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부터 국경 분쟁 러와 내전
2016년 남편과 평화의 땅 한국행

1월 고향 방문 2주 안돼 전쟁 악몽
출산 딸 데리고 죽음 무릅 쓴 탈출
가족·친구 연락 끊겨 생사도 몰라

 


 

우크라이나 고려인 후손 김 베로니카씨(32)는 한국에서 일하다 새로 태어난 딸을 시부모에게 보여주기 위해 지난 1월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 시부모가 사는 지역은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인 도네츠크주.

하지만 2주도 지나지 않아 악몽이 시작됐다. 전쟁이 터진 것이다. 도네츠크지역은 러시아-우크라이나가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한곳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베로니카씨는 딸을 데리고 죽음을 무릎 쓴 탈출을 감행했다. “딸을 데리고 배낭만 메고 탈출에 나섰는데 그때가 겨울이어서 많이 힘들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 국경을 경우 넘어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살던 평화로운 우크라이나가, 내가 절말 좋아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러시아 때문에 지금 죽어가고 있어요. 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살던 우크라이나 도네츠크는 러시아와 국경지역으로 오래 전부터 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러시아와의 전쟁은 이미 2014년부터 시작됐어요. 러시아가 반군을 앞세워 도네츠크와 루안스크 일부 지역을 점령했어요. 그때부터 혼란스럽고 곳곳에 폭탄도 터지고 그랬어요.”

사실상 2014년 내전상태로 전락한 동부지역에서 살기는 너무 위험했다.

러시아계 우크라이나 국적인 남편을 따라 전쟁을 피해 러시아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그녀에게는 더 지옥 같았다.

“모스크바에서 인종 차별이 무엇인지 피부로 느꼈어요. 심지어 집을 임대해야 하는데 동양인에게 임대를 안 해주는 거예요. 동양인이 자기 집에서 사는 것 자체기 싫다고 하더군요.”

▲ 러시아의 무차별 포격으로 도네츠크에 살 던  우크라이나 고려인 후손인 김 베로니카의 부서진 집(오른쪽)과 예전 집(왼쪽)의 모습.
▲ 러시아의 무차별 포격으로 도네츠크에 살 던 우크라이나 고려인 후손인 김 베로니카의 부서진 집(오른쪽)과 예전 집(왼쪽)의 모습.

결국 1년 만에 그녀는 다시 우크라이나로 돌아왔지만 그곳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우크라이나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한밤중에 자고 있는데 집 바로 앞에 폭탄이 터진거에요. 집 유리창이 다 깨져버렸죠. 너무 위험해서 온 가족이 다 지하실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있다가 아침에 나오기도 했어요.”

시부모님은 안전한 곳으로 가서 살라고 등을 떠밀었다. 결국 그녀는 남편과 함께 한국행을 결심한다.

2016년 한국에 온 그녀는 공장에서 3년 동안 일했다. 그러다 임신을 하게 됐고 지난해 한국에서 딸을 낳게 된다. 올해 1월 시부모님에게 새로 태어난 딸을 보여주기 위해 우크라이나 도네츠크를 찾았다가 이번에 또 다시 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베로니카의 바램은 하나다. 빨리 전쟁이 끝나 가족과 친구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기원했다.

“친정 부모와 몇 달 동안 연락이 끊어졌어요. 아빠가 장애인인데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건지 생사확인도 못한 채 몇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는 친구들과 부모님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빨리 끝났으면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평화로운 우크라이나에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민간 차원 한계, 정부 도와야”

고려인 총 1200여명…트라우마심각
주거안정·교육·생계지원 가장 필요

고려인지원단체인 사단법인 '너머' 김영숙 상임이사는 요즘 쉴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국내에 들어온 1200여명의 우크라이나 고려인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어려운 점들은 고려인분들이 이제 피난민들이다 보니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한국에 입국을 했기 때문에 필요한 물품들도 많지만 이제 주거에 필요한 것 그리고 교육,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는 분들에 대한 지원들이 (27:42) 조속히 이루어졌으면 좋겠는데 이것이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민간 차원에서 하는 것은 굉장히 한계가 많은 것 같습니다”

실제 피난민들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심각하다.

“아이들조차도 보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소리도 무서워하고 또 뭐 화장실에서 비누가 그 뭐죠 케이스가 떨어지는 것만 봐도 깜짝 깜짝 놀란다고. 밤잠을 못 잔다라고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김 상임이사는 이들의 한국 정착을 위해서는 주거안정과 교육, 생계지원 등이 가장 필요하다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촉구했다.

하지만 현재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은 전무하다.

결국 시민들이 직접 나섰다.

구호단체가 긴급 생계비를 지원하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인천지역 시민단체들이 우크라이나 고려인의 지원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여러 구호단체에서도 모금을 하고 있는데 국내 고려인들을 지정해서 후원을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고요. 지금 사단법인 너머가 그 역할들을 하고 있습니다”

 


 

“도와준 한국, 너무 감사해”

러 폭탄 떨어지자 루마니아 통해 와
몸만 빠져나온 고국 삶도 녹록잖아

광주 고려인마을에도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살고 있다.

전쟁을 피해 이곳에 온 최 안젤라씨(54)는 키이브에서 300킬로미터 떨어진 우크라이나 중부지역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우크라이나 전역에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이 되자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우크라이나 탈출에 나섰고 루마니아를 통해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전쟁 당시 우크라이나 상황에 대한 질문에 고개를 떨구고 말문을 열지 못한다.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이다.

어렵게 말문을 연 그녀는 “전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해 많이 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이렇게 탈출해서 한국에 들어와 안전하게 살고 있지만 아직도 정신적 충격에서 몸을 아픈 상태입니다.”

한국에서도 삶도 녹녹치 않다. 전쟁을 피해 몸만 빠져 나왔기에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그대로 주변의 도움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한국 나라에 많이 감사드려요. 앞으로 들어올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에 대해 힘들겠지만 한국에서 많이 돌봐줬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들처럼 도와준다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도와줄 자신…우린 한민족”

광주 고려인마을 신조야 대표도 우크라이나 고려인을 지원하기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 광주 고려인마을로 온 우크라이나 고려인은 200명이 넘고 있다. 곧 400명 넘게 이곳에 들어올 예정이다. 이곳 주민들이 모금활동을 벌여 우크라이나 고려인의 한국행을 돕고 있다.

“그래도 광주 들어온 사람들은 그래도 다른 데 들어간 것보다 훨씬 좋은것 같아요. 여기선 고려인 센터에서 싹 우리가 돌봐줘요. 집도 구해주고 월세도 내주고 우리가 집을 내줬어요. 쌀도 다 몇 포대씩 주고 물도 싹 이렇게 세트로 주고, 살게 만들어 줬습니다”

한국 사람의 도움 없이는 이렇게 많은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을 도와줄 수 없을 것이라고 신 대표는 말한다.

“누가 죽게 내버려줍니까. 우리가 다 도와줄겁니다. 그게 한국사람들, 우리 민족이에요”

/남창섭 기자·이재민 기자 leejm@incheonilbo.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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