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부평 쪽으로 가려 하면, 웃돈을 줘야 했다. 기사들이 부평으로 넘어가는 길을 꺼려해서다. 시내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이들은 부평을 '인천 이외 지역'이라고 인식했다. 부평은 같은 인천이면서도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한 듯하다. 아울러 대부분의 인천인은 출신을 물으면 “인천”이라고 말하는 반면, 부평 주민들은 “부평에서 왔다”고 답하기도 한다. 부평이란 인지도를 내세우며 자존감을 표하는 경향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주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부평의 역사를 한번 보자.
이 지역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관청이던 부평도호부가 있어 행정과 치안 등을 관할했다. 부천과 구로 등 경기 서부를 대표하던 큰 고을이었으며, 인천과는 별개였다. 그러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부평은 인천으로 들어왔다. 부평을 경성부와 인천부 중 어디에 둘지 고심하다가 인천부 편입으로 최종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의 부평은 서울시 일부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부평은 일제 강점기 인천조병창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일본군이 군수공장을 지은 전략적 요충지. 강제 동원 조선 노동자들은 각종 무기 생산을 위해 열악한 환경에 시달렸다. 여기서 만든 무기는 경인철도를 통해 인천항으로 운송된 후 일본군의 2차대전 물자로 이용됐다. 그런가 하면 미쓰비시 인천제작소도 부평조병창에 전쟁물품을 공급했는데, 노동자들이 살던 '줄사택'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조병창은 해방 이후엔 부평미군기지(캠프마켓)로 사용됐다. 캠프마켓은 일제부터 미군주둔까지 우리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유적지'다.
이래 저래 부평엔 사람들이 몰려 살기에 필요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한때 인구수로 인천은 물론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으뜸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런데 부평구가 지속적인 인구 감소로 이전 위상을 찾기 어렵다는 소식이다. 25년간 이사관(2급)으로 채웠던 부단체장 자리를 부이사관(3급)에게 넘겨주면서 체면을 구겼다. 부평구 인구는 2020년 49만4962명으로 줄어든 뒤 50만명대를 회복하지 못한다. 1995년 10개 군·구 체계로 인천 행정 조직을 개편한 후 부평구는 개청 이듬해 인구 50만명대로 진입했다. 2006년엔 57만284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젠 서구(58만9013명)와 남동구(50만6181명)에 뒤처진 상황이다.
부평구는 조직 하락세에 접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해도 주민들이 여기는 부평사랑엔 변함이 없기를 바란다. 부평에 대한 자부심은 하루 이틀 사이에 형성되지 않았다. 구청 직급이 뭐 대수인가? 재개발에 따른 인구 반등을 다시 노리면 된다. 내려놓을 건 '허울'이지 '알맹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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