고, 이민자들이 썼던 낡은 가방과 다양한 물품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근대 외무부인 유민원에서 발행한 당시 여권인 집조는 오늘과 달리 한지 한장이 전부다. 좌우로 나뉜 종이 왼쪽에는 여행인의 주소, 성명, 연령, 여행목적, 보증인의 성명과 주소 직업 등이 명기돼 있다. 오른쪽에는 이 내용을 영어, 불어로 번역해 놨다.
제2전시실에서는 극복과 정착의 역사를 담아냈다. 하와이 이민생활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1905년 하와이에는 약 65개 농장에 5000여명의 한인이 다른 민족들과 생활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관리인 '루나'의 감시를 받으며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 힘든 노동을 이겨내야 했다. 새벽 4시30분부터 일을 시작해 오후 4시30분까지 힘든 노동은 계속됐다. 당시 어른 남자의 월급은 한 달에 17달러, 여자나 소년들은 하루에 50센트를 받았다.
박물관에는 '루나'가 사용했던 가죽채찍과 낯선환경에서 적응하던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재현해 놨다. 낯선 현지 음식과 높은 물가에 직접 채소를 심었고 한켠에는 직접 담근 고추장, 된장을 모아두는 장독대를 만들었다.
하와이 이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사진 신부다. 정착을 하기 위해서는 가정을 꾸려야 하지만 배우자를 찾지 못하는 남성 수가 많았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나온 것이 바로 사진 결혼이다. 사진을 통해 서로의 얼굴만 확인한 채 하와이로 건너간 사진 신부들은 700∼1000여명 정도. 부부간 나이 차이가 무려 15살인 경우도 있었지만 사진 신부들은 현지에서 개척자로 나서며 독립운동을 위한 모금활동까지 벌이며 역할을 했다.
제3전시실은 우리나라 다양한 국가로 향한 한인이민사를 만날 수 있다. 멕시코, 쿠바, 러시아, 중국, 일본, 사할린, 중남미, 독일한인사, 해외 입양 등이다.
인천에서는 멕시코 이민도 시작됐다. 단 한차례 였지만 1905년 133명의 우리 조상들은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노예와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었다.
당시 조상들은 에네켄을 으깨서 나오는 섬유질을 꼬아 밧줄이나 마대자루를 만들었다. 에네켄은 키가 2m가 넘었고 잎의 폭도 30cm였다. 게다가 날카로운 가시들이 있어서 가시에 찔리면 상처가 굶고 덧나는 등 많은 고통을 겪었다. 멕시코 이민 역시 인천에서 출발했던 이민이고 대한제국 마지막 공식이민이었다.
또 박물관은 간호사와 광부로만 대변되던 독일한인이민사에서 감춰져 있던 또 다른 이야기도 발굴해 냈다. 바로 독일로 떠났던 우리나라 한인선박기술자들이다. 300여명에 달하는 한인선박기술자들은 숙련된 기술을 바탕으로 현지 독일조선 산업 부흥에 역할을 하는 동시에 국내 조선기술 발달에도 큰 기여를 했다. 이는 바로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있기에 가능했던 의미있는 기록이었다.
해외입양은 가슴 아픈 우리의 이민사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까지 확대된 해외 입양인 수는 현재까지 20만명에 달하고 있다.
제4전시실은 한인의 디아스포라 귀환을 담고 있다. 특히 한인 디아스포라 귀환의 상징인 지역 대학인 인하대를 소개하고 있다. 인하대는 하와이 이민자들의 모국에 대한 사랑에서 탄생한 대학이다. 하와이 이민 50주년을 맞아 1954년 설립됐다. 현지 하와이 이민자들이 모국 발전을 위한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위해 성금을 모은 것이 시작이다. 인천의 '인(仁)'과 하와이의 '하(荷)'를 조합해 인하대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김상열 관장을 “하와이 동포들의 성원에 부응하기 위해 인하공대가 개교했다”라며 “인하공대가 재외동포들의 모국 공헌의 상징 즉 디아스포라 귀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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