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학창시절 단골 소풍 장소였던 문학산은 한동안 '배꼽산'으로 불렸다. 멀리서 보면 정상에 마치 배꼽이 솟아난 듯해 그리 지칭했다. 그 배꼽은 산 꼭대기에 자리했던 봉수대(烽燧臺)였다. 이 봉수대는 한국전쟁 후 미군부대 주둔으로 파괴돼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문학산 정상부는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돼 50여년 동안 일반인 출입을 전면통제했다. 그러다가 2015년 10월15일 인천시-국방부 간 협약을 통해 시민 출입을 허용했다.

봉수대는 조선시대 말까지 사용됐던 통신수단이다. 낮엔 연기를, 밤엔 불빛을 이용해 정보를 먼 곳까지 신속하게 옮겼다. 그 내용은 봉수대 굴뚝에서 올리는 연기나 불꽃 수에 따라 달랐다. 이렇게 만든 신호는 인근 봉수대로 이어져 한양까지 전달됐다. 평상시 연기나 불빛으로 알아볼 수 있는 거리를 두고 산 꼭대기에 세웠다. 봉수대는 본디 군사시설로 한몫을 했다. 조선 세종 때 본격적인 활용에 들어가 신호방식과 봉수노선 등을 체계화했다고 전해진다. 세종 4년(1422) 각 지역 봉수대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해 세종 20년 16년 만에 완비했다. 연해나 변방에 설치된 '연변(沿邊)봉수'엔 집을 지어 각종 병기와 생활용품을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전국 봉수 노선은 5개로(路)로 나눠 최종적으론 목멱산(지금의 남산) 봉수대로 집결돼 상황을 즉시 조정에 보고했다. 제1·3·4로는 북방민족 침탈을, 제2·5로는 왜의 침입을 경계해 대비했다. '증보문헌비고'(1908년)엔 봉수대가 전국적으로 643개에 이른다고 기록돼 있다. 삼국시대 이래 부침을 거듭하던 봉수는 1890년대 전신과 전화 등의 근대적 통신방식 도입에 따라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산을 오르면 봉수대를 흔히 볼 수 있다. 무심코 지나칠 봉수대 중 상당수는 그 자취를 찾기 힘들 만큼 훼손된 상태다. 문화재청이 이런 봉수 유적을 유지·관리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가 관심을 모은다. 문화재청은 우선 '제2로(부산 응봉~서울 목멱산)' 노선상 44개 유적 중 역사·학술적 가치, 잔존 상태 등을 고려해 14곳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했다. 여기에 제5로인 인천지역 연변봉수도 그 대상에 올라 눈길을 끈다. 인천엔 서구 축곶봉수대를 비롯해 강화 대모성산·진강산·망산 봉수대 등 4곳이 포함된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속하는 봉수대는 역사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고증이나 학술 연구 등이 이뤄지지 않아 안타깝다. 방치하거나 관심 밖에 둔 봉수대에 대해 이제라도 제대로 살피는 일이 절실하다. 우리 전통 군사시설인 봉수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계의 시도를 기대한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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