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도아메리칸타운.

인천에는 여느 아파트와 다른 주거단지가 있다. 바로 송도아메리칸타운(사진).

재외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송도아메리칸타운은 830세대 규모의 주상복합으로 지난 2018년 10월 입주를 시작했다.

먼 타국 생활을 끝내고 한국 그것도 인천으로 돌아온 이들은 하루하루가 새롭기만하다.

수십년 타지 생활에도 낯섦보다 익숙함이 먼저라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미주 이민 시작, 인천서 마무리”

20대에 홀로 한국 떠나 도전
드라이클리닝해 사업 기반
못해본 여행 원없이 하고파

▲ 서규택씨.

“한국 이민을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도시도 인천,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인천은 대한민국에서 미국과 연관성이 가장 많은 도시라고 할 수 있죠.”

미국 이민 생활 40여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서규택(71)씨는 고향도 아니고 아는 이도 하나 없는 인천에 터를 잡았다.

친구 한 명 믿고 20대에 떠난 미국에서 가정을 이루며 아들 둘까지 얻었지만 부인과 함께 지난 2018년 귀국을 선택했다.

송도아메리칸 타운이 인천에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부인의 고향인 대구에서 지내다 인천행을 결정한 것이다.

“하와이 미주 이민이 시작된 인천이니 다시 돌아갈 때도 인천으로 가야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어요.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이라 미국 보스턴이랑 사계절이 비슷하고 쾌적해요.”

뉴욕에서 미국 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한 그는 로드아일랜드를 거쳐 보스턴에서 부인을 만나 정착했다. 타국 삶은 당연히 녹록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며 돈을 모은 그는 드라이클리닝을 운영하며 호텔 시트와 유니폼 등을 처리하며 사업 기반을 다졌다. 이민 초기 겪었던 언어장벽과 미국인과 다른 저임금 체계 등을 극복하며 하루하루를 개척한다는 도전정신으로 보낸 것이다.

몸은 이국만리 낯선 미국에 있었지만 모국에 대한 관심은 계속됐다.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제가 현지에서 한인회장을 맡을 때였어요. 한국에 IMF 외환위기가 닥쳐 금 모으기 운동이 한창이었잖아요. 저도 현지 교민들과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해 영사관을 통해 한국에 기부한 적이 있어요. 또 큰 물난리가 난 적이 있는데 그때도 한인회 차원에서 기부 운동을 벌이고 했죠.”

그는 또 미국 현지에서 한국 알림이를 자처했다. “미국에서 6·25참전 베테랑들은 친한파예요. 한국에 나쁜 일이 생기면 미국이 도와줘야 한다고 상원 등에 편지를 쓸 정도죠. 6·25전쟁이 대한민국에서도 잊히는 전쟁이 되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해마다 기념하고 있습니다. 참전 어르신들이 군복을 입고 나와 거리행진을 하고 하죠. 현지 교민들과 워싱턴DC 알링턴 국립묘지를 찾아가고 모금운동을 통해 돌로 만들어진 기념비를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이 발전하면서 미국에서 그의 생활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만을 묻던 1970년대 미국과 지금의 미국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다.

한국산 자동차만 봐도 흥분했던 과거와 달리 한국 가전제품들이 미국 현지에서 큰 인기를 끌고 한류 붐까지 일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이민 3~4세 아이들은 사실 한국에 대한 정체성이 없죠. 하지만 이제 학교에 가면 한국 노래 아는 거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친근함을 나타낸대요. 우리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하며 자부심을 많이 되찾고 있어요. 일본보다 문화에서 우위에 있는 그런 나라가 됐죠. 타국에 살면 참 이런 게 고맙죠.”

인천으로 돌아온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담담하게 밝혔다. “아내와 공원 산책도 하고 주말에는 전국 관광지를 돌면서 그렇게 살고 싶네요. 젊어서 못한 우리나라 여행을 여한 없이 해보고 싶어요.”

 


 

“미국서 쌓은 노하우 쏟아붓겠다”

27살에 현실 도피성 이민행
美서 연금 나이 되어 한국턴
지난 6월 다시금 국적 회복
韓-美 서로 윈윈할 일 계획

▲ 크리스 조씨.

“41년 만인 올해 6월24일 한국 국적을 회복했습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미국에서 쌓은 노하우를 쏟아붓겠습니다.”

27살이던 1983년. 크리스 조(77)씨는 미국행을 결정했다. 당시 억압된 한국 사회 분위기에 못견디고 사실상 현실 도피를 위해 이민을 택한 것이다.

미국 텍사스로 건너간 그는 대학에 입학해 경영학을 배웠다. 학비를 벌기 위해 휴일에는 도매상에 찾아가 물건을 사 현지 프리마켓에서 되팔았다.

학교를 졸업한 조씨는 직장에 다니게 되면서 미국 현지인들과 어울려 생활하게 됐다. 그렇다고 어려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 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존재감은 현저히 낮았고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해도 세밀한 언어 소통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 사회 일원이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한국 커뮤니티나 현지에서 발행되는 한국 신문을 통해 모국에 대한 소식을 꼼꼼하게 챙겨봤다.

그는 한국에서 IMF사태가 터졌을 때 미국 교포 사회에서 보여준 여러 활동을 기억하고 있다.

