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청도 대리석이 유명하다지만 외부인의 눈에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60년 전 조선일보(1958.7.11.) 기사에 '서해도서답사'란 제목에 소청도 내용의 일부를 발췌해 본다. “부락은 둘, 인구는 원주민이 팔백 피난민이 백오십이고, 이 섬의 유명한 것은 대리석산이다. 그리고, 이 대리석산 기슭에서 바닷물과 싸우면서 해삼이며 생복이며 굴을 캐어내는 마을 색시들이 석양볕에 기다란 그림자를 이끌면서 대리석 위를 더듬는 그 모습은 바로 한 폭의 그림. ~이윽고 동녘에 형광등이 아닌 달빛이 대리석산을 어루만지며 떠오를 때 어로를 마치고 돌아오는 까나릿배의 뱃노래가 구성지고… ” 당시 답사팀은 소청도 대리석산의 규모와 어촌 풍경에 대해 서정적 표현으로 맛깔나게 표현하고 있다.
▲ 현대 분바위 채굴의 역사
일제강점기에 조선인과 일본인의 채굴 이후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은 물러나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광구수나 여타의 정확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 당시 중국이나 일본으로 반출된 대리석은 중국 봉천역사(奉天驛舍), 북경역사(北京驛舍), 일본오사카(日本大阪) 호텔, 서울 미도파 백화점(1938년 설립) 그리고 우리나라 옛 중앙청회의실 등 중요한 건물은 모두 이 소청도 대리석을 썼다고 한다.
1950년대는 6·25전쟁이 발발하고 복구 재건 사업에 소청도산 우량 대리석을 사용하기 위한 각종 전시회를 통해 알렸으며, 1955년에는 대미원조 차원의 FOA(대외활동본부)로부터 대리석 채석을 위한 15만불 원조기사도 눈에 띈다. 1957년에는 동양대리석회사가 채석하고 있음을 전하며, 1960년대는 대리석을 싣고 인천으로 가다가 풍랑에 선박이 침몰하는 사고도 있었다. 소청도로부터 수송 사정이 나빠지면 시중에 현물이 부족해 소청도 대리석이 가격 상승의 요인이 된 적도 있다. 1960년대 소청도산 대리석이 사용된 건축물은 세종문화회관의 최초 전신인 우남회관(1961년 완공)이 있다.
1970년대는 전반에 북한의 도발과 어선 납치가 빈번해지자 어로 저지선이 만들어지고, 서해5도 해역에는 긴장이 조성된다. 이때 어로 활동이 위축되지만 대신 육지의 건축 붐을 타고 대체 돈벌이로 소청도에서는 대리석을 두부모처럼 자르고 배에 싣는 석재 반출 작업이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 당시의 화물선은 종래 생선 운반선이 석재운반선으로 바뀐 셈이었다. 이 당시 채석과정에 참여했던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대리석 이외에 바닥마감재로 쓰기 위한 잡석을 채로 쳐서 균일한 크기를 자루에 담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1970년대의 소청도산 대리석을 이용한 대표적 건축물은 국회의사당(1975년 준공)이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8곳에서 대리석 광산이 운영되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동양대리석회사, 소청대리석회사에서 채광하여 옛 분암 모습은 파손되었다. 예동 포구나 스트로마톨라이트가 산재해 있는 어러끔에는 현재도 대리석을 채굴하고 이 석재를 반출하기 위한 착암기 흔적이 완연하게 남아 있어 진한 아쉬움을 더해 준다.
역사적으로 소청도산 대리석 건물이 현재도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해외의 공공시설물이나 국내의 유명 건물이 분바위 석재로 쓰였다 하니 양질이었음은 분명하며, 향후 주변 정비와 홍보, 그리고 보존 방안을 마련해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국가가 지정한 천연기념물로서 고생대 이전인 원생대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스트로마톨라이트(일명 시아노박테리아)로서 생물분류학상 남조류(藍藻類)에 해당하며, 지구에 산소를 공급해 동물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 생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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