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지역 여성들은 3·1운동 이후부터 민족연대 의식을 갖고 사회 참여에 눈을 떴다고 알려진다. 그들은 단체를 결성해 신사상을 받아들이고 경제적 권리를 획득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21년 내리교회에 인천여자엡청년회가 조직돼 선교·사회봉사 등을 펼쳤고, 1925년엔 인천여자청년학술연구회가 창립돼 가난한 아동을 무보수로 가르쳤다고 한다. 이들 단체는 소비절약·물산장려·여자교육 필요성 등에 힘을 쏟았다. 1927년엔 민족역량 집결이란 기치 아래, 인천 출신 여성들을 중심으로 청년운동 단체인 근우회(槿友會)를 만들었다.
여기에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던 인천항 주위엔 정미소가 수두룩했는데, 정미소 여성 노동자의 노동쟁의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즈음엔 성냥공장도 많았다. 1926년 4월 금곡리(현 동구 금곡동) 조선인촌주식회사에선 임금인하에 반발하는 파업이 한달여 계속됐다. 단순한 임금투쟁이 아니라, 일본인 감독의 성적 희롱을 항의했다는 점에서 여성 권리의식 신장 운동으로 평가된다. 이런 지역 여성들의 활동은 해방 이후 더욱 활발했지만, 이어 터진 한국전쟁은 이를 가로막았다. 전쟁엔 대부분 남성들이 가담하고, 여성들은 가족을 뒷바라지하느라 애를 썼다. 이 와중에서도 여성들은 숱한 인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전쟁을 반대하면서 평화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인천에선 한국전쟁으로 인한 여성 중 자력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이들과 그 가족을 구호하려는 시설로 1958년 다비다·마르다모자원이 설립됐다. 주로 한국전쟁 관련 극빈층 여성과 그들의 13세 이하 자녀들을 수용했다. 시 당국의 저소득 모자세대 보호사업은 특히 직할시로 승격된 1980년대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한국전쟁 속 인천지역 여성들의 삶을 풀어낸 책이 나와 눈길을 끈다. 월미도 원주민, 인천여학생의용대원, 구월산유격부대원, 강화도 주민, 월남한 전화교환원 등 한국전쟁을 경험한 여성 5인의 삶을 조명한 내용이다. 전쟁 당시 10대였던 이들이 이제 90대 고령층이어서 채록이 시급하다는 판단에서 작업을 시작했다는 게 인천여성가족재단의 설명이다. 이들 어르신은 면담자와 2∼3차례 만남을 통해 전쟁 중 생활을 가감없이 풀어냈다. 이들은 각자 식모·뜨개질·구멍가게·공장노동·하숙치기 등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고 언급했다.
재단은 2026년까지 인천 여성 구술 채록서를 발간하려고 한다. 내년엔 '인천지역 공단과 공장노동'을 주제로 작업할 예정이다. 지역에서 삶을 면면히 일궈낸 평범한 여성의 경험을 기록하는 일은 큰 의미를 지닌다. 지역 여성 삶의 특징을 드러내는 책들이 후세에 길이 남아 한획을 긋기를 바란다.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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