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기능' 차이나타운 현대화 인천이 유일

⊙ 화교 언제부터 들어왔나
임오군란 때부터 청서 집단 유입
초기엔 광동·산동성 등 고른 이주

⊙ 지역별 정착 차이가 있나
인천 화교들 군산 목포 원산 이동
시대 흐르며 상인서 노동 중심적

⊙ 주로 요식업 종사 이유는
일제강점기·건국 거치며 큰 타격
거상 대부분 소멸 뒤 소규모 압축

⊙ 차이나타운, 인천만 있나
중국인 여행 자유화 후 만들어져
초기 회장 경쟁, 한·중 공동 맡기도

⊙ 차별 점차 줄고 있다지만
차별 없는 다문화 사회 공존 방식
공동체로 상호 존중하며 살아야

 


 

▲ ◀인천 차이나타운 전경. 정면 입구에 '붉은 패루'가 보인다.
▲인천 차이나타운 전경. 정면 입구에 '붉은 패루'가 보인다.

인천을 대표하는 장소 중 하나인 '인천 차이나타운'. 그곳에는 인천에서 백 년 넘게 살아온 화교들이 지금도 인천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언제부터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했는지, 다른 나라로 간 화교들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한국 정착 과정에서의 애환과 우리 사회에서의 공존 방법은 무엇인지 화교 전문가인 인천대 중국학술원 정은주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았다.

정 교수는 한국화교 연구를 시작으로 동남아 및 미국의 화교·화인 연구와 더불어 재미 한인과 중국인을 중심으로 아시안 아메리칸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이 분야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이다.

 

▲ 정은주 인천대 교수

 

▲화교는 언제부터 한국에 들어와 정착하게 됐나

- 화교가 집단으로 한반도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때부터입니다. 군란 진압을 위한 원조 요청에 따라 청나라 군사 약 4000여 명과 화교 상인 약 40여명이 들어왔고 조선에서 세력을 굳히려는 청의 전략에 따라 화교 상인들이 점차 증가하게 됩니다. 이후 인천과 서울, 부산, 원산 등지에 조계지가 생기면서 화교 거주자가 늘어났고, 농사짓는 화농, 노동자인 화공들이 합류하면서 한반도 전역에 화교가 증가했었습니다. 집단으로서 화교의 유입은 이 시점으로 보지만, 과연 한반도에 화교가 언제부터 유입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습니다. 명-청 왕조 전환 시기에 청에 반대하는 명나라인들이 타이완섬과 동남아시아로 건너갔는데요, 이 시기 베트남에 가서 토착화한 오랜 화인을 '명향(明鄕)'이라 하고, 반청 운동을 벌인 명의 장군 정성공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간 이들이 대만의 본성인(本省人, 장개석이 국공내전에 패하여 국민당 군사를 이끌고 대만으로 이주한 이후의 대만인들을 외성인(外省人)이라 합니다.)을 형성합니다. 당시 한반도에 건너온 명나라 사람들을 '황조유민(皇朝遺民)'이라 불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화교의 기원을 임오군란으로 보는 것은 이때 유입된 중국인들이 분명히 중국(청)의 언어, 문화, 정체성을 드러내며 거주하기 시작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 인천차이나타운에 서 있는 중국 동진시대 유명 서예가인 왕희지  조각상.
▲ 인천차이나타운에 서 있는 중국 동진시대 유명 서예가인 왕희지 조각상.

▲한국 각 지역 별로 화교 정착의 역사에 차이가 있나

- 국내에서는 지역별로 이주 시기 및 중점 사업 영역의 차이 정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요, 오히려 동남아나 미주로 이주한 화교들과의 차이가 좀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반도 이주 초기에는 다른 지역 화교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광동성과 남방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인천과 가까운 산동성 등 여러 지역에서 골고루 유입되었는데요, 아편 전쟁과 청일전쟁 등 근대의 혼란기 전반에 걸쳐 중국 내부에서 기아에 시달리는 농민들이 산동에서 인천으로 계속 넘어 온 반면에,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경제적 억압을 거치면서 상업적 수완을 발휘하던 광동 등 남방 출신의 화교들이 빠져나가고 산동성 출신이 대다수가 되는 특징을 형성하게 됩니다.

