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출범…인천 문화계 최대 사건
2010년 구월동서 중구로 이전 새 출발
고유섭·유희강·현덕·박두성 선생 재조명
아트플랫폼·근대문학관·트라이보울 등 운영
예술인 지원·인천미술은행 등 다양한 사업
인천문화예술연감·평화 총서 등 책 발간
2004년 12월 인천문화재단의 출범은 인천지역 문화예술계에 그야말로 일대 사건이었다. '인천문화재단은 우리 시의 전통문화예술 전승과 새로운 문화예술 창조를 통해 지역 문화예술의 활성화와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인천의 도시 경쟁력을 키우고자 설립되었다'라고 재단 설립 취지문은 밝히고 있다.
1970~80년대, 공장지대가 그 점유 지역을 넓혀 가던 인천은 서울의 위성도시로 전락했다. 문화예술 분야는 더욱 심했다. 국민의 생활 형편이 점차 나아지면서 문화적 관심도도 높아졌지만 문화예술 관련 인프라와 인력은 서울에서 대부분 흡수하는 형국이었다. 타 지역의 경우 지방정부 차원의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이 인천에 비해 크게 높았다. 미술 쪽만 놓고 보더라도 극명해진다. 서울시립미술관이 1988년에 개관했고, 광주시립미술관(1992년), 부산시립미술관(1998년), 대전시립미술관(1998년) 등이 문을 열었다. 경기문화재단은 1997년에 설립, 다양한 활동을 하던 터였다. 인천에서는 1999년 무렵부터 자성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인천을 더 이상 문화예술 낙후지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거였다.
2000년 5월, '인천광역시문화예술진흥조례' 전문 개정(안)에 인천문화재단 설립 규정을 신설했다. 인천연구원(당시 인천발전연구원)은 2001년 4월 인천문화재단 설립 타당성 조사 분석 보고서를 내놨다. 그해 9월 인천문화재단 설립 관련 시민공청회를 열고, 관련 조례를 다듬고 토론회 등을 통한 전문가 논의를 이어갔다. 2003년 6월에 인천예총과 인천민예총 공동주최 '인천문화재단 설립, 어디까지 왔나'란 주제의 토론회가 열렸고, 12월에는 인천문화재단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 제1차 회의를 개최했다.
2004년 들어서면서 발걸음이 빨라졌다. 6월에 인천광역시문화재단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었으며 7월에는 인천문화재단 설립 준비단이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9월, 인천문화재단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고 정관을 확정했으며 이사추천위원회도 구성했다. 10월에 임시 이사회를 열었고, 11월에 인천문화재단 1기 이사회를 구성했다. 법인설립 허가와 등기 절차도 마쳤다. 12월,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우리은행 4층에서 인천문화재단이 공식 출범했다.
이사장인 안상수 인천시장은 초대 대표이사로 진보적 문학평론가 최원식 인하대 교수를 임명했다.
첫 출발 당시 인천문화재단의 외형은 미약했다. 사무실은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인천 남동구 구월동이었으며 전용면적은 300㎡도 채 되지 않았다. 직원은 대표이사를 포함하여 13명. 395억 원의 기금을 갖고, '인천의 문예진흥'이란 포부를 안고 출범한 재단의 입장에서 보자면 너무나 작았다. 2006년 2월 구월동 문화예술회관 광장 건너편 한국토지공사빌딩 3층으로 이사했다. 전용면적이 445㎡가 넘었으니 첫 사무실에 비해서는 많이 넓어진 셈이었다. 6년여간의 남동구 시대를 접고 2010년, 인천 중구로 옮겨 새롭게 출발했다. 인천문화재단의 중구 이전은 신포동 부근과 차이나타운 일대의 상권을 되살리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먼저 개관한 인천아트플랫폼과 시너지효과를 낸 부분도 있을 터이다. 저녁 시간이면 손님이 없어 가게 문을 일찍 닫아야 했던 이 일대에 재단이 중구에 자리를 잡은 뒤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인천문화재단은 실질적인 업무 첫해인 2005년을 '문화인천 원년'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내세웠다. 그 시작이 '인천 문화예술 대표인물 조명사업'이었다. 첫 번째 인물은 우현 고유섭(1905~1944) 선생이었다. 한국 미술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한국 미학의 선구자 격인 우현은 마침 2005년이 탄생 100주년이었으니 첫해의 인물로 삼기에 맞춤이었다. 2006년에는,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되자 불굴의 예술혼으로 좌수서의 세계를 열어젖힌 검여 유희강 선생(1911~1976)이 대표인물이 되었다. 2007년에는 아동문학의 신세계를 펼친 작가 현덕(1909~?)이었으며 훈맹정음이라 일컬어지는 우리의 점자를 창안해 낸 송암 박두성 선생(1888~1963)이 2008년을 차지했다.
