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운항했던 옹진호 모습.

과거 먹고 살기 힘들고 그래서 바빴던 20~30년 전 마을에 박물관 건립은 대규모 개발 이외에 주민에게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여유가 자신의 건강과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경향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담은 박물(기념)관이 마을 단위로 건립되어 지역의 정체성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인천에서도 시 단위에서 점차 마을 단위의 소규모 박물관 등 건축 재생을 통한 다양한 주제의 건축물이 증가 추세에 있으며, 개발과 보존의 가치를 아우르는 생활사 중심의 현장 밀착형 도시 재생이 이루어져 관광객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필자는 최근 백령도에서 근무하며 도서 지역의 문화에 관심을 갖고 지역 언론을 통해 '도서성'과 '특수성'을 알리고 있으며,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서해5도의 관광 요소를 모아 지역의 정체성을 전시·홍보할 수 있는 '생활사 박물관' 건립을 제안하고자 한다.

 

▲ 서해 5도의 도서성(島嶼性)과 특수성(特殊性)

서해5도는 지정학적으로 '독특한 도서성'과 섬 특유의 '고립적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독특한 도서성'은 첫째, 한때 황해도에 소속되어 언어와 음식, 관습을 비롯한 북한식 생활상이 남아 있으며, 둘째, 고고학적 자료인 패총(貝塚) 유적을 비롯한 역사 및 전설, 종교·민간 신앙 등 문화유산이 산재하고 있다. 셋째, 자연에 적응하며 살았던 주택 구조 및 건축 재료 등 의·식·주 생활 활동, 넷째, 6.25 이후 분단된 현실 속에서 생겨난 위령탑·용치(龍齒)·철책(鐵柵) 등 유무형의 '반공 문화유산', 다섯째, 피란에 의한 이주민의 등장과 이들이 도서 지역에 정착하는 과정에 녹아든 생활상을 들 수 있다. 특히, 역사·문화지리적으로 북한 지역과 연계된 부분들이 상당수 있어 서해5도 이외 다른 지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 속속들이 배어있다.

'고립적 특수성'은 첫째, 소청도 등대를 비롯한 항로 표지의 해양 문화유산. 둘째, 도서민의 생명줄인 교통수단과 어로 생활의 변천. 셋째, 섬 내부에서의 간척 과정과 농경문화, 넷째, 국가지질공원으로서 10곳의 지질명소와 같은 자연유산과 국가생태관광지구 선정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철새의 중간기착지이자 평화를 위한 인간의 영구정착지로서 서해5도는 특수성을 간직하고 있다.

필자가 이 시점에 제안하는 이유는 30년 이상 도서 지역을 방문하면서 살펴본 결과 도서 지역의 맥락이 이어지지 못한 채 생활사의 사초(史草)를 쓰실 사관(史官)과 같은 어르신들이 많지 않다는 점과 무분별한 개발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대두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섬 지역에 대한 마을 혹은 주거 환경 개선 사업과 같은 정비 관계로 과거 손때가 묻은 옛 물건들이 터부시되고 집 밖으로 나와 당연하듯 버려지는 일이 비일비재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는 주민들의 지적도 한몫을 했다.

따라서 서해5도는 도서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더 훼손되기 전에 문화 요소를 모아 보존과 전시, 관광자원화를 할 수 있는 '생활사 박물관' 건립이 필요하다.

전문가와 도서 주민들의 의견 청취를 통한 장소 섭외와 콘텐츠 구성 등 충분한 논의과정은 서해 도서의 정체성을 더욱 명확하게 해 줄 것이며, 백령공항 건설과 궤를 같이하여 건설되어야 할 것이다. 이후 서해5도서를 찾는 관광이 활성화되면 그 경제적 이익은 지역 경제 활성화 도모로 이어져 도서민에게 고른 혜택이라는 선순환으로 확대되길 기대한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 김석훈 문학박사·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김석훈 문학박사·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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