인천의 경우, 상인에 더해 농사짓던 중국인들이 채소 종자를 가지고 와서, 여러가지 채소를 재배하는 화농이 인천에 많이 등장하게 되고요. 인천에 화농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무역업과 부동산업 등에 종사하던 화교들도 많았죠. 당시 관련 동업조직들을 살펴보면 농업공회도 있고, 여관조합, 소금 수입상회, 면포동업회 같은 조직들이 있었던 걸로 봐서 인천에서 다양한 분야의 상업이 발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 지역으로는 직접 이주한 화교들 외에도, 인천과 한성에 들어온 화교들이 이후 개항 가능성이 보이는 군산, 목포, 원산 등으로 이동했습니다. 목포와 군산에 정착했던 화상 중에는동순태라는 유명한 화상 회사를 따라 그 곳에 갔다고 해요. 한성과 인천을 중심으로 포목상으로 시작해서 여러 가지 사업을 확장했던 화교 재벌회사인데 분점을 설치해 직원들을 목포와 군산에 파견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정부가 한반도에 각종 개발 사업을 벌임에 따라 노동력 수요가 증가하면서 생계가 급박한 중국의 노동자들이 산동에서 한반도로 대거 이주해 오게 됩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화교의 성격은 상인 중심에서 농민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인구적 특성을 띄기 시작했다고 보입니다.

 

▲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식업소의 화끈한 조리 모습.
▲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식업소의 화끈한 조리 모습.

▲화교들이 주로 요식업에 종사하는 이유는

- 여러 단계의 역사적인 계기가 있는데요. 일제강점기에는 중국인의 경제력을 축소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중국인에게 불리한 정책을 쓰지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연히 무역업을 하던 거상들이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일제의 이간질과 한중 농민 노동자 간의 관계 악화로 벌어진 1931년 만보산 사건과 더불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광동 출신의 화상들이 대거 이탈하게 됩니다. 당시 인천에 광동성 출신들이 만든 광동회관이나 절강성 출신들이 만든 남방회관들이 있었는데 중일전쟁 이후에는 그냥 자연스럽게 소멸해 버리죠.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아있던 중국 남방출신 거상들은 대부분 빠져나가면서 다양한 제조업과 무역업, 부동산업을 수행하던 이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게 됩니다. 거기에 더해서, 대한민국 건국 후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때, 민족자본을 일으키기 위해 외국 자본이 더 커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화교를 겨냥한 두 번의 화폐개혁과 창고 폐쇄 등이 진행됩니다. 한국의 은행을 이용하지 못하고 한국 정책에 빨리 대응하지 못하던 화교들은 가진 돈이 모두 휴지조각이 되는 타격을 입었고, 창고에 물건을 사들여 적정 가격에 팔던 화상들도 창고 폐쇄로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 외에 1961년에 외국인 토지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막거나 큰 점포를 소유할 수 없도록 제한을 하죠. 이런 과정의 정책과 한국법에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어서 사업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 화교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노동을 활용해서 작은 규모로 중국음식을 하는 요식업으로 직업의 범위가 압축되는 거죠.

건국 초기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사회에 독자적인 문화를 지니고 존재했던 외국인 집단이라고는 화교 외에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제한적이거나 억압적 성격의 외국인 정책은 그 피해가 고스란히 화교에게 전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화교에게 억압적인 정책을 구사한 것은 한국만이 아니었고,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상황이 전개된 바 있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는 더했죠. 19세기 말 이주 초기에는 광산, 철도 건설, 농업 등에 값싼 노동력으로 중국인들을 환영하다가 경기 부진이 오니까 백인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뺏는다며 법적으로 이주와 귀화를 막고, 테러를 하는 등 반중 감정이 넘쳐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중국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세탁업, 요식업 밖에 없었구요. 화교를 대표하는 세 자루의 칼(三把刀·싼바다오)이란 말이 있는데, 요리를 하는 칼, 재봉을 하는 칼, 이발을 하는 칼로 그것이 화교를 설명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주 초기의 상황이 각 지역에서 얼마나 좋지 않았는가를 말해줍니다.