2022년 11월 기준으로 인천문화재단이 맡아 운영하는 각종 시설만 해도 다양하다. 중구의 재단 사무실 가까이에 인천아트플랫폼, 한국근대문학관, 인천생활문화센터 칠통마당 등이 있으며, 미추홀구 도화1동의 옛 상수도 가압펌프장을 개조해 만든 인천공연예술연습공간, 동구의 우리미술관, 중구 전동의 청년문화창작소 등은 구도심에 문화적 활력을 불어넣는 공간으로 자리를 굳혔다. 특별한 외관으로 주목받는 송도국제도시의 트라이보울도 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조직도 무척 커졌다. 3팀 체제로 출발했던 조직은 2실(감사실, 정책협력실) 4본부 체계를 구축했는데 경영본부(2팀), 예술지원본부(2팀, 1센터), 지역문화본부(1팀, 2센터, 1사업단), 문화공간본부(한국근대문학관, 인천아트플랫폼, 트라이보울)가 그것이다.
인천문화재단의 사업은 매년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예술표현활동 지원, 인천형 예술인 지원, 생활문화 지원 등 여러 분야로 나뉘어 있다. 인천미술활성화 사업도 있다. 인천 연고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고, 구입한 미술품을 대여하거나 전시함으로써 인천 미술문화 활성화를 꾀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되었다. 이름 그대로 '인천미술은행'이다. 작품 대여는 각 공공기관, 문화시설, 기업, 단체 및 전시행사 등이 가능하다.
인천문화재단이 발행하는 다양한 장르의 도서도 주목할 대상이다. <인천문화예술연감>은 지역 문화예술활동 전반을 집대성해 매년 발간하고 있는 특색 사업이다. 전국 유일의 사업이라고 문화재단은 강조한다. 인천의 문화예술 관련 데이터의 축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006년 <2005 인천문화예술백서>로 시작해 2007년부터 <인천문화예술연감>으로 이름을 바꾸어 계속 진행하고 있다. 인천시립박물관과 공동으로 작업한 <볼음도-인천 섬 생활사 조사보고 제1집>이나 '평화 총서' 시리즈, <인천을 감각하는 7인의 대화>, <인천을 감각하는 8인의 대화> 등은 가치가 큰 사업으로 꼽히고 있다.
인천문화재단을 이끈 대표이사는 2004년 초대 최원식 대표에 이어 제2대 심갑섭 대표, 제3대 강광 대표, 제4대 김윤식 대표, 제5대 최진용 대표, 제6대 최병국 대표를 거쳐 2022년 제7대 이종구 대표가 맡고 있다.
그동안 문화재단을 둘러싼 비판적 시각도 일부 있었고, 조정 과정도 거쳤다. 그 사이 인천광역시의 문화적 역량도 커졌다. 인천문화재단의 역할도 덩달아 커졌다. 대한민국 최첨단 국제도시와 민족의 시원 신화를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인천. 그에 걸맞은 문화적 다양성이 펼쳐졌으면 하는 게 많은 인천 시민들의 생각이다.
/인천생각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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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인천 아트플랫폼은 카페 빼고는 운영을 하는건지 안하는건지 사람도 없고 행사도 없습니다.
개항장 행사할때도 이쪽은 사용을 안하더라구요. 아트플랫폼 상상플랫폼등 중구에 플랫폼은 많이 가져다 놓는데
인천의 예술성은 죄다 송도에 있고 원도심은 빨간벽돌이랑 푸른이끼담장이 인상적이였습니다.
재단이 지원하는 분야도 이게 헛돈 날리는게 아닌지 확인해야합니다.