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병 할머니, 고(故) 이선비 여사 비석. /사진=김석훈

백령·대청 국가지질공원 명소인 대청도 서풍바지. 그곳은 강난두 정자각에서 출발한다. 정자각 바로 아래에 쌀 모양의 둥그런 비석에는 '해병 할머니 여기에 잠들다. 대청부대 장병 일동'이라는 비문이 새겨 있다. '해병 할머니' 이선비(李仙妣) 여사는 '대청도'와 '해병대'를 사랑하여 지역사회에서 유명하셨던 분이다.

 

▲ 대청도와의 인연과 삶

대청도에서 이분을 모르면 간첩이라 할 정도였다. 학식이나 지위가 높아서가 아니다. 할머니는 1926년 황해도 태탄 생으로, 5살에 양친과 함께 대청도 옥죽동으로 이사한 후 14살에 모래울동으로 출가하였다. 3년 후 남편은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 후 돌아왔다. 다시 1950년 6·25가 발발하여 육지로 피난을 떠났고, 전쟁이 끝나면서 남편이 귀향해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청소년 시절인 일제강점기에는 교육을 받지 못해 어깨너머로 글을 깨우쳤다. 병원이 없어 민간요법에 의한 의술이 구전되던 때에 약초를 캐고 독학으로 터득한 침술과 부항, 그리고 한약을 통해 주민과 장병을 진료하였다. 침통은 늘 지니고 다녔으며, 침으로 살린 응급환자가 한둘이 아니다. 일명 '대청도의 허준'이었던 셈이며, 비법이 담긴 할머니의 자필 노트는 지금도 남아 있다.

사탕과 껌도 습관처럼 가지고 다니며, 마주 오는 나그네를 보면 “먼 길 가느라 얼마나 목이 마릅니까? 이거 하나 물고 가구려” 하며 건네주는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1981년 남편과 사별했으며, 척박한 삶을 살면서도 섬 주민과 해병대에게 잔잔한 고마움을 선사하는 잊지 못할 삶을 살았다.

 

▲ 상여를 멨던 해병대와의 인연

'해병 할머니', 해병대와 어떤 관련이 있어 이런 애칭이 생겼을까? 1970년 대청도에 해병대가 주둔하였고, 낮에는 고물 장수, 밤에는 삯바느질로 어렵게 생활해 오던 할머니는 어느 해병의 군복 바느질로 해병대와의 인연이 되었다. 그녀는 재봉틀을 마련하여 찢어진 군복을 수선해 주거나 휴가 가는 장병의 새 옷을 만들어 주었다. 탄포로 만든 카키 팬티는 할머니가 만들어 한때 해병대에서 유행하는 패션이 되었다. 또한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나갈 당시에는 장병들의 편지를 대신 부치거나 부사관들의 급여를 집으로 송금해 주었고, 해병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도 해주었다. 해병대원들이 훈련할 때는 집 앞에 물동이를 준비해 행군하는 해병들이 목을 축일 수 있게 했다. 척박했던 시절 고립된 섬 속에서 복무하던 해병 장병들에게 선행을 베풀어 준 덕택에 '해병 어머니'가 됐고, 세월이 흘러 '해병 할머니'가 됐다.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해지자 장병들은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할머니를 보살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인천에서 요양 생활을 하시던 중 2012년 향년 87세로 별세하셨다.

장례식은 대청부대장으로 전통적 제례 방식에 따라 거행됐는데 주민들과 해병대원들이 함께 상여를 멨고, 관 안장도 함께하면서 민·관·군이 하나 되는 화합의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대청도에 근무하는 해병들은 모두 문상했을 정도이며, 당시 해병 할머니 장례식은 신문에도 보도되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특히 “내가 죽거든 해병대원들이 다니는 길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해병들이 다니는 길옆에 안장됐다. 이처럼 해병대원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백령도 6여단장이 부임하거나 퇴임할 때도 대청도 '해병 할머니집'을 방문하여 인사를 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묘비는 아픈 해병들에게 귀한 쌀밥을 지어 주셨던 모친을 기리기 위해 막내아들이 쌀 모양의 석재를 선택하여 세웠다고 한다. 척박함과 부족함이 공존했던 시절, 복무 중인 해병대원을 사랑으로 베푼 해병대 할머니, 그녀는 진정한 '해병 할머니'이자 대청도의 휴머니스트였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 김석훈 문학박사·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김석훈 문학박사·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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