특히 그가 LA에 있는 한 증권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당시 교민들이 한국을 돕자며 달러를 한국을 보내는 외평채를 많이 샀던 일을 잊지 않고 있다. 금모으기 하듯 달러를 한국에 보낸 것이다. 외평채 판매 실적이 높았을 정도로 모국에 대한 교민들의 관심은 매우 뜨거웠다. 또 텍사스에서 한인회장과 상공회장을 지냈던 그는 한국과 미국 간 간극 줄이기를 위해서도 노력해 왔다.

경기 오산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오산시장과 텍사스시장이 1년에 한 번씩 상호 방문하는 한편 학생들의 교류에도 힘썼다. 한미 학생들이 각각 현지 가정에 한 달간 머물며 서로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 것이다.

이민세대 자녀들이 한국을 잊지 않도록 애썼다.

“한글학교를 열어 한글은 물론 한국 문화를 가르쳤어요. 아이들에게 한복을 입히고 우리 전통음식을 제공하면서 한국인임을 잊지 않도록 노력했어요.”

이민 이후에도 틈틈이 사업차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모국의 발전을 몸소 실감해 왔다.

“이민 초기에는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중국 혹은 일본인으로 보는 경우가 많아서 섭섭한 감은 있었죠. 그러나 90년대 중반 텍사스에 삼성반도체가 들어섰죠. 한국 기업이 들어와 일자리가 늘면서 한국 이미지가 상승했죠. 최근에는 보이그룹 BTS의 인기 효과가 꽤 크죠.”

그에 따르면 현재 한국어를 배우는 현지 열기는 매우 뜨겁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국인에 대한 긍지도 커지고 있다.

과거 백화점에서 삼성, LG 전자제품으로 모국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느꼈다면 이제는 예술적인 측면까지 한 단계 앞선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 사회보장연금을 받게 되는 나이가 되자 한국행을 결정했다. 미국에서 쌓은 자신의 경력이 한국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지난 6월24일 한국 국적이 회복됐어요. 이민 가서도 계속 한국인이었지만 잃어버린 몇십년을 다시 찾은 느낌입니다. 한국과 미국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일을 인천에서 해 나갈 겁니다.”

 


 

“우리땅 향수 너무 그리웠다”

사업차 간 곳이 '제2의 고향'
1~2년 일정이 수십년 순삭
두 딸 은변호사…고생한 보람
인천서 누리는 소확행 만끽

▲ 윤현구씨.

“45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윤현구입니다.”

1975년, 30살 되던 해에 미국으로 떠난 윤현구(78)씨. 1~2년 정도면 다시 돌아오겠다며 떠났던 것이 그의 미국행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대에 중장비 대여 사업에 뛰어들었던 윤씨는 사업 확장차 방문한 미국이 제2의 고향이 되고 말았다.

“대형 공사에 하청받아 불도저 등 중장비를 대여하며 공사에 참여하는 일을 했죠.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중장비가 없어 애를 먹곤 했습니다. 장비 부속을 구하는 게 잘 안되니까 미국에 가서 보자고 떠나게 됐죠.”

그가 찾은 곳은 미국 보스턴으로 현지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참가해 선진 장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는 이 한 명 없는 미국 이민은 애초부터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중장비 가격을 보고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미국에 처음 가보니 너무 어마어마해서 기계를 살 수도 없었어요. 다시 공부하기 위해 학교도 들어가고 했는데 좌절도 했죠. 몇 년 더 고생하다가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미국에서 있으면 경력이 쌓여 한국에 와 좀 더 나은 회사를 차릴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으로 있었지만 어느덧 세월이 흘러 부인을 만나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는 결국 중장비 견학 목적으로 떠난 미국에서 제2의 인생을 살게 됐다.

미국에서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닌 그는 한국인을 만나면 도움을 주려 애를 썼다.

“한국 사람이 몇 명 안 되는 동네에도 있었는데. 먼저 왔다는 이유로 뒤늦게 찾아온 한국사람들을 도와주곤 했죠. 또 가수 현인 선생님을 초청해 공연도 하고 했어요.”

이후 지금의 부인을 만난 윤씨는 딸 둘을 낳고 하와이로 이주해 생활해 왔다.

“타국에서 고생이라는 건 안 할 수가 없죠. 자동차 회사 등에 다니며 일을 했죠. 애들 키우며 살아야 하니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도 애들이 잘 커 주어서 기분이 좋죠.”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두 딸이 로스쿨을 졸업하고 현지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기반을 잡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인으로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놓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가 잘사는 나라가 아니었던 1970년대에 떠났던 윤씨에게는 더욱 그랬다.

길거리에서 한국차만 봐도 좋았고, 시간이 흘러 미국인들이 한국 브랜드 휴대폰을 너나없이 쓰는 걸 보면서 흐뭇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그는 70세가 넘어 한국행을 결정하게 됐다. 특히 우리 산과 계곡을 좋아하는 그는 경기도 양평 등 우리 땅이 너무나 그리운 나머지 입국해 인천에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국이 좋고, 한국 냄새가 좋아요. 한국 가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도와주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인천으로 왔습니다.”

다시 돌아온 대한민국 인천에서 누리는 소소한 일상을 자랑하는 윤씨.

“친구 전화 오면 같이 밥 먹고, 발전된 지하철도 너무 좋고. 이웃과 저녁때 한잔이라도 마실 수 있는 거. 미국 같으면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이은경 기자 lotto@incheonilbo.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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