 

▲한국에 차이나타운은 인천에만 있나

- 붉은 패루와 같은 상징적인 건축물과 명칭을 지니고 관광지로도 기능하는 현대적 의미의 차이나타운이 건설된 곳은 인천이 유일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부산 초량동에도 차이나타운이라 적힌 패루를 세우고 있으나, 중국인 사업체가 들어선 거리가 매우 소규모입니다. 관광지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화교 사업체가 들어서 있는 현대의 차이나타운과 달리, 원래 차이나타운이라는 것은 거주지역을 의미했었죠. 미국 등 서구에서는 분리주의에 의해 중국인들만 따로 모여 살게 했던 곳으로, 한반도에도 중국인 거주지역, 중국인 거리라 불리는 전통적인 지역이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서구와 달리 한반도의 중국인거리는 상업적으로 발달한 곳이로 '관전가', 또는 '청관'이라 불렀었습니다. 서울에는 한성 시기 종로 주변과 서소문, 일제강점기를 지나 건국 초까지 화교소학교 주변의 소공동, 이후 화교중고등학교가 있는 연희, 연남동에 화교가 거주하면서 리틀 차이나타운이라는 별칭이 붙여졌었죠.

사실 차이나타운이라는 이름은 현지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중국의 한국 여행이 자유화되고 인천국제공항이 생기면서 전국 지자체에서 차이나타운을 만들어야겠다고 개발 계획을 세웠는데 그 건설 계획이 유일하게 성공한 곳이 인천입니다.

인천 차이나타운 건립 과정에 대한 연구를 보면, 당시 북성동에 있던 한국인들과 선린동에 있던 중국인들이 서로 차이나타운 번영회 회장을 하겠다고 일종의 경쟁을 벌이다, 결국은 한국인 회장과 화교 회장, 두 명의 공동 회장 체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중국인들의 역사가 담겨 있지만, 그 안에는 한국인들도 같이 공존하죠. 한국의 역사 속에 인천의 화교든 서울의 화교든 화교가 한국인과 공존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식업소의 오래된 도마와 칼.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도 화교에 대한 차별이 점차 사리지고 있는데

- 1997년 IMF외환위기를 계기로 한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이후 한국 사회에 이주 노동자, 결혼이주민들이 증가하게 되면서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다민족 국가가 되어가는 한국 사회가 공존의 방식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외국인에 대한 여러 가지 정책적인 지원을 늘여온 측면도 큽니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서는 거주 자격을 계속 갱신해야 했던 비자 정책이 개선돼 영주 비자가 생겨났고, 2005년 경에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국가가 아니니 다문화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라는 권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에 따라 재외교민과 관련된 정책들과 외국인에 대한 여러 가지 정책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지방선거 선거권을 부여한다거나 지하철 이용시 한국 노인과 똑같이 지하철 요금을 면제해준다던가, 국민건강보험 가입 등의 거주자로서의 혜택이 하나하나 열렸고, 지금은 그래서 상당히 많은 부분이 한국 시민과 비슷한 형태의 시민권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정은주 인천대 교수
▲ 정은주 인천대 교수

▲한국사회는 화교와의 공존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 완전히 장밋빛으로만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일반인들은 화교와 중국인, 조선족(한국계 중국인)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데, 최근 들어 중국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악화되면서 이들 모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커지고 있죠.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반중, 혐중 정서가 확산되고 있고, 국내에서도 영화 '범죄도시'와 같은 묘사로 인해 부정적인 인식이 많아졌어요. 중국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인식은 화교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자신들에게 공평하지 않게 쏟아지는 손가락질을 받다보면 스스로는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 생각하면서도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아주 좋기만 할 수는 없겠지요. 한국의 근현대 역사를 함께 해온 화교를 현재 중국인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한국에서 살아오면서, 한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고,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던, 한국 역사를 같이 겪어왔던 이들에게는 억울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필리핀이 한국보다 잘 살 때는 한국화교가 필리핀 화교 앞에서 기가 죽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기를 펴고 산다고 말씀하셨던 화교분이 기억납니다. 화교는 한국에서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국에 대한 일말의 소속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화교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겠지만, 화교도 우리와 같이 한국의 역사를 일구어 나갈 사람이라는 그런 인식 하에 서로 존중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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