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청도 옛 등대 전경. /오준익씨 제공

지난 호에서는 <직원록>을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의 소청도 등대의 위상과 설립 목적에 대한 일면을 살펴봤다. 이번은 광복이후 등대를 총괄했던 '항로표지관리소장(등대장)'은 누구였을까를 중심으로 알아본다.

 

▲'등대지기'에서 '항로표지관리원'으로

영국 민요 'The Golden Rule'이 영국 이민자에 의해 미국으로, 미국에서 1940년대 중반 다시 일본으로 그리고 일본에서 1970년대 한국으로 건너오며 '등대지기'란 제목의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위에 자고 …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 '이란 노랫말이 알려졌다. 그 의미는 한겨울에 거센 파도가 섬을 덮치는 위험한 순간에도 항상 등대를 지키는 등대지기의 거룩하고 숭고한 정신을 노래한 것이다. '등대를 지키며, 관리하는 사람'의 명칭인 '등대지기'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1988년부터 '항로표지관리원', '등대'는 '항로표지관리소' 등 항로표지의 기능과 역할 중심으로 바뀌었으며, 해양수산부에 속한다.

 

▲해방 이후의 '항로표지관리소장(등대장)' 명단

소청도 등대의 운영과 관리를 총괄했던 '항로표지관리소장(이하 소장)'은 누가 있었을까? 초창기 역사는 불투명하지만 광복 이후는 소장을 역임한 현지의 오준익, 이성배씨 두 분과 마을 주민의 증언이 대신하고 있다. 이성배씨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인 직원은 1945년 광복과 함께 본국으로 귀환하였고, 이어서 촉탁의 노역자로 근무했던 백도수(白道洙)씨가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소장이 되었다고 증언한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로서 <매일경제신문> 1980년 9월27일자 '代 이은 燈臺지기 … 34년' 기사에서 소청도 등대 소장을 역임했던 백봉규(白鳳奎)씨는 부친이었던 백도수씨가 광복 이전부터 1957년까지 28년간 근무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사실은 백도수씨의 최초 근무 년도가 일제강점기인 1930년이며 1945년 광복될 때까지 15년을 근무하고 있어 앞서 증언했던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한편, 소장을 기록하고 있는 <대청면지>(1995)에는 광복 이후 남만포씨를 비롯하여 나상용, 장천홍(중임), 유정섭, 백봉규(3회 중임), 송원렬, 곽춘만, 유창렬, 조경호, 이봉석, 오준찬 소장까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초창기 인물이나 근무 시기가 누락되어 있어 불분명한 측면이 있으며, 증언에 있었던 백도수씨가 누락되어 있어 정확한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오준찬씨에 이어서 소장을 역임한 분은 오준익(중임), 이성배(중임), 김신철, 민병권씨가 최근까지 근무했다. 이들 중에는 중임(重任)했던 소장이 5명이 있으며, 초대의 백도수씨는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등대와 각별한 인연을 맺은 가문이다. 필자는 소청도 등대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소장의 명단을 열거했으며, 직원이 바뀌어도 등대의 역사는 이어져야 할 것이다. 끝으로 등대에 대해 증언해 주신 오준익씨(소청도 노화동 거주)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필자가 백령도를 왕래하면서 동경했던 소청도 등대. 좀 더 자세히 알리고 싶지만 증언에 의한 한계성과 등대 자료가 없다는 점, 그나마 경북 포항의 국립등대박물관에 일부의 유물이 있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다. 불국사가 경주에 있을 때 그 의미가 있듯이 소청도 유물은 소청도에 있을 때 의미와 해석이 가능하기에 지금이라도 이관되어야 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 김석훈 문학박사·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김석훈 문학박사·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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